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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굴로 숨어 든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기관총을 발사한 흔적들.
ⓒ 노근리대책위원회
"미군의 폭격으로 부모형제를 모두 잃고 두 팔까지 잃은 12세 소년 '알리 이스마일 압바스'를 기억하는가. 알리 소년의 처참한 모습을 보는 순간 50여 년 전(6.25때)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겪은 비극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주체할 수 없는 아픔과 분노가 북받쳐 올랐다. 시대와 장소만 다를 뿐, 미군들이 6.25때 노근리를 비롯한 우리나라 곳곳에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출간된, <노근리 이야기 1부>(새 만화책)의 원작자 정은용(86·노근리대책위원회위원장)씨의 아들이자 노근리 진상규명의 실질적인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정구도(53·노근리대책위원회 대변인)씨의 말이다. 지난해 12월말 정구도씨를 만나, <노근리 이야기 1부>가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노근리 이야기 1부>는 노근리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씨의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바탕으로 박건웅 작가가 그린 만화책이다.

노근리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 <노근리 이야기 1부> 중 한 장면
ⓒ 새 만화책
몇 년 전 어느 날 '노근리 쌍굴'은 유명해졌다. 까맣게 몰랐던, 영영 묻혀 질 뻔했던 미군의 양민학살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이는 우리나라만이 아니었다. 2000년 AP통신의 보도를 통해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 역시 분노했다.

6.25 당시 정은용은 대학생이었고, 남매의 아버지였다. 전쟁이 터지자 정은용은 가족들과 불안한 피난길을 떠난다. 그렇게 다다른 곳은 노근리 쌍굴이 있는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부근. 미군은 피난을 안전하게 도와준다며 사람들을 모아 피난을 재촉한다. 그러나 미군은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에게 무차별기관총 발사를 하고 이어 전투기 2대까지 동원하여 폭격을 한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피난민들은 우왕좌왕하다, 살기 위해 노근리 쌍굴 등으로 숨었지만, 미군은 무려 4일 동안이나 무차별 총격을 계속했다. 이렇게 하여 처음 피난길에 올랐던 600여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25명(당시 생존자확인)뿐이었다. 이것이 1950년 7월 25일부터 7월 28일까지, 만 4일 동안 미군이 저지른 만행이다.

만화의 원작인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정은용 원작)는 아들인 정구도씨에게는 남다른 책이다. 아버지가 쓴 이 책은 아들인 그가 노근리 문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한 동기를 제공했고, 영영 묻혀 질 뻔한 노근리 양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는 구실을 했다. 그런 까닭에 정구도씨에게 이 책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91년 여름휴가 때 우연히 아버지의 원고를 보게 되었는데 원고를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원고에는 아버지 어머니의 아픔과 한, 노근리 양민학살의 비극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수도 없이 들어 온 노근리의 비극을 그때야 피부로 실감했다. 아버지는 그동안 노근리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 정부에 끝없이 탄원하는 등 진실규명을 위해 외롭게 뛰면서 틈틈이 원고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난 MBC 6.25 특집 드라마 대본공모에 응모를 권유했다. 그리고 그 후1991년부터 2년 반동안,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아버지의 원고를 다듬어 1994년에 책을 발간했다."


부모님은 늘 노근리 양민 학살에 대해 말하곤 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허공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다섯 살이었던 아들과 세살이었던 딸을 지키지 못하고 죽게 만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자책하고 아파하면서. 이미 오래전에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과 자식들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그 영향을 받아 정구도씨도 17년 동안 <노근리는 살아있다> <노근리 사건의 진상과 교훈> 등의 책들을 펴내며 사람들에게 노근리 사건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각국 언어로 출판해, 노근리 사건을 세상에 알릴 것"

▲ <노근리 이야기> 1부의 원작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와 2부 <노근리는 살아있다>. 묻혀질 뻔한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규명 관련자료를 보여주는 정구도씨.
ⓒ 김현자
- 소재도 무거운데다, 600페이지나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이야기라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가볍게 출간해 많이 읽게 만들 것인가'와 '계획대로 일반 만화들과 차별성을 둘 것인가'를 놓고 많이 고민했다. 소재 자체가 가볍게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것이어서, 지금의 특별한 만화형태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한지에 수묵화로 그려 만든 것이라, 작업이 일반 만화보다 몇 배나 힘들었다."

- 그림·편집 모두 그동안 봐왔던 만화들과 다르다.
"이 책은 처음부터 세계 여러 언어로 출간할 계획을 갖고 만들기 시작했다. 50여 년 전 전쟁 중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미군의 만행이 또 다른 모습으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의 학살이 노근리에서만 일어났겠나?

미군의 이런 만행과 오만은 몇 년 전 AP통신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그래서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고, 이런 그림을 의도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래서 한지에 수묵화 느낌으로 한국적 인물을 강조한 것이다."

▲ <노근리 이야기 1부>한국판과 2006년 12월에 출간 된 이태리어판 1부
ⓒ 김현자
- 만화를 보며 울었다. 전부 논픽션인가.
"만화 속 이야기는 모두 사실과 똑같다. 만화를 위해 특별히 의도적으로 더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만화 속에서 만나는 증언들도 죽음의 현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증언한 사실들 그대로다. 증언자들이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더 많을 것이다."

- 미군들의 얼굴을 모두 까맣게 표현했다. 어떤 의미인가.
"무생물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명령에 움직이는 비정한 미군을 표현하기 위해 까맣게 그렸다고 들었다. 또 양민학살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있는데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은폐·외면하려고만 하는 미국의 오만함을 고발한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 1부 마지막 장면에서 2부를 예고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 더 이상 노근리의 비극이나 이라크 알리 소년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지난 12월, <노근리 이야기 1부> 이탈리어판이 나왔고 1월엔 프랑스어판이 나온다. 이후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 일어판 등도 만들 계획으로 작업 중이다. 2부는 <노근리는 살아 있다>(정구도)를 모태로 작업 중인데, 노근리를 소재로 3년째 찍고 있는 영화 <작은 연못>이 개봉될 때 함께 출간할 예정이다."

- 노근리 사건 지상규명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노근리 사건은 한국 역사의 진실성과 자존심을 지켜내고 인류의 기본적 가치인 '인권보호'와 관련된 사안이다. 이례적으로 미국 대통령이 민간인들에게 사과한 일이기도 하고. 전쟁 중에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한 미군의 오만과 횡포를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한국전쟁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지만 지금도 제2의 노근리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학살 현장, 평화인권공원으로 태어난다

▲ 노근리평화공원설계도.사진에서 1번은 유해발굴이 이루어질 곳이며 2번은 노근리 쌍굴이 있는 자리다.
ⓒ김현자

"한국 전쟁 참전 미군이 저질렀던 야만적 사건인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유족들에게 그 '슬픈 노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노근리 사건이 본인의 실화소설에서 다시 만화로 그려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노근리 사건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인류 앞에 과거의 인권 침해에 대한 반성과 함께 미래의 인권과 평화를 상징하는 지표로 삼을 만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 정은용(노근리사건 희생자 유족회장)

6.25전쟁 발발 한 달 후 충북 영동 노근리 쌍굴을 중심으로 일어난 노근리 학살 현장에 '노근리 평화인권공원'이 건립된다. 노근리 대책위원회는 공원 건립을 위해 지난 2006년부터 노근리 학살 현장 주변 토지를 매입, 공사에 들어갔다.

주요 시설물로는 역사평화박물관을 비롯하여 생태연못(20번), 야외무대(22번), 만남의 광장(3번), 평화의 길(18번), 사색의 길(19번), 위렵탑(5번), 청소년수련원(24번)등. 공원에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유해를 발굴해 안치할 계획이고, 공원 내 역사평화박물관(9번)에는 노근리 사건과 관계되는 모든 자료들을 전시할 예정이다.

미국 대통령의 공식 사과문,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 나라의 보도자료, 노근리 학살 당시 인민일보 보도내용, 정은용씨의 수많은 탄원서, 노근리 특별법 등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규명에 대한 수많은 자료들과 세계인권관련자료, 노근리 관련 책들이 전시될 계획이다. 2007년 6월 개봉예정으로 촬영 중인 관련 영화 자료들도 함께 전시된다.

시설 내에 위치하는 청소년수련원에서는 국내 청소년과 해외 동포 청소년을 대상으로 올바른 역사인식과 주체성교육을 해 '생명존중', '인권', '반전' 등을 고양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노근리 평화인권공원'은 2009년 완공예정이나 2008년에 공사가 마무리 될 예정이라고 한다.

노근리 이야기 세트 - 전2권 - 그 여름날의 기억 + 끝나지 않은 전쟁

박건웅 만화, 정은용.정구도 원작, 보리(2015)


태그:#노근리, #노근리 이야기, #정구도, #정은용,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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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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