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사랑'을 이야기 소재로 삼아 지난해에만 무려 4권의 연작시집을 펴낸 시인이 있다. 1년에 한 권 내기도 힘든 시집을 연이어 써내려간 주인공은 그녀 자신도 중년인 이채 시인.
이채 시인의 제4시집 <중년에도 사랑을 꿈꾼다>는 여전히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3권의 시집 내용에 대해 "자신의 경험담이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 바 있는 그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신의 경험담처럼 중년의 사랑을 풀어놓았다.
내 나이 스물살 땐
사십의 여자는 여자도 아닌 줄 알았다
그녀는 지난해 10월, 3집 발간 인터뷰에서 "1집은 사랑의 시라고 할 수 있고, 2집이 평범한 중년의 사랑이라면 3집은 좀 더 적극적인 중년의 사랑이다"면서 "4집은 따뜻한 사랑으로 마무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시인의 말마따나 이번 시집은 "중년의 사랑에 대한 완결편"에 해당한다. 그래서일까. 이번에는 쓸쓸하기는 해도 별빛에 입을 맞추는 낭만도 함께 이야기한다.
내 나이 스물 살 땐
사십의 여자는 여자도 아닌 줄 알았다
내 나이 서른 살 땐
오십의 남자는 무슨 재미로 사는가 했다
멈춰 서서 하늘을 보니
흘러가는 구름은 그대로인데
스치는 바람만 휑하니 소슬하여
문득 도둑맞은 듯한 세월이구나
이쯤에서 창문을 열어 볼까
다시 온 가을은 아름답기만 한데
중년이란 나이, 그 쓸쓸함에 대하여
흘러가는 그름에게 이 마음 전해볼까
사십의 여자도
오십의 남자도
노을빛이 내려앉은 언덕을 바라보며
초저녁 별 잎에 입맞춤을 한단다
- '중년의 나이에도' 전문
@BRI@제4시집은 가을에서 시작해 여름을 거쳐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의 역순환에 따라 중년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연작시집의 마무리는 중년의 사랑을 갈망하기보다는 잔잔한 가을의 추억을 떠올리며 따뜻한 봄날을 기대하는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중년의 가을! / 마주하는 눈빛으로 / 아끼며, 사랑하며 함께 열매로 익어 가는 계절입니다
날마다 정이 든 사람의 손을 잡고 / 슬프지 않아도 눈물이 날 때면 / 눈물의 무게를 서로의 눈빛으로 덜어 주는 계절입니다
- '중년의 가을' 일부
흰 구름 되어 그대에게 / 매달려 볼까
봄바람 되어 그대 품에 / 머물러 볼까
아니 아니 꽃이 되어 / 그대 가슴에 피어 볼까
단 하나 지지 않는 별꽃 / 그저 그리움이어도
- '그대 사랑이고 싶네' 일부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까닭, 그리움과 기다림이 있기에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가슴 저리고 이별이 아파서 눈물겹다는 식의 사랑이야기를 함부로 털어놓지는 않는다. 좀 더 성숙하고 순화된, 마음의 일렁임을 살짝 드러내는 정도에서 머문다. 지난 시집에서 숨 가쁘게 중년의 사랑을 허락해 달라고 보채던 것과는 많이 달라진 흐름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시인의 마음도 함께 차분해진 것일까.
누구든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 사랑할 때도 / 이별할 때도 / 외로움은 시도 때도 없이 / 가슴을 말리는 바람으로 찾아든다
그러나 서로의 가슴으로 달랠 수 있는 / 그리움과 기다림이 있기에 /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까닭이다
- '누구든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일부
깊어지기 위해 / 더 외로워져야 하는 것
눈빛으로 서성거리는 그대 /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었고 / 희미한 그림자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비 개인 날의 무지개처럼 / 다가가도 닿을 수 없고 / 가까이 가도 만질 수 없지만
어쩐지 사랑으로 / 그대는 그렇게 서 있었다
- '그대는 그렇게 서 있었다' 일부
문용린 전 교육부장관은 이번 시집의 축사에서 "그리움에 대한 성찰이 포도송이처럼 탐스럽다"고 적고 있다. 이어 문 장관은 "이채 시인의 시가 어둡고 무겁지 않은 까닭은 '그리움'이라는 주제의 가벼움 때문은 아니다"며 "시인 이채에게 있어서 그리움은 애증과 회한이 정제되어 희망과 기대로 승화된 심리적 안정감이다"고 전했다.
축사 그대로 시인이 전하는 시에는 그리움이 잔뜩 묻어난다. 더욱이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을 동반한 그리움은 가을과 한여름, 봄을 가리지 않고 어김없이 드러난다.
적막 속으로 찾아드는 / 가슴 아픈 사람의 숨결은 / 늘 그리운 타인이어라
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창가에서 / 머물지 못하고 떠나는 / 하얗게 부서지는 얼굴이여!
(중략)
그대, 날 모르십니까 / 벌써 까맣게 잊었습니까 / 늘 그리운 타인이여!
- '늘 그리운 타인' 중 일부
8월의 바다 / 그 바다에서 /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만나고 / 그리고 헤어졌을까
(중략)
그래서 / 그 섬은 / 늘 그리운가 보다
- '8월의 바다' 일부
시인이 말하는 중년의 사랑은 로맨스?
그녀의 그리움은 중년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그리움은 '내(시인) 마음의 계절'이라는 '제5계절'로 마무리된다. 제5계절은 그녀가 꿈꾸는, 마음의 평화가 있는 계절을 말하는 것이리라. 마음 놓고 사랑하고 마음 편히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계절 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낙원
제5계절을 만들어 보세요
나만이 만끽하는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나만의 계절을 만든다는 것은
삶의 여유로운 텃밭을 가꾸어
영혼의 우정을 심는다는 것이겠지요
(중략)
추울 땐 따뜻한 햇살 같은
더울 땐 시원한 바다 같은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낙원의 계절을
제5계절은
내 마음의 계절입니다
- '제5계절' 일부
우연한 기회에 지난 1년간 이채 시인이 펴낸 4권의 시집을 만나게 되었다. 중년의 사랑이라는 화두는 사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나에게는 무척이나 먼 이야기다. 하지만 오늘도 싫든 좋든 중년의 사랑은 거리 곳곳에, 드라마 속 주된 주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때론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것이 중년의 나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중년에 찾아오는 사랑을 제대로 승화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삶의 활력이 생길 수도 있을 것. 자신의 경험담은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 치지만, 시집을 보면 볼수록 시인의 경험담이라는 생각이 굳어지는 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이 하면 불륜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중년에도 사랑을 꿈꾼다> 이채 / 도서출판 천우 / 143쪽 / 값 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