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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천지 사진을 배경으로 한반도 단일기를 들고 서 있는 정관호 선생.

여기 조국에 대한 사랑과 이름없는 주검들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한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이제는 83세의 노인이 되어버린 정관호 선생. 정 선생은 한때 하룻밤에 100리를 뛰어 다니던 전설적인 빨치산이었습니다. 선생은 이북 출신으로 1950년 말 전남 강진에서 입산해, 1954년 봄 전남 광양 백운산에서 체포돼 1961년까지 옥살이를 했고, 거의 평생을 감시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선생이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답니다. 그것은 빨치산들의 '입산에서 죽음'까지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일. 그래서 칠순이 넘은 나이에, 그나마 '세상이 좋아졌다'는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만 7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빨치산 소설 <산사람들> 6권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출간하겠다고 나서는 출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BRI@<산사람들>은 지금까지 빨치산을 주제로 한 책과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소설 <태백산맥>(10권)은 작가 조정래가 빨치산 생존자의 이야기를 듣고 쓴 상상 속의 산물입니다. 또 소설 <녹슬은 해방구>(9권)도 작가 권운상이 감옥 안에서 빨치산 생존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역시 상상 속의 산물입니다. 물론 두 소설 다 많은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남한 체제에 깊숙이 투항한 종군기자 출신의 이태가 쓴 수기에 가까운 <남부군>(2권)과도 많이 다릅니다. <산사람들>은 '진짜' 빨치산이 스스로의 경험에 근거해 '직접' 쓴 글로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사실에 기초한 글입니다. 다만, 다른 지역의 빨치산 이야기는 선생이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에 '상상적 진실'을 보탰다고 합니다.

이 소설을 보면 비운의 한반도 현대사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존재였다는 빨치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과 50~60여 년 전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빨치산이 되었는지, 왜 그들이 빨치산이 되었고 어떻게 처절하게 죽어갔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한반도의 분단과 고통을 이해하는 한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남북 간에 진정한 화해와 공존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언제쯤이 되어야, 좀 더 자유롭게 빨치산을 이야기할 수 있고, 빨치산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분단과 대결, 국가보안법과 반인권적 공안기구가 엄존하는 한반도에서 이 글을 쓰면서 막연한 걱정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반도의 고단했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또 한 인간의 엄숙하고 진실했던 생에 대해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북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교수였던 정 선생은 한국전쟁 초기 급하게 이남으로 온 후에 지금까지 이북에 두고 온 부모님과 8형제의 소식을 모릅니다. 선생이 이북에 계신 8형제와 하루 빨리 만나게 될 수 있도록 모든 이산가족의 조속한 상봉을 기대합니다.

여기 정관호 선생과의 대화를 여러분께 전합니다.

▲ 정관호 선생.

일제강점기 독서회 사건으로 투옥... 해방후 원산대학에서 교편잡아

- 일제 때 태어나시고, 항일운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1925년 함경 북청에서 태어났어요. '북청 물장수'의 그 '북청'이에요. 자라서 북청농업학교에 들어가 독서회 활동하면서 항일에 눈떴더니 1942년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놈들에게 검거됐지요. 일명 독서회 사건이에요. 그래서 함흥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18세였는데, 전기고문, 물고문 같은 것을 혹독하게 당했어요. 44년 초에 출소했는데, 일제의 감시를 받았고 그 감시 속에서 45년 해방을 맞이했어요."

- 해방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당시에는 러시아 문학 서적을 굉장히 많이 접했습니다. 그런 책들을 원전으로 읽다보니 러시아어를 공부하게 됐고, 평양 노어대학(후일 평양 외국어대)을 들어가서 49년에 졸업을 했어요. 우리가 졸업할 때 김일성 주석에게 인사하러 갔는데, 못 만나고 당시 백남운 교육상(일제 때 저명한 경제학자로 월북 인사)을 만났던 기억이 나요. 평양 노어대학을 졸업한 후에 원산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49년에 원산 교원대학에 러시아말과 문학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됐어요. 그러다 전쟁이 터졌죠."

- 당시 학생, 지식인들은 러시아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저희들이 학생 시절에는 톨스토이, 고리키, 투르게네프 등을 많이 봤어요. 그리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아, 인민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가 되기도 했고요. 아마 이북 지역은 러시아 접경이라서 더 많이 봤을 것이에요.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의 영향도 참 많이 받았고요. 한국 문학에서도 상록수(심훈), 흙(이광수), 고향(이기형) 등의 농민계몽형 소설과 한설야, 조영출, 최서해 같은 작가들도 그 흐름에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 교수라는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다가 전쟁에 참여한 계기는?
"50년 전쟁이 터졌을 때,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어요. 당시 각 대학의 교수들이 평양 순안 인민학교 강당에서 모여 여름방학 세미나를 했거든요. 그런데, 상층에서 '방학 동안에 남반부에 가서 할 일 있다'는 말씀이 전달됐습니다.

그래서 집에도 가지 못하고, 200여명의 교수들이 짐을 챙겨서 기차를 타고 남반부에 왔습니다. 그 때 전쟁난 것을 알게 됐죠. 당시 국가동원령이 발표되기도 했고요. 황해도 신막 즈음에서 새벽에 미군 비행기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기차를 더 이상 이용할 수 없어서 우린 트렁크 들고 걸어서 해주, 개성, 서울로 갔어요. 당시 교육성 출장소가 혜화동 구 서울대학교 자리에 있었어요. 거기서 전남 강진에서 교육 사업을 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죠. 그렇게 전남 강진과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 거기서는 어떤 일을 하신 거죠?
"강진으로 갈 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공습 때문에 낮에는 걷지 못하고, 밤에 이동을 해서 광주도당을 거쳐서 강진으로 갔지요. 거기서 한 달 동안 초중등 교사들을 모아서 교육을 했어요. 제 전공인 러시아어와 문학을 교육하기도 했고요, 전쟁의 성격에 대한 교양교육도 했습니다. 4~5기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데, 상황이 반전됐어요. 50년 9월27일이 추석이었는데, 9월 28일 인민군이 밀려서 서울 이북으로 몰리기 시작한 사태가 있었지요.

9월 29일 새벽, 김일성 대학 학생으로 강진에 와있던 사람이 막 깨우더라고요. 당장 춘천으로 집결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겁니다. 종강식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시학관(지금으로 말하면, 교육위원 사무실)에 갔더니 시학(교육위원)이 남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더라고요. 군은 모두 철수했으니 저희들도 빨리 가라고 하면서, 자전거 2대를 주데요. 그래서 자전거 2대를 가지고 당시 동료였던, 교육시설 생활학과장이었던 박 모 과장과 함께 춘천을 향해 출발했어요.

그런데 자전거가 금방 고장 나고….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는 걷다가 그만 영산포 즈음에서 박 모 과장과 헤어졌습니다. 박 모 과장은 그 후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행방불명이 돼 버렸죠. 혼자남아 밤에 이동하는데, 공포와 외로움, 두려움 같은 것이 엄습하기도 했었죠."

한국전쟁 발발 후 교육 사업 위해 전남 강진으로

- 그럼, 그때 빨치산이 된 건가요?
"두려움 속에서 밤에 이동하다가 인민군 낙오병 불빛을 만났어요. 그런데 자고나니 그들이 다 가버렸어요. 군인들로서는 비군인 종사자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에요. 그때 엄청난 고뇌와 갈등을 했습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동안의 제 지식과 교양을 다 동원해 판단을 한 것입니다. 비합법 지시 루트인 이른바 '선'이 떨어진 나로서는 춘천으로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길이라고 판단했고, 그렇다면 '여기서 남아서 투쟁하고 할 일을 찾는 것이 더 낫겠다'고 결정한 것이죠.

그래서 가는 길을 멈추고 바로 뒤로 돌아서서 '선'을 찾아 나섰습니다. 강진으로 다시 돌아가서 장흥군에 있던 유치산으로 입산했습니다. 거기에 장흥군당, 강진군당이 들어와 있었거든요. 그렇게 강진군당으로 합류하면서, 빨치산이 됐습니다. 이때가 50년 말입니다."

- 당시 그쪽 빨치산 상황은 어떠했나요?
"당시 전남도당(위원장 : 박영발)이 전남지역의 최고 지휘부였는데, 도당은 후퇴하지 않고 남아서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전남도당이 광주, 목포 2개 시에, 21개 군을 관할하고 있었죠. 전남도당은 전쟁시기인 만큼 별도의 무장조직으로 유격대를 조직해서 유격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저도 강진에서, 월출산에서 강진유격대와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전남도당에서 호출을 받았습니다."

- 전남도당에 호출돼 다른 역할을 하셨나요?
"제가 교수 출신이고, 러시아 문학을 공부한 것을 알고 전남도당 선전부에서 호출을 한 겁니다. 그때부터 전남도당 선전부 소속으로 전남 노동신문 편집일, 즉 전남 노동신문 주필을 맡았습니다. 당시 남반부 노동신문 중에는 제일 장수했고, 최다 발행을 했어요. 신문은 조선중앙통신을 무선으로 수신한 내용과 각 유격부대 통신원들의 소식을 기반으로 제작했어요. 한지 타블로이드판이었고 1천부를 찍었죠. 그래서 전남도당 소속 부대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배포했죠. 레닌이 말한 것처럼 저희 신문은 '집단적 선전자, 집단적 조직자'였죠. 당시 노동신문 영인본을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당시 신문을 찍었던 등사판은 백운산(전남 광양에 위치) 어디엔가 묻혀 있을 겁니다."

- 상황이 점점 나빠졌을 텐데, 어떻게 버티셨는지요?
"그랬죠. 전남 노동신문도 처음엔 1천부를 찍었고, 나중엔 5백부로 줄었어요. 그리고 처음엔 주필 일만 했지만, 나중엔 전투에 참여했지요. 당시에는 믿기지 않겠지만, 하루 밤에 100리를 뛰어 다녔어요. 정말 다들 대단했죠. 그렇지만 51년, 52년, 53년 갈수록 상황이 약화됐어요. 수없이 많은 빨치산들이 죽어갔죠. 그 과정에서 두 번의 큰 토벌작전이 벌어졌습니다. 한번은 51년 겨울에서 52년 봄까지 1차 대침공이었는데, 10만 병력이 투입됐어요. 수도사단, 8사단을 중심으로 대침공을 감행해 그때 영호남 일대 빨치산들이 거의 전멸했어요. 엄청난 타격을 입었죠.

그리고 53년 겨울에서 54년 봄까지 2차 대침공이 있었어요. 그때는 5사단을 동원했는데, 그나마 남은 세력이 거의 모두 전멸했지요. 박영발 전남도당 위원장이 54년 2월 21일 전사했고요, 전남도당 김선우 유격대장이 54년 4월 5일 전사했어요. 그렇게 저도 쫓기다가, 결국 54년 4월 8일 백운산에서 검거되고 말았어요. 땅속에 숨어 지내면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가 총상을 입고 굴에 피신했다가 검거됐습니다. 그때는 거의 모든 동지들이 죽거나 검거된 후였죠."

▲ 봉천동 나눔의 집에서 식사, 왼쪽부터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임미영 간사,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회장, 정관호 선생.

전남 도당에서 전남 노동신문 주필 활동... 54년 4월 검거

- 54년 수감돼 언제 출소하셨는지요?
"61년도에 출소했어요. 제가 출소하니까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살벌한 국면이 연출됐습니다. 또 72년경 사회안전법인가를 만들어서 보안관찰을 했어요. 제가 이북 지식인 출신에다가 빨치산이었으니까 감시가 살벌했죠. 집안에 들어와서 뒤지는 일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특별한 활동을 할 수 없었어요. 겨우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아왔지요.

저는 전주, 대전, 마산, 마포, 대구 교도소를 돌아다녔는데 대구에서 만난 한 잡범 친구의 도움으로 처음에는 전북 익산에 정착했다가 나중에 서울에 와서 도로포장 일, 목장에서 목부일, 출판사 일 등을 하며 살아왔어요. 87년 6월 항쟁 이후에 그나마 감시가 좀 덜해졌던 것 같아요.

지금 함께 사는 아내는 68년도에 만나 결혼했죠. 그런데, 현재 치매로 고생하고 있어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당시에는 당국에서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시비를 많이 걸기도 했죠. 그렇게 세월이 흘렀어요. 예전 빨치산 동지들을 보고 싶어도 볼 수도 없었죠.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아는 체도 못하고 살았으니까요. 그러다 93년 이인모 선생님이 북으로 송환될 때 다시 예전 분들과 연락이 돼 지금은 소식이라도 주고받으며 살아서 다행이에요."

- 선생님의 삶에서 빨치산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 4년이 제 전반생의 집약체이면서, 후반생을 지배하게 됩니다. 한시도 그 시절의 일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54년 검거될 때부터 나는 꼭 살아남아서 이 빨치산의 숭고했던 삶과 투쟁, 죽음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빨치산 전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사람이 없기도 했고, 또 남긴다 해도 빨치산 전체 상황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에만 의존하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저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빨치산의 생성, 투쟁, 전멸 전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죠. 이게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얼마나 기록했습니까?
"감시가 심해서 아무 것도 못하다가, 그나마 김영삼 정부 말부터는 조금씩 쓸 수 있었어요. 그래서 시집으로 <꽃 되고 바람 되어>를 낼 수 있었어요. 그 후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남대천 연어> <풀 친구 나무 친구> <한재> 이렇게 3권의 시집을 더 냈어요. 이중 '꽃 되고 바람 되어'와 '한재'는 빨치산 활동을 소재로 한 시집이고요. 나머지 두 권은 생태적인 내용입니다. '꽃 되고 바람 되어'만 해도 표현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한재'는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있었죠.

그리고 소설 <산사람들> 6권이 있어요. 이 소설은 완료했는데, 비공식적으로만 출간됐어요. 지금 출판사들을 알아보고 있는데,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 출간하겠다는 데가 없네요. 지금까지 나온 빨치산 책들보다 훨씬 더 빨치산 문제를 생생하게, 제대로 다루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 6권의 소설이라면, 굉장히 큰 작업이었을 텐데요. 언제 다 쓰셨나요?
"99년부터 쓰기 시작해서 2006년 8월15일 날 정확히 마무리 했어요. 7년을 매달렸지요. 소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픽션이지만, 제가 직접 겪고 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지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다시 현장을 답사했고, 주변 마을 사람들을 만났어요. 경찰·군인들이 낸 '토벌사' 같은 책도 다 섭렵했고요. 그렇게 해서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빨치산들의 입산, 무장, 투쟁, 사랑, 배신, 복수, 죽음의 모든 드라마를 쓰게 됐습니다.

경제적 여력과 시대 조건, 체력이 모두 좋지 않아 인생 말년에 겨우 쓰게 됐지만, 그나마 다행입니다. 제가 글을 다 쓰고 나니까, 대장암이 찾아왔어요. 글을 다 쓴 후여서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작년에 큰 수술을 해서, 몸이 아주 안 좋은 상황입니다. 제 나이도 올해 83세인데, 어서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아야 할 텐데요.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요. 욕심 같아서는 이남의 모든 국민들이, 한반도의 모든 젊은이들이 봐주었으면 해요."

▲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임미영 간사(왼쪽)와 정관호 선생.

소설 <산사람들>, 출판사에서 출간꺼려... 아직도 알아보고 있는 중

- 빨치산 역사의 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정사라고 하면 100% 사실이어야 할 테니 딱 정사라고 할 수는 없겠죠. 정사라고 한다면, '조국해방전쟁시기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투쟁 역사' 이런 식으로 구성할테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약간의 상상을 덧붙였으니 정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있던 지역 외의 경험은 알 수 없는 게 한계이지요. 그래서 전체를 총괄하는 '픽션의 다리'를 건너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를 '예술적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산사람들>은 제 경험에다가 '예술적 진실'이 가미된 소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사에 아주 근접한 소설입니다."

- 빨치산 이야기를 꼭 써야한다고 결심한 동기가 있었나요?
"빨치산들은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 인민해방전쟁이라고 여기고 참여하다가 모두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 다음에 근대사를 정리할 때, 역사의 격랑 속에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거나, 빨치산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가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빨치산의 역사가 패망의 역사였다 해도 그냥 묻혀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대한 역사거든요.

빨치산은 각기 다른 계급·계층·성분 출신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높은 도덕성, 연대성, 동지애로 뭉친 고결한 공동체였어요. 일제시대를 겪은 그들로서는 조국의 완전독립을 바랬던 것이고, 힘없는 인민들의 제대로 된 해방을 바랬던 것이어요. 이게 빨치산들의 꿈이었고, 그 꿈이 숭고했기에 제가 반드시 기록해야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 인생에서도 가장 고결한 시기였다고 자부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54년 잡히던 순간부터, 이런 고귀한 삶과 투쟁, 죽음을 꼭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 여성 빨치산들은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고 들었습니다.
"여성 대원들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었죠. 못 먹고, 체력도 약한 데 한번 쫓기게 되면 군경들이 '여성이다'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끝까지 쫓아가요. 그래서 남자 행세를 하곤 했죠. 생리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거의 신경을 못 쓰고 남자 행세를 해야 하고 하니….

나중엔 사람이 중성화 돼서 생리가 안 나온다고 하데요. 여성 대원들은 군경들에게 잡히면 성적으로도 엄청난 모욕을 당했고요, 죽어서도 남자 시체의 성기를 잘라서 여성 빨치산의 성기에 꽂아 놓는 만행을 당해야 했어요. 조국이 일제에 이어 미제에 강점되고 분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 힘없는 대다수 인민들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싸워야겠다고 입산한 대가치고는 너무나 큰 희생을 겪은 것이죠."

빨치산의 역사가 패망의 역사라 해도 그냥 묻을 순 없어

- 다시 태어나도 빨치산의 길을 걸으셨을까요?
"만약, 다시 태어나도 조국이 외세에 신음하고, 인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면 빨치산이 되었을 겁니다. 역사가 묻거든요. '조국이 위태로울 때 너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더냐?' '그 변혁기에 넌 어디에 있었느냐?' 그 물음에 떳떳이 답할 수 있다는 자랑과 긍지가 제겐 남아 있습니다. 우리들 같이 고생하고 핍박당하는 일들은 다시는 없어야 해요. 무엇보다도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평화의 기본은 자주·자결입니다. 그것이 짓밟힌다면,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반전평화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지만, 자주가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이북에서 내려오실 때 가족이 있으셨을 텐데요.
"제가 9형제 중에 둘째였어요. 결혼 전이라 아내나 자식은 없었고요. 부모님은 돌아가셨을 테고, 형님은 군의관이었는데 마지막에 원산에서 잠깐 뵙고 지금까지 소식을 몰라요. 나머지 8형제 소식을 모두 모르는 것이죠. 이산가족 상봉신청은 해놨는데, 아직 생사확인도 안되었으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쓴 안진걸 기자는 현재 KYC실행위원입니다. 안 기자는 민가협 양심수후원회(회장 : 권오헌) 주선으로 틈틈이 주말을 이용해 장기수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그:#산사람들, #빨치산, #양심수후원회, #민가협,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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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시민입니다. 현재 참여연대(www.peoplepower21.org) 실무자로 '민생희망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생들과 다양한 강좌 프로그램도 종종 진행하고 있습니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희망의 되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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