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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날리아 양부모인 제임스와 데브라. 이들은 결혼한 지 5년이 지났는데 아이가 안 생긴다. 아이를 몹시 기다리던 이들 부부는 결국 입양을 결심하게 된다. 그래서 워싱턴에 있는 'ASIA(Adoption Service Information Agency)'라는 한 입양 기관을 찾아가 입양 신청서를 제출하게 된다.
그러나 신청서를 낸다고 당장 입양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다. 입양기관에서 철저한 심사를 받고, 부모가 되기 위한 소정의 교육도 받아야 했다. 이런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입양 아기의 사진과 이름을 받게 되는데….
자신의 입양 자녀인 애날리아에 대해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또 어떤 절차를 거쳐 입양을 하게 되었는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데브라가 쓴 'Our Baby'라는 스크랩북이 바로 그런 생생한 자료를 담고 있다.
우리 아기를 기다리며
1986년 9월 16일, 'ASIA'에 입양 신청서를 제출했다. 우리는 로녹에 있는 가톨릭 자선기관에서 '홈스터디'(주: 자녀 양육을 위한 일종의 부모 교육)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입양을 원하는 다른 두 부부와 함께 1월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교육은 5주 동안 계속되었다. 교육이 끝난 뒤 아기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4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1988년 1월, 입양이 가능하다는 말을 'ASIA'로부터 들었다. 그 아기가 바로 너, 애날리아였다.
애날리아를 입양하게 된 데브라의 흥분과 감격은 'Our Baby'의 다음 페이지에서도 이어진다.
우리 아기가 도착하다
1988년 1월 26일 오후 4시 30분, 'ASIA'에 있는 '메리 더르'에게서 전화가 왔다. 식료품을 사 가지고 막 집으로 들어오던 참이었다. '우리 아기'가 결정되었다는 전화였다. 나는 너무나 기쁘고 흥분이 되어 "Oh my Goodness!"라고 말하면서 방안을 뱅뱅 돌았다.
맨 먼저 캐시와 짐, 채드, 킴. 로켈(이모 등 친척) 등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그날 밤 소그룹 모임이 끝난 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다음날, 아빠와 함께 워싱턴의 'ASIA'를 방문했다. 거기서 바로 네 사진과 파일을 받았다. 이런 일이 실제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정말 믿을 수 없었다.
데브라가 기록한 'Our Baby'를 읽으면서 나는 이들 부부의 무한한 사랑에 감동 받았다. 그래서 당시의 입양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우리나라는 입양 절차가 너무 까다로워서 그 때문에 국내 입양이 위축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미국에서의 입양은 얼마나 쉬울까. 애날리아 입양과 관련하여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자 제임스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 입양을 결심했을 때 '한국'이라는 특정 국가를 지정하여 입양을 의뢰했는가. 그리고 여아, 남아 성별도 지정을 했는가.
"우리 부부는 한국의 여자아이를 입양한 어느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ASIA'를 통해 입양을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데브라가 그 기관과 접촉을 했다. 'ASIA'는 한국과 인도의 입양아만을 다루는 기관이었다.
우리는 한국과 인도, 두 나라를 모두 고려했지만 한국에서 이미 입양을 한 부부와, 한국 아이를 입양하려고 하는 몇몇 부부들을 만나본 뒤 우리도 한국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한국 입양이 더 수월했다. 여아, 남아를 구별하여 입양하게 되면 시간이 더 걸릴 거라고 해서 우리는 그냥 기관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우리가 한국을 선택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아기가 입양될 때까지 한국은 위탁모에게 맡긴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그 점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위탁모에게 맡긴 아이는 그냥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보다 개인적인 관심이나 상호교감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태어나서 처음 몇 달 동안 빈번하게 좋은 상호교감을 갖는다는 건 아이의 성장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 미국에서 아이를 입양하는 과정은 어떠했나. 까다롭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ASIA' 기관과 연계되어 있는 가톨릭 자선기관을 통하여 '홈스터디'를 받았다. 이 프로그램은 입양의 한 과정으로 양부모가 될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곳에서 입양아를 잘 돌보고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 교육을 받고 평가를 받게 된다.
우리는 'ASIA'와 홀트, 가톨릭 자선기관을 통해 입양을 준비 중인 대여섯 부부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교육 내용은 외국에서 오는 입양아가 겪게 될 급격한 변화를 이해하고, 새로운 환경에 아이들이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지 도와주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입양이 얼마나 까다롭냐고? 일단 많은 서류를 작성해야 했다. 여러 가지 질문이 많았는데 예를 들면, 우리의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얼마를 투자하고 있는지, 그동안 모아둔 돈은 얼마나 되는지, 또 돈은 어떻게 쓰는지 등을 물었다.
그런데 질문은 그런 재정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 부부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자랄 때 가정환경은 어떠했는지, 우리 부부의 결혼생활과 부부 상호간의 관계는 어떠한지,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등도 자세히 물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한국 아이를 입양하는 것에 대해 양가 부모님과 형제, 자매, 삼촌, 이모, 고모 등 친척들과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물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우리 부부의 입양에 대해 싫어하지는 않는지, 입양을 지지하는지를 묻기도 했다.
이런 세세한 내용의 보고서를 'ASIA'에 제출하면 그 기관의 훈련자가 우리가 사는 곳을 방문하게 된다. 그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우리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 또 다른 보고서를 작성해 'ASIA'에 제출하게 된다.
보고서는 우리가 입양아 부모로서 적합한지 여부를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좋은 양부모가 되기에 우려되는 점이 많고, 충분한 재정적인 재원이 없다고 판단하게 되면 더 이상 입양은 진행될 수 없다."
- 입양 신청서를 작성하고 아기를 직접 만나기까지 얼마나 걸렸나.
"신청서를 작성하고 '신정림'이라는 아기와 위탁모 사진이 오기까지는 18개월이 걸렸다. 당시 사진 속의 아기는 8개월이었는데 사진을 보고 즉시 아기를 입양하는 것도 아니었다. 'ASIA'에서는 하루, 이틀 더 시간을 줄 테니 충분히 생각해 보고 입양 여부를 알려달라고 했다."
- 애날리아를 입양하기로 결정했을 때 기분이 어땠는가.
"대단히 기뻤다. 우리는 아기에 대해 오래 전부터 기다려왔고, 기도해왔기 때문에 무척 흥분되었다. 우리 가족들과 교회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애날리아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우리 아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항에서 애날리아를 안자마자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아내가 간호사로 일하는 병원에서도 우리의 입양 사실을 알고 '베이비 샤워'(태어날 아기를 위해 임산부에게 유아용품을 선물해 주는 파티)를 열어주었다. 특히 우리 친척들이나 교회 식구들 역시 애날리아를 그들의 가족처럼 생각해 주었다."
- 애날리아를 입양하기로 결정한 뒤 그동안 아이가 안 들어서던 데브라가 임신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않다. 데브라는 5년 동안 임신 노력을 했지만 아이가 안 생겼다. 그래서 입양을 결심한 것이었다. 그런데 애날리아를 입양하고 난 뒤, 그러니까 애날리아가 두 번째 생일을 맞기 조금 전에 데브라가 임신을 했다. 그래서 크리스타를 출산하게 된 것이다. (크리스타는 1990년 2월 2일생)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가족 친지들로부터 사랑과 환대를 받았던 애날리아는 양부모 밑에서 어떻게 자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