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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승원-차 한 잔의 깨달음(김영사,2006)
ⓒ 김영사
동지(冬至)는 지나고 소한(小寒)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요즘 겨울 추위가 매섭다. 이렇게 추운 겨울날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에 안성맞춤인 책이 있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이 펴낸 <차 한 잔의 깨달음>(김영사, 2006)이다. 저자 한승원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원효> <초의>등으로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중견 작가이다.

그는 지금 객지 생활 40여년을 청산하고 고향 전남 장흥에 '해산토굴'이라 이름붙인 집필실에서 아내와 함께 뒤란 언덕에 죽로차밭을 일구며 소설 창작에 매진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가 이번에 펴낸 <차 한 잔의 깨달음>엔 그동안 아내와 함께 차밭을 일구며 차를 만들고 마시면서 살아온 지난 몇 년간의 삶의 체험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이태백은 흔들리면 술은 한잔 했다지만 나는 흔들리면 차를 마신다"와 같은 경구로 <차 한 잔의 깨달음>은 시작되고 있다.

또 '작가의 말'에서 그는 "요즘의 오탁아세(五濁惡世) 속에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탐욕으로 찌들어가고 있다. 이 더러운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 앞에 '차 한 잔'이 놓여 있다. 차, 그것은 선(禪)의또 다른 얼굴이다. 이 책은 '차'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선(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에 대한 이야기이다"라고 적고 있다.

책의 서술 방식은 '해산토굴'에 찾아온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과 저자가 직접 차밭을 일구며 찻잎을 따고 덖고 저장하는 체험을 구수한 문장으로 진술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전체를 다 읽어가다 보면 마치 차에 관한 소설 한 편을 편안하게 읽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이미 우리 한국 차 문화의 중시조인 초의(初意) 스님의 일대기를 장편 <초의>로 생생하게 되살려놓은 바 있다. 그리고 책의 부록으로 초의 스님의 저작인 <다신전>(茶神傳)과<동다송>(東茶頌)이라는 우리나라 유일한 차 문화의 고전을 직역하지 않고 문학적인 표현으로 의역해서 싣고 있다. 여기에다 저자가 직접 차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바를 주석으로 덧붙인 이 부록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실로 엄청나다 할 수 있겠다.

'차(茶)'의 어원은 범어 '알가(argha)'에서 왔습니다. 알가는 부처님 앞에 바치는 물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우주의 시원(始原)입니다. '시원'은 어떤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순수입니다. '순수'는 우주 속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해 같은 참모습입니다. - 20쪽

차의 신명(茶神)은 땅 속(우주의 시원)에서 왔고 사람의 정신은 하늘 그 그윽한 신화의 시공에서 내려왔다. 사람이 차를 마신다는 것은, 땅의 신과 하늘의 신의 깊은 만남을 뜻한다. - 29쪽

차는 세 감각기관에 의해 평가받는다. 우려냈을 때의 향기, 차의 색깔, 맛. 여기서 향기는 가장 위에 놓인다. 차의 참다운 신명(茶神)은 색깔과 향기와 맛에 있다. 추사 김정희가 초의 스님을 위하여 써준 시(詩)가 있다.
靜坐處 茶半香初(정좌처 다반향초) 妙用時 水流花開(묘용시 수류화개)
고요히 앉아 선정에 들었을 때는 차의 배릿하고 고소한 첫 향기 같고, 어떤 일인가를 할 때는 순리에 따르고 우주에 장식되는 꽃으로 피려하네. - 33쪽

나는 흔들리면 차를 마신다. 차별로 말미암아 휘둘릴 때, 내가 어디에 서 있는 누구인데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가 분명해지지 않을 때 차를 마신다. 그러면 나의 존재 의미가 분명해진다. 누군가가 나를 절망하게 할 때 내가 낡아간다고 생각될 때, 슬퍼지고 우울해질 때 차를 마시며 그 슬픔과 우울에서 깨어난다. 차는 차다. - 65쪽

옥회차 한 잔 하니 겨드랑이에서 시원한 바람/몸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드높은 청경에/ 밝은 달빛을 촛불 되고 벗이 되고/흰 구름 자리 되고 병풍도 되어준다 - <동다송> 73쪽

차는 물의 정신이고 물은 차의 본체이므로 참된 물이 아니면 그 정신을 드러낼 수 없고, 참된 차가 아니면 그 물의 몸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 - <천품> 100쪽

차의 맛과 향은 우주적인 자궁(곡신)의 맛과 향, 그 자체입니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우주 시원의 힘을 회복하기입니다. 닳아진 우리 생체시계의 건전지에 재충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술에 비유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시를 쓰지 않을지라도 다 시인입니다. 우주의 여러 가지 어지러운 변환 앞에서 우리는 시인처럼 찬탄하지 않습니까. 시는 음악과 무용으로 날아가고, 음악과 무용은 우주의 시원의 밑뿌리(곡신)를 향해 날아갑니다. 차향도 우리를 그곳을 향해 날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 200쪽

차는 근엄한 자세로 마시지 않아야 그것의 향과 맛을 참으로 맛볼 수 있다. 부담 없는 편한 자세로 마시는 차의 향이나 맛과 더불어 '깨끗해진 가난한 마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차를 가장 잘 마시는 것이다. 물 흐르듯, 꽃피듯(水流花開)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최상의 착한 삶은 흐르는 물과 같다(上善若水). - 219쪽


차(茶)를 통해 우리 인생의 참 모습을 유려한 문체로 그려낸 한승원의 <차 한 잔의 깨달음>은 말 그대로 차의 교과서, 차인들이 옆에 두어야 할 잠언집이라 할만 하다. 이 책을 차분하게 정독하고 나면 누구라도 '다선일체(茶禪一切)' 혹은 '다선일미(茶禪一味)'의 그 본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영롱한 차 빛깔과 그윽한 차향을 띠고 있는 소설가 한승원 선생의 문체로 마시는 차 한 잔, 나는 벌써 깨달음(禪)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는 것 맞는가?

덧붙이는 글 | 경북매일 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송고할 계획입니다.


차 한 잔의 깨달음

한승원 지음, 김영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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