공교롭게도 두 대통령의 말이 교차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은 각을 세우고 전직 대통령은 통합을 강조한다.
그래서일까? <한겨레>의 정리는 명쾌하다. 전·현직 대통령의 해법이 상반된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은 "통합만이 살길"이라고 하고, 현직 대통령은 "통합은 지역주의 회귀"라고 한단다.
이런 상반된 해법에 재집권 전략에 대한 시각차가 투영돼 있다고도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먼저 전통적 지지층을 복원한 뒤 개혁세력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수순을 제시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개혁세력을 먼저 아울러서 지역주의 정당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 이후에 호남세력을 포괄하자는 접근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략 차이는 지역기반의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호남의 주도력을, 노무현 대통령은 '영남 바탕'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분석이다. 비단 <한겨레>만이 아니라 다수의 언론이, 그리고 정치권 상당수가 그렇게 보고 있다.
'호남 주도력' vs '영남 바탕'
이런 분석이 진실이라면 앞날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여권 분열의 본바탕에 지역 패권주의가 깔려있다면 화합과 절충은 불가능하다. 차라리 빨리 쪼개지는 게 낫다.
하지만 "아닐지도 모른다"는 시각도 있다. 이런 시각의 단서를 제공한 곳은 <중앙일보>다.
<중앙일보>는 노무현 대통령과 각을 세우면서 반사이익을 누리던 고건 전 총리 진영이 최근 들어 경계 모드로 돌아섰다고 전하면서 한 참모의 말을 덧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사저 회동을 할 때 이미 고건 전 총리는 (여권의 대선 후보가)아니란 점을 분명히 한 상태"라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이 말을 전하는 대목에서 이런 소제목을 붙였다. "짜고 치는 고스톱?"
무슨 뜻인가? 소제목과 전언을 종합하면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연출하고 있으며, 그 일단이 '고건 때리기'라는 것이다.
정황만 놓고 보면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건 전 총리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평가는 이미 공개됐으니까 생략하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가는 어떨까?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를 방문한 시점은 북한 핵실험으로 폐기 위기에 몰린 대북 포용정책을 살리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동분서주하던 때이다. 고건 전 총리가 대선 주자 가운데 가장 먼저 대북 포용정책 전면 재검토를 '선창'한 직후이기도 하다. 이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고건 전 총리를 어떻게 봤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곱게 보았을 리 없다.
조금만 더 나가보자. 전·현직 대통령이 '의기투합'한 게 사실이라면 단지 '고건 불가' 선에서 그쳤을까?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큰 그림'을 같이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통합의 대원칙과 절차, 그리고 통합 후보에 대해서도 얘기가 오갔을 가능성 말이다.
이렇게 추론하니 새롭게 들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5일 민주당 지도부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한 말이다. "민주당이 갈라선 것은 큰 불행이었다, 이제 또 다시 결심할 때가 왔다"고 했다.
결심할 '때'를 강조한 DJ의 속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왜 '때'를 강조했을까? 공교롭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 말을 한 시점은 통합에 부정적 또는 소극적이던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대법원의 유죄 확정으로 대표직을 상실한 직후이고 노무현 대통령이 '전면적인 공세'에 나설 즈음이다.
그래서 이 말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당이 갈라설 때 나간 사람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만 민주당 일부에서도 '빨리 나가라, 나가면 잘될 것이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했다"고 비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 말을 확장하면 '땅 다지기'에 들어선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극단' 세력을 제어함으로써 통합의 기반을 다지려는 시도다.
'고건 때리기'도 마찬가지다. 여권 내 대선주자 가운데 가장 앞서 있는 고건 전 총리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세력 쏠림현상, 그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통합 저해요인을 없앨 수 있다. 삐져나온 돌을 쪼아내야 길이 평평해지는 법이다.
정황과 요인은 분명 있지만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반정황'도 만만치 않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치개입 가능성을 부인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평통 발언 중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직결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대북송금 특검 수용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은 투명성을 바라는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했다. <연합뉴스>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 발언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장을 물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잘라 말했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이를 두고 동교동의 한 관계자는 "언짢은 표시로 봐도 된다"고 설명했다.
대북송금 특검문제는 전·현직 대통령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입장에선 필생의 업적인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성을 깎아내린 시도이기 때문이다.
전·현직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문제로 골이 파인 상태에서 과연 '동교동 의기투합'을 할 수 있었을까? 의기투합을 했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왜 민주평통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감부위'를 다시 건드렸을까?
엄연히 다른 '상왕'과 '세자'
의기투합의 사실 여부를 여기서 확정짓는 건 불가능하다. '정황'과 '반정황'이 교차하는 상태에서 섣부른 사실 판단은 억측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여권 내 정계개편의 상수는 노무현-고건도, 노무현-김근태·정동영도 아니다. 바로 노무현-김대중이다. 전·현직 대통령의 대선 개입이 옳고 그른지를 떠나 힘의 무게추가 그렇게 작동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전·현직 대통령이 여권 내 정계개편의 상수라면 판은 일반의 예상과 달리 짜일 수도 있다. 두 상수가 정면충돌함으로써 그 밑에 있는 계파의 행동반경을 극도로 좁힐 수 있다. 이와는 정반대로 두 상수가 당장의 이해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처지에서 '거래'와 '절충'을 할 수도 있다. '상왕'과 '세자'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