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 미국토목협회에서 노예도 아닌 자유인으로 교육받지 않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토목공사의 극치라고 평가한 곳, 논두렁을 이어놓으면 지구 반 바퀴를 돌고 남을 정도며,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영구적인 문화적 풍경 등등….
@BRI@말만 들어도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 필리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340km 떨어진 곳 바나우에 바타드(Batad) 마을을 찾아 떠났다.
꼬박 10시간을 달려 도착한, 겨울을 느낄 정도의 고산지대 바나우에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지프니를 타고 천길 낭떠러지 길을 따라 가슴을 졸이며 코딜레라(Cordillera) 산맥의 1500m 산 정상을 올랐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차가 갈 수 없고 발품을 팔아야 바타드 마을에 갈 수 있다. 마을을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까지는 내리막길이라 1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빨간 지붕이 보이는 곳이 전망대.)
자연과 함께하는 진한 삶의 현장
바타드 마을은 2천여년 전 말레지아에서 흘러들어온 이푸가오 족이 살 곳을 찾았으나 타 부족들의 배척으로 갈 곳이 없어 정착한 곳이라고 한다.
원두막처럼 네발 기둥을 세워 아래는 돼지, 닭, 개 등 가축을 키우고 위에는 사람이 사다리로 오르내리며 사는 집이 한 폭의 그림처럼 놓여있었다.
하늘 끝닿는 곳까지 깎아 만든 계단식 논에는 한해 농사의 시작인 못자리가 한창이었다. 수천년을 두고 1m 폭의 다락논을 만들기 위해 3m가 넘는 높이의 돌계단을 쌓아 만든 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 인간의 손으로 만든 최대의 토목공사라 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전망대에서 바라만 볼 수가 없어 이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 마을까지 내려가 보았다.
현대문명의 편리함은 이곳까지도 그냥 두지 않았다. 전기가 들어오고, 초등학교 교육이 시작되면서 청소년은 점차 도시로 나가고 농사짓는 사람은 노인과 부녀자뿐이라 생명줄처럼 생각했던 다락논이 일부 묵게 되자 정부가 보존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와 손자가 절구에 나락을 찢고 있는 모습이 하도 정겨워 사진을 찍으려 하자 대뜸 돈을 달라고 한다.
기념품을 팔고 있는 아가씨에게 농사를 지어 쌀을 파느냐고 물어보니 쌀 농사지어 식량만 간신히 해결하고, 다른 방법으로 생활비를 번다고 한다.
초등학교 졸업 후엔 멀리 바나우에까지 가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방학이라 가정을 돕기 위해 기념품을 팔고 있다고 말한다.
유기농업을 알려면 바타드를 가보라
찻길이 닿지 않는 곳, 그래서 멀리 산꼭대기에서 등짐으로 생활용품을 날라다 먹고 산다. 가파른 길을 하루에 장정이 등짐을 지고 다섯 번을 오르내릴 수 있다고 하니 짐작이 가지 않는다.
논농사에 필요한 농약, 비료는 구경도 못해본 사람들이다. 소를 이용하여 논을 갈고 써레질하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3m 높이의 돌계단을 소가 오르내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사람의 힘과 간단한 농기구로 해결해야 한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논농사만큼은 전통농업을 고수하고 있다. 논에는 다슬기가 우글거리고 나뭇잎을 꺾어 잠겨놓은 논물은 검은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한해 2기작까지도 하던 농사도 이제는 늙고 일손이 모자라 1모작을 해야만 한단다. 이곳 쌀은 무공해 쌀로 인기가 있어 일반쌀값의 3-4배가 넘는 1kg에 1000원에도 살 수가 없었다.
'헤드헌터(head hunter)'의 마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코딜레라 산맥을 끼고 이푸가오족과 본톡족, 사가다족이 살면서 논농사에 필요한 물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가뭄이 들면 물 전쟁은 결국 부족간의 싸움으로 번지고 젊은이가 장가를 가려면 다른 부족의 목을 베어 와야 결혼을 허락하던 풍습이 남아있어 이 세 부족에게 '헤드헌터'라는 악명이 붙어다녔다고 한다.
높은 계곡에서부터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다 보니 물은 바로 생존이었고,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자기만이 살고 있는 줄 알고 있던 이들도 문명의 이기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결국 하늘 끝닿는 다락논은 관광상품으로 변해가고 8순 노인까지도 길거리에 나와 콜라를 팔게 만들어 버렸다.
이제 이들이 더 전통을 고수하기는 힘겨워 보였다. 젊은이는 힘든 농사일을 마다하고 도시로 나가고 있다. 부족의 공동체 의식은 점차 약화돼가고 상업화의 바람은 이곳 산골마을에도 계속 불어오고 있었다.
"서너 달만 잘 벌면 1년 농사짓기보다 나은 걸요"라고 말하는 기념품가게 아가씨의 말이 오늘의 농업 현실을 말해주는 것 같아 가슴이 저렸다.
덧붙이는 글 | 윤병두 기자는 필리핀에 업무차 체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