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여정 40년, 그 세월 동안 한 곳만을 바라보고 달린 사람이 있을까? 40년을 길 위에서 외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유신독재에 항거하다 사형당한 시체마저 빼돌리는 차에 올라 외치다가 무릎 연골이 찢어지고 감옥에 간 사람이 어디에 또 있을까?
12월 26일은 대추리 주민들과 함께 하는 성탄미사를, 고난 받는 민족과 힘없는 민중의 벗으로 살아온 문정현 신부 서품 40주년 기념미사로 봉헌하는 날이다. 이날은 또한 2년 전부터 문 신부를 대추리 주민으로 받아준 주민들을 위로하는 동네 잔칫날이기도 하다. 안동에서 멧돼지 한 마리와 과메기까지 준비해 올라오고 있었다.
전쟁의 폐허처럼 파괴된 대추분교를 직시하며 서 있는 농협창고, 미군기지를 삽으로 떠내는 벽화 앞에는 주민들과 사제들이 가슴마다 넘치는 평화로 술렁이고 있었다. 이날 미사의 주인공은 문정현 신부이고 잔치의 주인공은 주민들이다.
문정현 신부의 40주년 서품 미사
오후 3시 문정현 신부의 주례로 시작된 서품 40주년 미사는 기쁨과 축하가 아닌 비장함과 결의에 찬 미사였다. 백발에 수염마저 서리가 내린 노사제는 주민들의 울분을 잘게 갈아서 내뱉는 듯, 떨리는 음성으로 미사의 시작을 알렸다.
"올 때까지 온 상황입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언제 강제철거가 있을지 모릅니다. 주민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대추리를 지키려는 싸움이 있을 때마다 달려오는 사람들, 마음은 대추리에 있지만 몸이 멀리 있는 사람들, 서서히 관심 속에서 살아지는 사람들의 정신을 흔들어 깨우는 미사, 그래서 주민들의 얼굴에 다시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2000년 전 식민지의 땅 이스라엘 광야에서 선포된 기쁜 소식이 대추리에서도 선포되길 바라는 강론은 김인국 신부가 당당하게 선포했다.
"성탄의 기쁨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체험하고 있는 분들이 대추리 주민들입니다. 어둠과 불의를 몰아내는 성탄처럼 여러분의 아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자주와 평화의 길을 막고 있는 산들이 무너지는 성탄이 되길 희망합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고 모든 무기가 사라지고 전쟁의 기운이 깨끗이 씻어지는 성탄이 되길 바랍니다.
그동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대추리에 함부로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누가 돌멩이를 던졌습니까? 그 모난 돌에 맞아 많이 아프셨죠? 그 돌에 피눈물도 흘리셨죠? 그런 모든 아픔과 눈물을 먹고 자주와 평화의 새순이 올라올 것입니다.
대추리 주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문정현 신부님이 아닙니다. 바로 대추리 주민 여러분입니다. 이 땅을 지키려는 투쟁과 저항, 민족의 자주와 세계 평화를 위한 투혼의 역사가 없었다면 오늘 이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민들 덕분에 문 신부님이 이곳에 살고 계시니 오히려 저희가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대추리 주민들에게 큰 박수를 보냅시다!"
전국에서 32명의 신부와 20여명의 수도자, 100여명의 주민, 50여명의 신자들, 각계각층 사람들이 대추리의 평화를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농협창고 앞에서 2부 '길 위의 신부' 서품 40주년 축하식을 기다리고 있는 자리에서 골롬반 수도회 오기백 신부(영국 출생, 정의평화위원회)와 담소를 나누었다.
"오늘 이 곳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제 양심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세계지배전략과 싸우는 고난의 길, 주민들이 우리 시대의 예언자의 길을 가고 있고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의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간절한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주민들, 진정한 평화의 의미가 무엇인지 실제로 보여주고 있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대추리 주민들 끝까지 싸워서 승리하길"
32년 동안 힘과 용기가 되어준 문 신부를 축하하기 위해 대추리 사람들 전시실 앞에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이 모여 있었다. 40세에 미망인이 된 백발의 이영교(72)씨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늘 주민들을 보니까 저희들의 과거를 보는 것 같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의해 남편을 잃고 32년의 세월 동안 싸웠습니다. 인혁당 사건 재심재판에서 검찰 구형이 무죄이니 승리한 것이지요. 우리는 독재정권과 싸웠고, 대추리는 미국과 싸워야 하지만 대추리 주민들도 끝까지 싸워서 승리하길 바랍니다."
'길 위의 신부' 서품 40주년 축하식은 노순택 사진작가의 '길 위에서' 슬라이드 상영으로 시작되었다. 흑백사진 여백에 흐르는 정의와 평화의 강물은 캄캄한 농협창고의 눈망울들 속으로도 흐르고 있었다. 젖은 눈망울로 들어오는 효순이와 미선이, 대추리 주민들, 수많은 함성과 분노들. 그리고 어둠 속의 촛불처럼 선명한 단어들.
'너희들은 아느냐 우리들의 고통과 비통함을!', '평택에 평화를' '대추리 김지태 이장 석방을 촉구하는 21일 단식투쟁', '그의 나이 칠순, 이 땅의 고단한 예수님을 찾아 떠난 사제의 길 40년', '그리고 대추리 늙은 예수님들과 함께 한 2년', '그는 무엇을 위에 길에서 싸우는가', 'Pro Vobis Et Pro Multis! 너희와 모든 것을 위하여'
"나는 대추리에서 평화를 배웠어. 평화가 별거야?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 것, 제 자리를 찾는 것, 그게 평화인 게야."
"노동자가 일터를 찾고 농부가 땅 위에 서게끔 바라보아 주는 것, 그걸 함께 지키는 것, 그게 평화잖아."
'늙은 사제는 오늘도, 함박눈 속에서도, 길을 걷는다.'
투쟁의 벗인 박순희씨의 축사가 이어졌다.
"1975년 군부유신독재 치하에서 숨 죽여 살며 뜨거운 울분을 속으로만 삭히며 살아가는 시대, '크리스천으로서 양심의 뒷전에서 괴로워하고 갈등할 때 신부님은 착취당하고 억울한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살아계신 예수이셨습니다."
"대추리 투쟁은 전쟁반대·평화 지키는 평화애호투쟁"
다음은 인혁당 사건 희생자를 대표해서 전창일 선생님의 축사가 이어졌다.
"살아서 대추리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신부님의 죽는 길이 사는 길이라는 사즉생(死卽生)의 강인한 투지 앞에 미국정부와 한국정부의 약탈행진은 일단 멈추었습니다. 신부님과 대추리 농민들의 강인한 투쟁 앞에 기지이전 5년 연장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추리 투쟁은 단순히 농토 지키기 운동이 아니라 그것은 무서운 인간살육을 저지르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는, 그리고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위대한 평화애호투쟁이라 확신합니다."
다음 무대에서는 김평 동화작가가 <신부님 평화가 뭐예요?>(우리교육출판사) 어린이 평화 교육용 책을 문 신부에게 증정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 가르쳐야 할 것들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없었던 정의와 평화를 신부님의 삶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다음은 들소리 방송국에서 <스폰지>를 페러디한 영상물을 상영했다. '문정현 신부님은 무엇이다?' 네모 넣기 인터뷰였다.
'인권신부', '정신적 지주다', '대추리의 전인권 신부님', '신부님은 장난꾸러기?', '문정현 신부님은 평화다', '희망을 주는 사람', '지킴이들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신부님', '총각'(하-하-하-), '신부가 다 총각이지 그럼, 신부 중에 장가드는 사람 어딨어?', '문정현 신부는 친구여'.
문 신부가 작사한 '평화란 무엇이냐'란 노래와 함께 무대로 오른 주민들과 축하객들, 노을과 고향의 봄을 신나게 아코디언으로 연주하는 신부. 대추리 할머니 합창단의 '팽성은 우리 땅' 노래로 축하의 무대가 끝이 났다.
"대추리 할아버지들, 또 다른 내 할아버지들"
고단한 40년 사제생활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들고 답사하는 문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대추리 도두리를 어떻게 보상액으로 따질 수 있단 말입니까? 주민은 바로 우리 자신이 부모입니다. 주민들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마세요. 대통령께서 '미국에게 매달려가지고, 바짓가랑이 매달려가지고, 미국의 엉덩이 뒤에서 숨어가지고 형님, 형님 백만 믿겠습니다.' 라는 직격탄이 헛소리가 아니길 바랍니다. 19일, 이달 29일 또 빈 집을 때려 부수겠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소문이 무성한 뒤 그 소문은 반드시 현실이 되었습니다.
사제서품 10주년은 박정희 정권 때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25주년 은경축은 동생 문규현 신부가 감옥에 있어 할 수 없었습니다. 40주년은 대추리 주민들 때문에 행사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이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모두가 대추리 주민들 덕분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주민들의 고통에 함께 하는 자리, 주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새 미군기지 가로등 불빛들이 선명한 밤이 되었다. 마을회관으로 향하는 발걸음들도 대낮처럼 환했다. 벌써 회관은 잔치가 한창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과메기를 초고추장에 찍어 상추에 싸신다.
"쫄깃쫄깃한 것이 어디서 왔디야!", "소주 맛도 죽이네 카-"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진다. 평화공원의 파랑새 아래서는 멧돼지가 숯불에 구워지며 지글지글 연기를 내 뿜고 있었다. 모처럼 피어난 주민들의 웃음꽃 속에 그동안 보지 못한 낯선 꽃도 피어있었다. 미국 시카고에서 온 에릭(Eric)이었다.
"인권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대추리 주민들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오늘 대추리 주민들에게 강한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평화와 인권을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눈물겹게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농부였는데 1930년 은행에 땅을 빼앗겼습니다. 농부로서 농토를 빼앗긴 슬픔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대추리 할아버지들은 또 다른 내 할아버지들입니다. 내가 한국 사람으로 대추리에 태어났다면 우리 할아버지가 될 수 있으니까요."
"에릭 코리언 위스키 카~"
"땡큐!"
"안주 양파 아~"
"땡큐! 감사합니다."
나라와 언어와 피부가 달라도 평화 속에서 그들은 한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