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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 생가  앞에 있는 시비.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져 있다.
영랑 생가 앞에 있는 시비.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져 있다. ⓒ 김연옥
아침 8시 마산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11시 30분께 영랑 생가(지방기념물 제89호,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를 찾았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내 마음을 아실 이>와 같은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시로 '북도의 소월, 남도의 영랑'이라는 말과 함께 사랑을 받았던 시인 김영랑.

그의 본명은 김윤식으로 1903년에 강진에서 태어났고 1930년 박용철, 정지용 등과 <시문학>을 창간하면서 화려하게 등단을 했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


영랑 생가를 둘러보는 마산제일여중 학생들. 푸른 대밭과 해묵은 동백나무들이 눈길을 끌었다.
영랑 생가를 둘러보는 마산제일여중 학생들. 푸른 대밭과 해묵은 동백나무들이 눈길을 끌었다. ⓒ 김연옥
영랑 생가에 들어서니 남도의 정취를 자아내는 해묵은 동백나무와 푸른 대밭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겨울이라 꽃은 피지 않았지만 모란이 보이고 영랑 시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장독대와 우물 등이 복원되어 있었다.

나는 정겨운 장독대에서 어느 날 장독 뚜껑을 열다 툭 떨어져 내린 감잎을 보며 문득 가을이 왔음에 화들짝 놀라는 그의 착한 누이 모습을 그려 보았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그녀가 '오매 단풍 들것네'하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 귀를 쫑긋 세우며.

영랑 생가에 복원해 놓은 정겨운 장독대. '오-매 단풍 들것네'라는 시의 소재이기도 하다.
영랑 생가에 복원해 놓은 정겨운 장독대. '오-매 단풍 들것네'라는 시의 소재이기도 하다. ⓒ 김연옥
교과서에 갇혀 있던 김영랑 시인이 이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온 느낌이라고 할까. 그곳에서 교과서를 통해 막연하게 알고 있던 시인의 숨결을 점차 느끼게 되면서 학생들의 표정도 자못 진지해져 갔다.

나는 마당에 복원해 놓은 우물 앞에서 그의 '마당 앞 맑은 새암'이란 시도 천천히 음미했다. 그러자 별이 총총한 맑은 샘을 들여다보는 그의 환한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만덕산 백련사(강진군 도암면 만덕리)로 가기 위해 영랑생가를 나섰다. 고즈넉한 그곳 풍경에 젖어 있다 갑자기 영랑 생가 주변의 어수선한 동네 분위기가 느껴져 마치 서로 섞이기 어려운, 이질적인 두 세계가 바로 맞붙어 있는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백련사 동백숲 아름다운 절정을 그려 보다

만경루(왼쪽 위)가 보이는 만덕산 백련사를 찾아가는 마산제일여중 학생들.
만경루(왼쪽 위)가 보이는 만덕산 백련사를 찾아가는 마산제일여중 학생들. ⓒ 김연옥
나는 백련사라 하면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학문과 우정을 나누었던 혜장스님이 먼저 떠오른다. 혜장스님은 대흥사 12대강사(大講師)로 기록되고 있는 큰스님이다. 그 당시 백련사 주지로 있던 혜장스님과의 인연으로 다산이 차를 즐겨 마시게 되었다 한다.

839년(신라 문성왕 1년) 무염선사가 세웠다는 백련사(白蓮寺)는 원묘스님이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일으켰던 절로 고려 후기에 8명의 국사를 배출한 유서 깊은 명찰이었다.

백련사 동백숲에서. 선홍색 동백꽃이 진초록 잎 사이로 드문드문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백련사 동백숲에서. 선홍색 동백꽃이 진초록 잎 사이로 드문드문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 김연옥
우리는 울창한 동백숲(천연기념물 제151호) 한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그 길에는 진초록 잎 사이로 선홍색 동백꽃이 드문드문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래도 벌써 통째로 떨어져 빨갛게 풀밭을 물들이고 있는 동백 꽃송이도 이따금 보였다. 나는 붉디붉은 동백꽃이 저마다 탐스런 얼굴을 내미는 아름다운 절정의 순간을 상상하니 머리가 어찔했다.

네가 있어
겨울에도
춥지 않구나

빛나는 잎새마다
쏟아 놓은
해를 닮은
웃음소리

하얀 눈 내리는 날
붉게 토해내는
너의 사랑 이야기

- 이해인의 '동백꽃에게’앞 부분


백련사 만경루와 대웅보전의 현판은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추녀마다 활주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는 대웅보전(지방유형문화재 제136호)을 지나 나는 백련사 사적비를 보러 갔다.

백련사 대웅보전 앞에서.
백련사 대웅보전 앞에서. ⓒ 김연옥
백련사 사적비(보물 제1396호).
백련사 사적비(보물 제1396호). ⓒ 김연옥
백련사 사적비(보물 제1396호)의 귀부는 고려 시대, 비신(碑身)과 이수는 조선 숙종 7년(1681년)에 만든 것으로 건립 연대가 서로 다르다. 귀부의 용두(龍頭)를 눈여겨보니 아래위 일곱 개의 이빨을 가지런히 드러낸 입 모습에다 길게 수염이 흘러 목주름까지 늘어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비신의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이 양각되어 아름다웠다.

백련사에 이르는 오솔길에서 정약용의 외로움을 보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서.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서. ⓒ 김연옥
우리는 1808년 봄부터 1818년 정약용이 유배 생활에서 풀려날 때까지 10년 남짓 살았던, 실학사상의 산실인 다산초당을 향했다. 지난해 11월에도 갔던 곳이라 마음이 한결 느긋해졌다. 우리는 일단 점심을 먹고 낮 2시 20분께 다산유물전시관을 거쳐 새 길을 따라 걸어갔다.

나는 빽빽이 대나무가 들어선 비탈길을 오르다 윤단의 묘로 갔다. 그는 해남 윤씨 집안인 다산의 외가 쪽 친척으로 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사람이다. 윤단의 무덤 앞에는 야무지게 생긴 키 작은 동자석이 마주 보고 서 있는데 한번 들러 감상해 볼 만하다.

다산초당 동암에 걸려 있는 두 개의 현판.
다산초당 동암에 걸려 있는 두 개의 현판. ⓒ 김연옥
연못 가운데 조그만 봉을 쌓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을 지나 다산이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 등 숱한 저술을 하며 거처했던 동암으로 갔다. 강진군에서 복원해 놓은 그곳에는 눈길을 끄는 현판 두 개가 걸려 있다.

즉 다산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다산동암(茶山東菴)'과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 '보정산방(寶丁山房)'이란 현판으로 한번 그 서체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다산초당을 떠나는 길에 강진만 구강포가 내려다보이는 천일각에서 800m 정도 거리인 백련사에 이르는 오솔길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 길에서 혜장스님을 만나러 다니던 정약용의 외로움을 보는 듯했다.

그날 마산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우리 학생들은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암송했다. 모두들 이번 여행이 짧지만 잊지 못할 좋은 추억거리라고 즐거워했다.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오솔길. 그 길에서 나는 정약용의 외로움을 보는 듯했다.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오솔길. 그 길에서 나는 정약용의 외로움을 보는 듯했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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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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