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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소담스러운 첫눈이 우리 동네 야산에 내리고 있다.
ⓒ 한나영
첫눈이 내렸다. 이제야 첫눈이 내렸다고? 아, 이전에 눈 비슷한 게 딱 한 번 내리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늬만 눈이었을 뿐 먼지 같은 부유물이었다.

'첫눈'이라는 눈부신 이름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처럼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화려하게 내리는 눈이라야 하지 않는가.

바로 그런 첫눈이 내렸다, 지난 일요일(21일)에. 집 앞에 소도록이 쌓이는 눈을 보면서 평소에 가던 교회 대신 가까운 교회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BRI@"그냥 차를 타고 가시지. '나이 든' 분들은 눈길에 넘어지면 큰일이라는데…. 굳이 걸어가겠다고 한다면 신발은 새 걸로 신으시고, 손은 주머니에 넣지 마시고."

어린 아이에게 충고하듯 큰딸이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나는 딸이 말하는 '나이 든 분'이 아직 아닌데, 팔팔한 10대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예비 노인'이 바로 나?

'얘야, 너도 눈 한 번 질끈 감아봐. 금세 엄마 나이 돼.'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켠 차들이 씽씽 달린다. 아직은 눈이 얼어붙지 않아서겠지만 설사 눈이 내린다 해도 시 당국의 신속한 조처가 뒤따르기에 빙판길에 대한 우려가 없어서일 것이다.

▲ "인도를 만들고 대중교통을 확충하라. 확충하라!" 두 가정에 차가 7대?
ⓒ 한나영
그나저나 미국의 다른 많은 곳처럼 이곳 역시 인도가 없다. 차도만 있을 뿐. 이곳 사람들은 차가 없으면 옴짝달싹 못하는 줄 안다. 걸을 생각도 안 하고. 그러니 인도의 필요성도 별로 못 느끼는 것 같다. 이런 고약한 도로 사정과 부실한 대중교통이 결국 국민 건강을 해치고 국가자원을 낭비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눈 많이 오면 교회도 문 닫는다고?

▲ 교회도 스노우데이? 차도를 따라 걸어갔지만 <메이블교회>는 잠겨 있었다.
ⓒ 한나영
흩뿌리는 눈발을 맞으며 교회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차장이 휑하다. 교회도 인기척이 없고. 예배가 취소되었나? 겨우 이깟 눈으로.

재미있는 것은 미국 교회는 눈이 많이 오면 '스노우데이'를 선포한다. 스노우데이에 학교 수업이 취소되는 것처럼 교회 예배도 취소된다.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묘지에 와서 상념에 잠기다

▲ ‘묘지 산책’. 내가 즐겨 찾는 <메이블교회> 옆 묘지.
ⓒ 한나영
미국에 와서 새로 갖게 된 취미가 있다. 바로 '묘지 산책'이다. 그게 뭐냐고? 말 그대로 묘지를 산책하는 것이다. 죽은 자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를 찾아가 그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물론 망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망자를 기념하고 추억하는 묘비명은 나 같은 묘지 순례자에게 귀한 선물을 안겨다 준다. 수많은 상념과 교훈들. 그들은 내게 말한다. 잘 살다 오라고.

산 자에게 이런 지혜를 주는 망자들의 집인 묘지. 그게 단순한 혐오시설이라고? 천만의 말씀. 눈에 안 띄는 외딴곳으로 자꾸 그들을 내쫓으려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열여덟 소녀, 이곳에 잠들다

▲ 아름다운 18세 소녀 셜리 앤 스몰우드.
ⓒ 한나영
열여덟 청춘 '셜리 앤 스몰우드(1939.10.9-1957.4.19)' 이곳에 잠들다.

아직도 해맑게 웃고 있는 소녀 셜리. 그녀는 왜 하필 개나리, 진달래 흐드러지게 핀 4월에 떠나야 했을까. 예쁜 딸 셜리를 잃은 부모는 또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지내야 했을까.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 "조지, 나도 곧 당신 곁으로 가게 될 거요. 편히 쉬고 계세요." 헬렌.
ⓒ 한나영
셜리의 묘비 옆에는 화려한 꽃으로 장식을 한 부부 묘비가 눈길을 끈다. 4년 전, 일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남편 조지. 그를 사랑했던 헬렌은 남편과 함께 나란히 묻히고 싶어한다.

조지 T. 폴리(1933.12.17-2003.7.15) & 헬렌 V. 폴리(1937.9.6-?)

"여보, 먼저 가 있을 테니 천천히 오시오. 이다음에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잉꼬부부 조지와 헬렌의 애틋한 이별의식을 상상해 본다. 이들의 아름다운 작별을 그려보고 있자니 며칠 전 올케가 들려준 어느 잉꼬 멸치부부 유머가 떠오른다.

잉꼬 멸치부부가 어느 날 그물에 걸렸다지. 사색이 된 아내를 보며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잖아.

"여보, 걱정 마. 우리 이다음에 시래기국에서 다시 만나면 돼."

동네 한바퀴 산책의 종착역

▲ 내 상념의 공간이자 '동네 한바퀴' 산책의 종착역인 애블론우즈.
ⓒ 한나영
묘지를 돌아보고 집으로 가는 길. 눈길을 걷는 사람은 나뿐이다. 이따금 자동차가 바퀴자국을 남기고 좁은 길로 지나가지만 인공의 흔적을 용납하지 않는 위대한 눈.

드디어 애블론우즈. 이곳은 내 상념의 공간이자 '동네 한 바퀴' 산책의 종착역이다. 꽃피는 봄, 여름, 가을에 이르는 동안 나는 늘 이곳을 찾았다. 책 한 권 들고서.

이곳 나무 의자에 앉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했다. 그리고 돌아갈 고향산천을 떠올리며 추억을 추억했다.

행복한 가족 에마네

▲ "얘들아, 지금 영화 찍니?" 첫눈이 마냥 신나는 아이들.
ⓒ 한나영
아들 둘, 딸 하나를 둔 이웃 '891호' 에마네 가족의 부러운 젊음이다. 모처럼 퍼붓는 첫눈에 온 가족이 '흥분해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작년에 플로리다에서 이사 온 에마네, 이들에게는 눈이 단순한 눈이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눈 위에 벌렁 드러눕기도 하고,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있다.

'너희들 지금 영화 찍고 있니?'

막내 에마는 눈을 동그랗게 뭉쳐 떼먹고 있다.

"그건 아이스크림이 아니라고."

▲ ‘그건 아이스크림이 아니야.'
ⓒ 한나영
"그 집 애들은 왜 밖에 안 나와요?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면서 좀 놀지."

젊은 부인이 내게 묻는다. 아이들은 마침 집에 없었다. 하지만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귀찮아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 애들은 눈 위에서 뒹굴고 놀 만한 열정이나 순수가 없어요. 벌써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말예요. 그게 언제냐고요?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지금 에마네처럼 눈이 다시 사랑스러워질 거예요.'

'얘들아, 지금이 좋을 때다. 그래, 열심히 현재를 즐겨라. 카르페디엠!'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처럼 나도 아이들에게 '카르페디엠'이라고 외쳐보고 싶어졌다.

▲ "아빠는 어디 가셨니? 추운데 무릎은 왜 꿇고." 뒤늦게 나타난 아빠와 함께 온 가족이 포즈를 취하다.
ⓒ 한나영

덧붙이는 글 | 결국 눈이 많이 와서 월요일은 모든 학교에 '스노우데이'가 선포되었다. 학교에 가지 않게 된 행복한 아이들, 늦잠을 자고 하루종일 집에서 빈둥거렸다.

"엄마, 나 스노우데이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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