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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 입구 오른편에 서 있는 선비상
ⓒ 이승철

조선시대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 오가던 문경새재길, 그 입구 오른편에는 예스런 모습의 선비상이 소나무 숲속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그 선비상 앞에는 둥그렇게 만들어 놓은 돌 구조물이 쉼터처럼 만들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이 구조물은 단순한 쉼터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둥그런 형태로 배치된 이 구조물들은 안쪽에는 옛 선비들의 이런저런 삶의 모습을 섬세하게 새긴 동판들이 부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혹시나 하여 그림들이 붙어 있는 구조물의 뒷면으로 돌아가 보면 그림에 어울리는 시 한 수가 검은 대리석 판에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지배계급이었으며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던 선비. 그들의 신분은 소위 양반계급으로서 문반과 무반 중의 문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에는 비록 여섯 쪽의 그림과 여섯 편의 시가 새겨져 있을 뿐이지만 이들 그림과 시에서 조선의 선비정신과 정체성을 찾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 다산 정약용의 시 탐진촌요와 상징그림
ⓒ 이승철

첫 번째 그림을 살펴보자. 논에서 소를 몰며 쟁기질하는 농부의 그림을 배경으로 한손에는 책을 들고, 또 다른 손에는 보리를 집어 든 선비가 역시 괭이와 보리를 손에 든 농부들과 마주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목가적인 풍경의 그림이다.

그림의 뒷면에는 다산 정약용의 탐진촌요(耽津村謠)라는 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무논에 바람불면 보리물결 장관이고
보리타작 할 무렵 그 자리엔 모를 심네.
배추는 눈 속에서 그 잎이 파랗고
병아리는 섣달에 솜털이 노랗다네.


탐진은 지금의 전남 강진의 옛 이름으로 다산이 그곳에서 귀양살이를 했었다. 이 시 .탐진촌요.는 본래 .탐진농가. .탐진어가.와 더불어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탐진촌요는 모두 15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한 수를 여기에 새겨놓은 것이다. 다산은 귀양살이를 하며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당시의 농촌 생활과 계절의 변화에 따른 풍경을 정겨운 필치로 눈에 잡힐 듯이 묘사한 것이다.

▲ 퇴계 이황의 시 도산월야영매와 상징 그림
ⓒ 이승철

다음 그림은 경치 좋은 산골 절벽위에 날아갈 듯한 정자 한 채가 서 있고, 그 아래 강물에는 작은 돛단배 한척이 여유롭게 떠 있다. 그 물가 정자 안에는 세 명의 선비들이 글을 쓰고 부채질을 하는 모습이 여유롭기 짝이 없다. 개다리소반 위에 놓여 있는 목이 긴 술병과 술잔에서도 풍류가 묻어나는 그림이다.

뒷면의 시를 읽어보자. 시는 퇴계 이황의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다

뜨락을 거닐자니 달이 사람 따라오네.
매화꽃 언저리를 몇 차례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깃에 향내 머물고 꽃 그림자 몸에 가득하다.


삶의 여유와 풍류가 시의 전편에 가득히 번져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퇴계가 도산으로 낙향하여 후학들을 가르치며 유유자적 하던 시절에 쓴 시인가보다. 당시 여유가 있었던 선비들의 세계를 살짝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 면암 최익형의 시, 일옥중묵회와 상징 그림
ⓒ 이승철

다음 그림은 충의(忠義)라는 깃발을 휘날리며 손에 칼을 움켜잡은 선비와 함께 낫과 죽창, 괭이를 무기로 치켜든 농민들의 모습이다. 그 선비와 농민들 앞으로 총과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왜군들의 그림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백발 휘날리며 밭이랑에서 뛰쳐나옴은
초야 백성의 충성심을 바치고자
나라 어지럽히는 외적은 모두가 나서 토벌해야지
예와 이제 다르랴, 물어 무엇 하리.


면암 최익현의 시 일옥중묵회(日獄中黙會)다. 조선조 말, 강직하고 의기 넘치는 대쪽 같은 선비의 대명사격이었던 면암선생, 선생이 을사조약 체결 후 항일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옥살이를 할 때 쓴 시다. 면암선생은 결국 옥중 단식으로 순국했다.

▲ 화담 서경덕의 시, 독서와 상징 그림
ⓒ 이승철

이번에 만난 그림은 작은 골방에 등잔불을 밝히고 앉아 책을 읽는 선비의 모습이다. 갓을 벗은 망건상투의 모습이며 얼굴 표정이 단아하기 짝이 없다. 뒷면의 시는 화담 서경덕의 시, 독서(讀書)다.

오늘에 독서함은 세상경륜 큰 뜻을 품음이라
한해가 저물도록 가난을 달게 여겼네.
부귀를 다투는 일에야 내 어찌 끼어들랴
샘 흐르는 숲속에 이 한 몸 맡기려네.


조선 중기의 학자이고 선비이며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렸던 서경덕.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어렵게 공부하였으나 벼슬길에도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청빈하게 학문에만 정진했던 화담의 삶과 사상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

▲ 이지봉 이수광의 시, 도중과 상징그림
ⓒ 이승철

그림을 살펴보노라니 어느새 거의 한 바퀴를 돌아간다. 이번 그림은 왠지 낯선 느낌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이 지역. 문경세재 골짜기의 풍경이다 저 멀리 첩첩 산중 골짜기에 성문이 바라보이고 그 앞 초가지붕을 덮은 돌담 안에는 평상 위에서 술상을 마주 하고 앉은 사람들, 바로 주막거리다. 그 주막거리에 선비하나가 들어선다.

산길 접어드니 경치는 시 속의 그림이요
냇물소리는 악보에 없는 거문고 가락이라
길은 멀어 가도 가도 끝이 없는데
해는 멀리 서산마루에 걸리었네.


지봉 이수광의 시, 도중(途中)이다. 이 시는 바로 문경새재를 넘는 길손의 마음과 풍경을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수광은 조선시대 중기의 명신이며 임진왜란 때 함경도지방에서 큰 공을 세웠다. 주청사로 중국 연경을 내왕하며 .천주실의.등을 들여와 한국 최초로 서학을 도입한 선비다. 지봉유설로 서양과 천주교 지식을 소개한 이수광이 먼 길을 오가는 여행길에서 지은 시다.

▲ 이율곡 이이의 시, 석갈과 상징 그림
ⓒ 이승철

마지막 그림은 관복을 갖춰 입은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모여 앉아 정사를 논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으로 보는 그들의 자세며 표정들이 하나같이 진지한 모습이다.

소중한 인재들 조정에 다 모였거니
그 누가 초야에서 늙으랴드랴
보잘 것 없는 이 신하 곤궁한 백성으로
낡은 책들을 골돌히 뒤적여 왔네.


율곡 이이의 시 석갈(釋褐)이다. 석갈(釋褐)이란 말은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일. 즉 천민이 입는 갈의를 벗는다는 뜻에서 유래한다. 화담 서경덕의 시와는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다. 어쩌면 이 시야말로 당시 대부분 선비들이 지향했던 실제 모습이었을 것이다.

선비정신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멀리 고구려의 조의선인으로부터 시작한다. 조의선인은 문무를 겸비한 사람들로서 조선시대의 선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은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해결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인 능력을 갖도록 조련되었다.

▲ 조령 제1관문인 주흘관과 성벽에서 나부끼는 깃발들
ⓒ 이승철

고구려 역사에 나오는 을파소나 명림답부, 을지문덕 등이 모두 조의선인들이었다. 조선시대의 선비도 바로 이들로부터 계승된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나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로 변질 된 것이다.

문경새재 입구에 서 있는 선비상과 그 앞에 설치되어 있는 구조물들이 새삼스럽게 정겹다. 그림과 시를 살펴보며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 맥맥히 이어져온 민족의 정체성과 사상의 뿌리를 더듬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에 의하여 왜곡된 식민사관은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이 당쟁이나 일삼는 형편없는 썩은 정신으로 폄하되는 치욕을 당했다. 그 식민사관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고, 고귀한 선비정신이 오늘에 계승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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