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의 일부를 보면 제방을 쌓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제방을 쌓는 방법은 반드시 기중기를 사용하여 큰 돌을 운반하여야 한다. 또 조수를 막는 한 대를 만들어 조수 물머리를 감쇄시켜야 한다. 대개 조수의 기세는 멀리 대해로부터 밀려와서 제방을 정면으로 치면 큰 성이라도 무너질 것인데 작은 흙덩이 정도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무릇 제방을 쌓고자 하면 먼저 제방의 허리(물이 깊은 곳)를 정하고 이 허리에 5,6보 떨어져서 조수가 들어오는 입구에 맞추어서 먼저 한 대를 구축한다.”
수원성을 설계하고 축조하는데 큰 공을 세운 다산이 간척을 위한 방법에도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적용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해남윤씨가의 간척사업은 근대에 까지도 이어지는데 고산의 12대 후손인 윤정현(尹定鉉)도 1930년대 초반에 해남군 북일면 금당리에 15만평을 간척 하여 그 일대가 지금도 이 집안의 소유로 되어있다.
진도 굴포리 간척
굴포리는 진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마한 포구마을로 바닷가와 면하고 있지만 마을 앞으로는 꽤 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의 일부가 고산이 간척했다는 농토이다. 이곳에는 고산이 간척하기 위해 쌓았다는 제방 둑 약 300여 미터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 약 200정보가량을 간척하였다.
이곳에는 수년전 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고산의 간척에 대한 은혜를 기리는 동제를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굴포, 남선, 백동, 신동 마을 주민들이 모여 고산을 신위로 제를 지내왔다. 이곳에는 고산사당과 굴포신당유적비, 윤고산사적비 등이 세워졌는데 현재 고산사당은 없어지고 비만 남아있다.
고산은 60세(1646, 인조 24)때 진도에 유배되어 있던 백강 이경여와 시를 주고받은 것으로 보아 아마 이 시기에 진도에 잠시 머물면서 간척을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하고 있다. 고산은 이곳 굴포리에 머물면서 경주설씨를 만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고산이 이곳에 원둑(제방)을 쌓으면서 생긴 일화(전설)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산은 이곳에 제방을 쌓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때마다 무너지고 쌓으면 또다시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로 인해 깊은 시름에 빠져 있었는데 어느 날 제방을 쌓고 있는 곳으로 큰 구렁이가 기어가고 있는 꿈을 꾸게 되었다.
고산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새벽녘 사립문을 열고 나가 제방을 쌓는 곳을 보니 꿈에 보았던 구렁이가 기어가던 자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었다. 고산은 이를 이상히 생각하고 구렁이가 지나간 자리에 제방을 쌓으라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여 그곳에 뱀의 지나간 형상대로 석축을 쌓도록 하였는데 그 이후부터는 둑이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곳의 지형이나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여 쌓은 결과 무너지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곳에 있는 굴포신당유적비(屈浦神堂遺蹟碑)는 1986년 음 4월 18일 신당을 재건하고 신당유적비와 장승을 세웠다. 또한 고산윤공선도 선생 사적비(孤山尹公善道 先生 史蹟碑)는 굴포, 신동, 남선, 백동 주민 일동이 1991년 4월 6일 건립한 것이다.
배중손의 사당과 남도석성
그런데 지난 이곳 굴포리 고산사당에 이 마을 출신 동양화가인 백포 곽남배의 주선으로 지역민들에 의해 배중손의 사당과 동상이 세워진다. 배중손은 진도를 무대로 대몽항쟁을 벌였던 삼별초군의 장수로 여몽연합군에 의해 삼별초군의 중심 거점인 용장산성이 무너지고 쫓기는 몸이 되는데, 이중 김통정은 금갑진을 거쳐 제주도로 가지만, 임회면 방면으로 패주를 하던 배중손 무리는 이곳 굴포와 남도포에서 완전 섬멸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 굴포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 남도석성으로 배중손은 남도석성을 거점으로 하여 항전을 하려했는지도 모른다. 평지성인 남도석성은 현재 잘 복원되어 있는데 배중손이 대몽항쟁을 위해 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배중손과 윤선도! 그 역사적 실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곳에 배중손의 사당과 동상을 건립하도록 추진하였던 곽남배 선생과 지역민들은 삼별초라는 구국적 항쟁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고산이라는 한 인물의 자취를 억누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