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문희상 전 열린우리당 의장(경기 의정부·3선)은 올해로 정당인이 된지 꼭 20년째다.
문 의원은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민당 창당 때 처음으로 정당 입당 원서를 썼다. 기록상 옥살이는 없어도 80년대 그 역시 불법 연행·수사, 고문에서 예외는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어려운 때는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 땐 국민의 성원 속에 버틸 수 있었고, 좋은 세상이 올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는 "잠이 안 온다" "분하다" "억울하다" 등의 격한 표현을 써가며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지난 10년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현장을 보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열린우리당은 '사분오열' '적전분열' '자중지란'의 상태다. 사수파, 신당파, 탈당파 등등 온갖 이유로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그는 이른바 '절충파' 혹은 '중도파'다. 정동영계, 김근태계가 아닌 사람들과 '광장파'를 만들어 당내 접촉면을 넓혀왔다.
그는 스스로를 "대통합의 접착제"라고 칭했다. "젖 먹던 힘까지 다 합쳐도 모자를 판"이라며 "우리끼리 갈등이 크다 해도 한나라당과의 차이보다는 작다"고 대동단결을 역설한다. '정동영·김근태 2선 퇴진론'에 대해서도 '노무현 배제론'에 대해서도 "대통합을 하자면서 누굴 배제하자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반대했다.
"노 대통령 정계개편 개입? 속단할 수 없다"
문 전 의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무수석을 지냈고, 노 대통령의 초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두 정권의 핵심 요직에 있었다.
그는 "지난 10년 개혁세력이 국정을 농간하고 무위의 상징처럼 매도되는 상황"이라며 "대선 패배로 이같은 역사적 퇴보를 두고 볼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해석이 엇갈리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관계에 대해서도 "서운한 감정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대통합의 방향에 있어선 일치한다"고 확신했다. 작년 11월 노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의 자택을 전격 방문하는 형식으로 이뤄진 오찬 회동에 대해 "부모 간 상견례 자리"라며 "부모의 허락을 받고 데이트가 시작되는 날"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노 대통령의 '흠'에 대해선 "대통령의 말은 논쟁의 출발점이 되어선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도 "탈권위주의를 정치생명으로 하는 '보통대통령'의 인간선언으로 봐야 한다"고 옹호했다. 한번은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라는 <잡보장경>의 글귀를 전했다가 "저더러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이 되라는 말이군요, 저는 그걸 안하려고 대통령이 된 겁니다"라는 노 대통령의 조용한 반박이 되돌아 왔었다는 뒷얘기를 전해주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정계개편 개입 의지에 대해선 "속단할 수 없다"며 "대통령의 역사의식에 따라 정계개편 개입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여운을 남겼다. 또한 노 대통령이 "할 말은 다 하겠다"며 전방위로 나선 것과 관련 "노 대통령은 탈권위주의를 정치생명으로 실천해왔지만 동시에 헌법상, 법률상 주어진 대통령의 권한과 권력은 착오 없이 100% 행사하겠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문희상 전 의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8일 국회 의원실에서 1시간 20분 동안 진행되었다.
다음은 인터뷰 일문일답.
- 최근 칼럼에서 "자중지란과 적전분열도 이 정도면 기록감"이라며 당의 처지를 통탄했다. 심정이 어떤가.
"내 정치인생 20년 중 가장 어려운 시기다. 이런 경우는 없었다. 요즘 한꺼번에 무너지는 현장을 보면서 안타깝고 분하고 억울하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지난 10년 동안 평화개혁세력의 집권이 역사 속에 함몰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못 잔다. 재집권은 다음 문제다. 소위 개혁세력이라는 이름의 망나니들이 국정을 농간하다가 무위의 상징처럼 매도되고 폄하되는 걸 눈으로 보고 있다. 대선 패배는 이런 상황을 굳히게 된다. 이럴 수는 없다. 10년이 결코 잃어버린 세월이 아니다.
평화개혁세력이 젖 먹던 힘까지 모아서 대선이라는 대회전이 이뤄지면 지더라도 역사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역사의 후퇴이고 민주주의의 좌초라는 위기의식이 있다. 개혁과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과 보수안정을 표방한 수구냉전 세력이 한번 제대로 붙어야 그 다음 단계로 도약해 성숙한 질서가 생길 수 있다. 그 다음엔 미국의 공화당·민주당 양당체제처럼 누가 집권해도 국정운영에 큰 변화가 없는 안정기를 맞을 수 있다."
"제왕 사라지니 백가쟁명... 그러나 갈 길은 화이부동"
- 밖에서 보기에 열린우리당의 상황이 어지럽다. 갈등의 핵심이 뭔가.
"나는 갈등을 갈등으로 보지 않는다. 참여정부의 특징적 현상이다. 노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을 포기하고 새로운 정치 유형을 탄생시켰다. 집권당 총재로서 가졌던 권한을 모두 포기했다. 과거엔 자기 사람을 대표로 앉혀서 대통령이 다했다. 대표는 1주일에 한번씩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갔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김대중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다 보고를 받았다. 정무수석은 대통령의 말을 당에 전달하는 창구였다. 그렇게 여당을 지배하는 것으로 야당을 지배했고 국회를 지배했다. '통법부'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그걸 싹 포기했다.
그 결과 지금처럼 백가쟁명의 시대가 됐다. 초선의원도 자기 할 소리는 다 하지 않나. 하지만 민주적 절차에 따라 대화와 타협을 하고 결정된 것을 따라야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모두 다르더라도 화합해야 한다. 그런데 작은 차이를 자꾸 끄집어낸다. 자해 행위이고 소모전이다. 아무리 열린우리당 내 갈등의 진폭이 크다 해도 한나라당과의 차이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다."
- 작년 연말 의원 워크숍을 통해 전당대회 개최 등 '원칙있는 대통합' 추진에 동의했지만 자꾸 다른 말이 나오지 않나.
"제왕적 권력이 사라진 뒤에 나오는 현상이다. 그렇다 해도 민주적 절차에 따라 결정된 것은 승복해야 하지 않나. 언론이 이런 것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줘야 한다. 그런데 누가 누구와 만나 밥을 먹었다는 걸 왜 크게 내나. 현상을 보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언론의 역할 아닌가. 그런데 개싸움만 시키고 있으니…. 요새 신문 볼 맛이 안난다. 역사와 국민은 정치인의 필수과목이다. 정치가라면 다음 세대를 걱정해야 한다. 그래야 당도 살고 자기도 산다."
- '정동영·김근태 2선 퇴진론'이 나오고 있다. 창당 주역들에 대한 책임론이고, 또 이들이 나서면 외부 세력과 함께 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당을 해산하고 대통합으로 가자고 결정을 내린 지도부다. 그 이상 가는 반성이 어딨나. 대선 후보가 되겠다는 게 아니지 않나. 2선 퇴진론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당을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을 안 한 사람이 나서야 한다는 것인가."
- 지난 휴일 지도부 회동에서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을 재확인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3가지다. 우선 대통합 선언 그 자체가 기득권의 포기다. 당 안에서 우리끼리 하자는 게 아니다. 그리고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데 '오픈 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를 채택해 똑같은 조건으로 경쟁하겠다는 것이다. 또 우리당을 리모델링하는 수준이 아니라 '제3세력'을 포함해서 신당을 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나."
- 계속 '배제론'이 나오는 이유가 뭔가. 정동영 전 의장은 최근 노 대통령에 대해 "비켜서야 대통합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모순이다. 대통합하자면서 노 대통령을 배제하자는 건 말이 안 된다. 영남개혁의 상징성이 있는 사람이다. 충청·호남이 아무리 합쳐도 영남이 빠지면 의미가 없다. 노 대통령의 지지도가 아무리 낮다지만 노 대통령 배제하면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팍 올라가나. 그게 그거다. 오히려 당이 대통령에게 국정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보이면 반성도 안하는 놈들이라고 비판받는다. 부모가 곰보라고, 아내가 반신불수라고 버린다? 아주 추하게 보일 것이다. 노 대통령은 (때가 되면) 스스로 비켜줄 사람이다. 기득권을 지키고 권력을 행사하겠다고 악착같이 매달릴 사람이 아니다. 그런 신뢰와 확신이 있다."
"말많은 대통령은 '보통 대통령'의 인간 선언"
- 문 의원은 일찌감치 "노 대통령 빼고 대선승리 못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지금도 변함이 없나.
"물론이다. 대통령이 신당에 참여하든 안하든, 그것은 노 대통령의 자유다. 우리가 가라마라 할 수 없다. 대통령이 소속된 당이 여당이다. 정권 말기 대통령의 탈당으로 여당이 없는 실험을 우리는 여러 차례 해왔는데 여야 합의와 국민적 공감대 속에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대통령의 당적 문제는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처리돼야 한다."
- 노 대통령이 최근 할 말을 다 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정계개편 과정에 개입 의지가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노 대통령은 권력 누수를 걱정하는 것 같다. 노 대통령은 탈권위주의를 정치생명으로 실천해왔지만 동시에 헌법상, 법률상 주어진 대통령의 권한과 권력은 착오 없이 100%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권력을 오버해서 법률을 위반한 적이 없지 않나. 노 대통령은 새로운 정치 역사의 전범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한번도 민주적 정치에서 대통령이 어떻게 법률을 지켜나가는지 실험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일부 언론이 대통령이 '어'라고 하면 '아'라고 쓴다. 100가지 말 중에 한 마디만 따서 쓰고, 그 말도 앞뒤를 살펴보면 다 맞는 말이다. 대통령은 틀린 말 안 한다.
다만, 나는 대통령이 말이 너무 많아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말이 논쟁의 시작이 돼선 안된다. 마지막 말이 되어야 한다. 언젠가 대통령에게 (<잡보장경>의 내용 중)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라는 글귀를 전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노 대통령은 '결국 저더러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이 되라는 말이군요, 나는 그걸 안하려고 대통령이 된 겁니다'라고 하더라. 제왕적 대통령은 말 안 해도 된다. 조용히 국정원·국세청·검찰·경찰 움직이면 된다. 야당도 꼼짝 못한다. 국민의 정부 때 야당에서 여당으로 온 의원들이 35명이다. 괜히 온 줄 아나. 이제 그런 것 없지 않나. '모든 것에 있어 내가 생각하는 바를 직접, 공개적으로 알려야겠다!' 대통령이 말하는 심경은 그런 의미다. 보통 대통령의 인간 선언이다."
-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정권 재창출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비상식적인 얘기다. 국민은 의식을 안 하는지 몰라도 대통령은 항상 역사를 의식하고 역사와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이 다음 정권에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대통령이 정계개편 과정에 개입할지 안할지 속단할 수는 없다. 다만 대통령의 역사인식에 따라 정계개편 개입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관계에 대해 해석이 극단적이다. '대통합 과정에서 등을 돌렸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계개편의 동력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어느 쪽이 맞나.
"(단호하게) 둘 다 맞다. 서로 서운한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두 분은 역사를 상대로 정치를 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항상 국민과 역사가 있다. 두 사람이 가는 역사의 방향이 내가 말하는 (대통합의) 방향에 있다고 100% 확신한다. 그 길밖에 없다. 나는 그날의 만남(작년 11월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 오찬 회동)에서 '우리 힘을 합치자' 이런 식의 말은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만남 자체가 '부모의 허락을 받고 데이트가 시작되는 날'이라는 의미를 준다. 마치 부모들의 상견례 자리인 셈이다. 의미가 깊은 만남이다."
"진보진영 후보들, 바다에서 만나자"
- 진보진영의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미래구상모임'을 결성했다 '독자후보론'도 나오는데 이들과 여권과 관계설정은 어떻게 하고 있나.
"지난 10년 정권을 출범시킨 열정이 사라졌다. 정권의 주도세력이 갖는 행태에 대한 불만, 특히 일부 언론의 전횡과 맞물려 우리를 지지한 세력이 많이 토라져 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출범시킨 세력이 모두 합쳐도 모자란 상황이다. 호남과 충청이 모두 힘을 합쳐 똘똘 뭉쳤어도 48%밖에 안됐다. 여기에 '플러스 알파'가 있어서 가능했다. 그게 우리의 희망이다.
지금 이들과 의도적인 관계설정을 시도하면 낭패 본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영글면 우리와 함께 가야 하지 않겠나. 열린우리당·민주당·국민중심당 등 제 정파가 있지만 '플러스 알파' 세력이 전체를 좌지우지 한다. 박원순·정운찬·최열 누구에게든 희망을 걸고 있다. 바다에서 만나길 바란다. 잘 되길 학수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