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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집은 방목장 같다. 거실에는 늘 이불과 베개가 깔려 있고 책이랑 신문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간식 부스러기들도 떨어져 있고 컴퓨터는 24시간 켜져 있다. 하루 온종일 내 차지였던 컴퓨터는 지금은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여서 내 차지가 되려면 순서를 기다려야만 한다. 벌써 두 달째 집이 이 모양이다.

우리 집을 이렇게 방목장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딸아이다. 딸은 수능 시험을 친 다음날부터 백수 아닌 백수 생활을 하고 있다.

@BRI@딸과 함께 하루 종일 있다 보니 어떤 때는 눈에 거슬리기도 한다. 딸은 텔레비전 인기 드라마들을 찾아 가면서 보고 혹시 놓친 드라마가 있으면 인터넷을 이용해서 다시보기를 한다. 밤늦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도 하고 하루 종일 빈둥대기만 한다. 이런 딸을 보면서도 눈감아주는 거는 딸이 대학 합격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 결정된 게 없으니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딸은 지금 소속이 없다. 학생은 아닌데 또 학생이기도 하다. 딸은 재수생이었고 지금은 대학 합격 소식을 기다리는 입장이다. 그러니 뭘 하고 싶어도 결정 난 게 없으므로 시작하기도 뭐하다. 그래서 기다리며 봐줘야 된다.

방목장 같은 우리 집, 그러나 기다려 줘야 된다

어제 오후에 잠깐 어디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더니 딸애가 그러는 거였다.

"어머니, 저 합격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리 말하는 거였다. 딸애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리를 듣자 나는 고마웠다. 그래서 딸애를 꼭 끌어안았다.

"딸, 고맙다. 엄마를 편하게 해 줘서 정말 고맙다."

그러자 딸애도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딸애는 자기가 가고 싶어 했던 학과에 합격을 했다. D대 약대에 합격을 한 것이다. 사실 딸애 점수는 꽤 좋은 편이었다. D대 약대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딸이랑 남편이 그랬다. 하지만 나는 합격 통지서가 오기 전까지는 마음 놓고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나가다가 한 번씩 딸에게 물었다.

"진짜로 합격할 수 있는 거야?"

그때마다 딸의 대답은 "아유 어머니 걱정 마세요. 합격하고도 남을 점수니까 걱정 마세요" 그랬다.

딸이 합격하고 나니 한 짐 가득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어놓는 기분이었다. 혹시라도 부정 탈까봐 아무 소리 안하고 기다렸던 지난 두 달 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붙은 다음에 점수 자랑 해야지 붙기도 전에 미리 입방정을 떨면 안 될 거 같아서 우리 부부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우리 딸은 지난해에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 한 해 재수를 했다. 믿었던 딸이 수능 시험을 잘 못 봐서 재수를 하게 되자 나는 억울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해 더 공부하느라 고생할 딸 생각을 하니까 누구에겐지 모를 원망과 억울함이 막 차올랐다. 그래서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딸애를 많이 힘들게 했다. 엄마가 마음 정리를 하고 자식을 다독여줘야 하는데 나는 정반대로 했다. 딸한테 막 퍼붓기도 했고 마음 아픈 소리도 많이 했다. 딸은 엄마 때문에 마음이 더 아팠고 눈물을 많이 흘렸다.

부정 탈까봐 입도 뻥긋 안했던 지난 두 달

우리가 사는 곳은 시골이다 보니 대학을 갈 때 농어촌 특혜를 받는다. S대학교의 경우 지역균형으로 정원 외 학생을 뽑는데 각 고등학교마다 한 학교당 3명씩 기회를 준다. 지역균형으로 S대에 1차 합격한 학생들은 수능 최저등급이 2등급 이상 과목이 두 개만 되어도 S대학교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작년에 딸애는 2등급이 두 개 안 나왔다. 특히 수리영역에 4등급을 받아서 갈만한 대학이 없었다.

농어촌 고등학교의 경우 아무리 공부 잘 하는 학생이라 해도 2등급이 두 개 이상 나오기가 힘들다. 특히 이과의 경우는 더 힘들다.

딸애는 작년에 S대 사대에 일차 합격을 했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S대의 경우 2등급 2개만 받으면 합격인데도 못 간 것이다. S대를 당연히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수시에서 다른 학교에는 원서도 안 냈는데 결과가 그리 나온 것이다. 정말 갈 곳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대학은 점수가 낮아 갈 수 없었고 점수에 맞는 대학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재수를 하기로 한 것이다.

딸은 혼자서 학원을 찾아다니면서 이리저리 재어 보더니 자기에게 제일 잘 맞을 학원을 선택했다. 그 학원은 성적이 어느 정도 되어야지 들어갈 수 있는 학원이었다. 딸은 학원에 붙기 위해서 다시 공부를 했다. 대학에 붙은 친구들은 룰루랄라 놀러 다니는데 다시 수학정석을 공부하는 딸을 보자니 내 속에서 열불이 났다.

딸은 학원 시험에 합격을 했고 그래서 작년 2월 중순에 서울로 올라갔다.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재수시켜준다는 것을 딸애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배수진을 치는 심정으로 공부하러 갔다. 그리고 오로지 학원과 학사만 오고가는 생활을 9개월 동안 했다. 집에도 한 번 내려오지 않았다. 독한 애였다.

배수진을 치고 독하게 공부한 딸

딸애는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 둘이 눕기에도 불편할 정도로 아주 작은 방이었는데도 만족해 했고 창문 밖에 있는 가로수까지도 좋아했다. 학원의 선생님들을 신뢰했고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준 부모님에게 항상 고마워했다.

그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서 그런지 딸애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한 번씩 딸을 보러 가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겼다. 그리고 한 번도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딸애의 성적은 차츰차츰 올라가기 시작했다. 딸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었고 하면 된다는 믿음을 얻었다.

수시를 쓰는 철이 되자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수시는 합격하면 무조건 가야 하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작년보다는 성적이 잘 나오리란 믿음은 있었지만 어느 정도 나올지는 몰랐다. 그래서 계속 고민을 했다. 큰 돈 들여서 재수를 시키는데 딸애가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과에 보내고 싶었다.

딸애는 전부터 법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남들은 무섭다며 보지 않는 범죄학이나 해부학 책도 아주 흥미있게 보던 딸이었다. 딸애의 성향을 보면 한의사가 맞을 거 같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방대 의대와 한의대를 목표로 잡았다. 그리고 몇 군데 원서를 냈지만 면접과 논술에서 다 떨어지고 말았다. 합격자 발표일이 되어서 컴퓨터에 접속해 보면 매번 불합격이라고 나왔다. 단 한번이라도 합격이란 단어를 보고 싶었다.

이러다가 작년처럼 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정시보다는 수시로 들어가는 게 더 쉬울 것 같은데 우리가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아서 실패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수능을 잘 못 본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딸은 자신을 믿으라고 했다. 틀림없이 수능을 잘 볼 테니까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수능 시험을 치러 딸애가 집에 내려왔는데 마침 시험 치기 하루 전날에 우리 집 삽살개가 새끼를 낳았다. 우리는 임신한 줄도 몰랐는데 저 혼자서 새끼를 낳아 놓은 거였다. 새끼는 모두 일곱 마리였다. 우리는 드러내놓고 말은 안 했지만 좋은 징조로 보았다.

딸의 수능 성적은 잘 나왔다. 수리 영역과 외국어 영역에서 1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언어 영역과 과학 탐구 영역은 2등급이었다. 수리 영역을 잘 봤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백배했다. 문과와 달리 이과는 수리영역을 잘 보는 게 언어영역을 잘 보는 거보다 더 낫기 때문에 이제는 근심 걱정을 다 놓아 버려도 될 거 같았다.

수능 잘 봤지만 좋아 하기엔 아직 일러

하지만 아직 근심을 놓아 버리기엔 아직 일렀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대학의 학과들은 그 점수로도 아슬아슬했다. 그래서 정시 원서 쓸 때까지 계속 고민을 하고 연구를 했다. 재수생만 아니라면 상향지원을 할 수도 있는데 재수를 했기 때문에 올해는 무조건 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고심 끝에 정시 원서를 냈다. '가', '나', '다'군에서 세 개 대학을 지원했지만 모두 다 안정지원이었다. 그래도 못 미더워하는 나에게 딸이랑 남편은 D대 약대는 무조건 붙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다. 하지만 나는 합격통지서를 받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수능만 치면 끝일 줄 알았는데 수능 치고 나니 더 걱정이 많았다.

마침내 길고 긴 터널에서 빠져 나왔다. 딸이 D대 약대에 합격을 한 것이다. 이제는 마음 푹 놓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도 된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도전할 딸을 위해서 마음껏 응원해도 된다.

딸아, 고맙다. 작년 한 해는 네 인생에 거름이 될 거야. 재수를 하지 않고 그대로 대학에 갔다면 얻지 못했을 많은 것들을 너는 얻었다고 했지. 많이 보고 많이 배운 네가 자랑스럽다. 작년에 얻었던 너에 대한 자신감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네가 되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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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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