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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만 아니었어도 아니, 눈만 쌓여 있었어도 좋았으리. 도리를 찾은 날은 눈도 내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화려한 색으로 물든 단풍철이나 봄날도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황량하고 사진을 찍어도 제일 볼품없는 철이 바로 이맘때 아니던가.

여주군 점동면 도리를 '구석구석'의 첫 마을로 잡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아무런 연고가 없다는 점. 마을 주민들과 뻔뻔하게 어울리며 속엣말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아무래도 잘 아는 마을보다는 낯선 마을에서가 더 쉬울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특한 이름이 끌렸다. 강변의 작은 마을이라는 점도 발길을 도리로 가게 만든 하나의 계기였다. 이 황량한 계절에 그래도 도리라면 아름다운 사진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한 몫 했다.


▲ 든 곳으로 난다하여 도리라 했다
ⓒ 강수천


한그루 느티나무는 회관에 자리를 내어주고...

지난 1월3일 동료와 함께 도리를 찾았다. 새로 지은 마을회관과 경로당 앞에 마을의 상징인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있는 고즈넉한 마을이다.

도리는 큰말인 되래와 새말, 그리고 서쪽 깊숙한 곳의 사장골등 세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오랜 옛날부터 수많은 전란이 여주와 점동, 장호원 등지를 휩쓸어도 워낙 요새같은 지형의 도리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도리마을을 향해 난 도로가 단 하나 뿐이어서 반드시 마을로 들어온 길을 되돌아 나가야 했으므로 '되래' 혹은 '도리'가 되었다는 것이 주민들이 전해 준 마을이름의 유래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청미천(용인에서 발원하여 장호원을 거쳐 여주군 점동면 도리에서 남한강과 합수한다)이 빙 돌아 남한강과 만나는 곳이라 해서 되래(돌아가는 내川)라는 주장이나 도호리 주민들이 이주했다고 해서 도래(도호리에서 오다)로 불리우다 도리가 되었다는 설까지 여러 가지다.

▲ 들어오는 길도 나가는 길도 하나다
ⓒ 강수천
▲ 느티나무 세그루 중 한그루는 마을회관에 자리를 내주었다.
ⓒ 강수천
되래 서남쪽 산등성이에 위치한 새말은 1972년의 큰 물난리때 남한강이 범람할 위기에 놓이자 큰말(되래)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새로 만든 마을이다. 22가구가 이주했지만 현재는 20가구가 채 못된다고 한다.

섬강을 끌어안은 남한강이 청미천과 합수하면서 강변에 모래사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도리의 남한강 하류쪽 마을 이름은 사장골이 되었다.

마을 경로당에는 열댓명의 마을 주민들이 모여있었다. 민남식 이장(59세)과 민영환 새마을지도자(62세) 그리고 노인회장 유의영(73세)씨 등으로부터 마을의 오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며칠 뒤 사진을 찍기 위해 또다시 도리를 찾기로 하고 구수한 보리밥과 함께 마무리 자리를 가졌다.

신선들 노닐던 곳에 오줌을 갈긴 마녀

도리에는 몇가지 볼거리가 있는데, 그 중 으뜸은 누가 뭐라해도 남한강이 아닌가 싶다. 경기,강원,충청도가 만나는 삼합리쪽에서 섬강과 만나는 남한강은 강천쪽(여주군 강천면의 강변마을)의 물과 도리쪽의 물이 완전히 다른 빛이었다. 특히 청미천과 만나면서 여울을 이루는 도리 강변의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낭만을 연출한다.

▲ 청미천이 남한강으로 합수하는 합수머리
ⓒ 강수천
▲ 강 건너에는 강천면 강천리가 손에 잡힐듯
ⓒ 강수천


경기 여주군 점동면 도리는?

<도리 가는 길>
영동고속국도 여주나들목 - 좌회전(장호원방향) - 점동면 소재지 - 장안리, 부론방향 - 도리 이정표 따라 진입

<주민>
53가구 110명의 주민이 주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어부는 없느냐는 질문에 인상 좋은 어르신께서는 "여기는 어부가 따로 필요 없어. 그냥 그물 하나 던지면 아무나 물고기 실컷 잡아 먹었으니까..."라고 말씀하신다.
남한강을 내려다 보는 마을 동쪽 산등성이는 중군이봉이라 불리운다. 중군이봉의 마지막 능선안부를 거치면 가파른 절벽 위쪽의 신선바위를 만나게 된다.

신선바위는 먼 옛날부터 신선들이 내려와 노닐던 곳이라는 전설을 가진 바위인데 신선들이 강변의 아름다운 바위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다 못한 마녀가 밤에 몰래 내려와 오줌을 싸고 달아난 후로 신선들이 내려오지 않는다고 한다.

공룡의 발자국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거대한 두 개의 구멍이 바위 위에 나 있는데 그것이 마녀의 발자국이라고 주민들은 설명하고 있다. 마녀의 오줌이 흘러내린 구멍에는 언제나 물이 마르지 않고 샘솟는다고 했다. 실제로 구멍에 덮인 부엽토를 파내려가는 도중 어디선가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신선바위에서는 현재 강이 내려다보이지는 않는다. 나무들이 많이 자랐기 때문인데 약간의 정비가 필요해 보였다.

ⓒ 강수천


아홉사리 넘어 한양 가던 길

도리는 예로부터 충주이남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거쳐가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충주를 거쳐 가장 빨리, 힘들이지 않고 여주에 다다를 수 있는 길목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중군이봉 등성이의 고갯길에서부터 강변길을 거쳐 마을 서쪽의 사장골까지와 사장골에서 흔암리로 넘어가는 아홉 구비 고갯길인 '아홉사리'를 마을 주민들은 '과거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여전히 숲속으로 과거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중군이봉 등성이를 넘어 충주 가는 길
ⓒ 강수천
▲ 선비들이 쉬어가던 주막자리에 지어진 집
ⓒ 강수천
▲ 사장골 아홉사리가 시작되는 길
ⓒ 강수천
아홉사리 고개에서 매년 9월 9일 아홉 번째 고개에 피는 구절초를 꺾어 약을 달이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아홉사리 고개를 넘다 넘어지면 아홉 번을 굴러야만 살아서 넘을 수 있다고도 한다.
무엇보다 아홉사리 고개를 넘어 흔암리로 가는 길은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거나 한양에서 돌아오던 주막자리로 인해 더욱 정취가 느껴지는 곳이다. 현재는 주막이 있던 곳에 양옥집이 지어져 있다.

돛단배를 닮은 구절초의 마을

도리가 농촌체험마을로 선정된 후 사무국장을 맡게 된 최재모씨(44세)는 체험행사 중 하나로 구절초축제를 기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장골에서 시작되는 아홉사리와 9월 9일의 구절초 축제는 꽤 근사한 여주군의 명물이 될 것 같다.

도리마을은 명성황후와 같은 여흥 민씨의 집성촌이다. 여주군 가남면 안금리 일대에 살던 조상들이 강변으로 이주해와 정착한 마을이 도리라고 한다. 강변에서는 강 건너 강천리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돛단배의 모양을 한 마을에는 여전히 들고 나는 길이 하나다.

▲ 되래마을(큰말) 전경
ⓒ 강수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주의 지역신문인 주간 '세종신문' 인터넷판에 함께 연재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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