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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고 별러서 빨래를 하게 되었다. 요즘 세상에 빨래 한번 하는데 뭘 그렇게 벼르고 별렀다는 건지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이 손빨래니까 그런가 보다 싶을 뿐이겠다.
@BRI@빨래를 얼마나 해 봤다고 갑자기 빨래, 그것도 손빨래 예찬론자가 되었냐고 하면 좀 쑥스러운 게 사실이다. 본격적으로 손빨래를 일삼아 하게 된 것은 이제 두 달 남짓 된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한다.
손빨래를 하면서 되새기게 되는 것은 거창하게도 내 삶의 발자취였다. 인생 복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복습이라. 복습이 분명하면 우리의 살아 갈 내일이 더 밝지 않을까? 모두 손빨래를 하면서 터득하게 된 사실이다. 손빨래를 하면서 나는 빨래통에서 인생살이의 건더기들을 주렁주렁 건져 올렸다. 지금 이 이야기들을 하려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산속 깊은 절에 들어가 동안거(겨울 한 철 스님들이 한 곳에 머물며 수도하는 일)라도 해야만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마당 수돗가에 퍼질러 앉아 빨래를 하면서도 이것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해 봄직한 일이 아닐까 싶다.
엊그제 내가 빨래를 하기 위해 제일 먼저 챙긴 것은 날씨였다. 다행히 기상청 누리집(사이트)에서 예보 된 대로 날씨가 푹했다. 꽁꽁 얼어붙던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더니 봄 날 같았다.
참. 날씨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언젠가부터 우리는 날씨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과학기술 덕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겨울에도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반소매를 입는다고 하고 한 여름에도 도시인들은 넥타이를 매고 일을 한다. 어디 이뿐인가. 눈 내리는 겨울밤에 빨간 수박을 먹을 수 있고 딸기도 맛 볼 수 있다.
그런데 날씨의 영향에서 벗어난 생활이 편리한 건 사실이나 과연 좋은 일이냐 하면 그것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봐야 한다. 자연과 멀어진 삶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질곡과 현대인의 병들은 모두 자연과 멀어진 삶의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얘기가 나오면 그 다음의 이야기 진행이 뻔해진다. 원시생활로 되돌아 갈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생활에 도입하는 과학 기술의 적절성이 문제라는 식으로 얘기를 해 버리면 아주 싱거워진다. 적절한 과학기술의 수준과 정도가 어찌 쉬 합의 될 수 있으랴.
어쨌든 하루 생활이 날씨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나는 빨래를 위해 날씨부터 골라야 했다는 것을 이해 해 주기 바란다.
마당 수돗가에 큰 고무함박을 두 개 갖다 놓는 일에서부터 빨래 준비를 시작했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피워 물을 데우는 것이 손빨래에선 빼 놓은 수 없는 일이다. 빨래물이 따뜻해야 때가 잘 빠진다. 가을에는 마당에 솥을 걸고 물을 데웠지만 겨울에는 불길을 방으로 들여야 해서 꼭 부엌 아궁이에서 물을 데운다.
집 뒤안에 있던 고무함박에는 눈이 담겨 있어 털어내야 했다. 재생비닐로 만든 빨간 고무함박은 생태적인 용기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거부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어디 부딪쳐도 깨지지 않고 신축성이 좋아 빨랫감을 넣고 밟기에도 좋다.
손빨래 순서 정하기
과일이나 라면이 담겼던 종이상자에서 빨랫감들을 꺼내 종류별로 분리를 했다. 때가 너무 절어서 도저히 더 덮고 잘 수 없던 이불 한 채도 방에서 꺼내왔다. 겉옷을 한 쪽으로 모았다. 겉옷도 평상복과 작업복은 따로 했다. 속옷들도 삶아야 할 것 몇 개는 가려 놓았다. 다음은 양말이었다.
이렇게 하면 분리작업이 다 되었다고 생각 할 것이다. 한 가지가 남았다. 장갑이다. 농사짓는 집에는 며칠만 안 빨면 장갑이 수북이 쌓인다. 장갑도 고무장갑과 코팅장갑, 면장갑이 있고 흙이 묻은 정도가 다 달라서 이것들도 나누어 놓았다.
내 익숙한 솜씨 덕에 빨랫감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빨래 통에 들어 갈 순서를 정한 셈이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누가 먼저 들어가야 하는지 지들이 안다. 속옷이 거쳐 간 빨래 통에 양말이 들어가고 그 다음에 겉옷이 들어간다. 맨 나중에 들어가는 흙 묻은 장갑들은 으레 그러려니 한다. 장갑은 자기가 마지막에 들어가지만 마음씨 공평한 주인님이 결국은 자기까지 똑 같이 깨끗하게 빨아 줄 것이라는 걸 안다.
고무함박을 하나 더 가져왔다. 탈수기(일명 짤순이)도 설치를 하고 전기선을 빼 왔다. 내가 손빨래에서 부득이 짤순이라는 전기제품을 사용하기로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내 손목이 상해서 빨래를 짤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손목 보호대를 끼기도 하고 압박붕대를 감기도 했지만 상한 손목 인대는 낫지 않고 있다. 뜸도 놓고 부항도 붙였는데 별 효과가 없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뜨끔거린다. 일손을 놓고 손을 쓰지 않아야 해결 될 문제다. 이번 겨울에 치료하지 못하고 농사철이 시작되면 내년 한 해 또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내 손으로는 빨래를 매 짤 수가 없어서 '짤순이'를 쓰기로 한 것이다.
빨래를 헹구는데 드는 물은 짤순이를 쓰면 훨씬 줄어든다는 것이 내 손목이 다 나아도 짤순이를 계속 사용하게 될 구실이다.
빨래를 하다가 아차 싶어 방에 들어가 꺼내 온 것이 있다. 나랑 같이 사는 후배가 지난번에 빨래를 했던 것인데 때가 그대로여서 다시 해야 하는 것들이다.
빨래에 담긴 실타래 같은 내력들
삶아야 할 속옷과 면 티는 깨끗이 빨아 맹물에 잘 헹궜다. 빨래비누칠을 다시 한 속옷들을 양은솥에 넣어 삶기 시작했다. 이때 내 첫 경험이 떠올랐다. 빨래 삶던 첫 경험은 내 흰 셔츠가 온통 잿빛으로 변했던 30년이 더 된 기억이다.
중학교 1학년 때니까 정확히 35년 전의 일인데도 아주 생생했다. 산골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읍내로 유학(!)을 갔던 나는 자취를 하게 되었다. 주말마다 집에 가서는 쌀자루와 반찬단지를 장작다발과 함께 리어카에 싣고 읍내로 내려왔던 내가 한번은 샤쓰를 깨끗하게 빤답시고 솥에 넣고 끓인 것이다.
정성은 갸륵하고 그 시도는 벤처정신이 깃들어 있었으되 방법이 잘못되었다. 옷을 훌훌 벗어 다짜고짜 끓는 물에 넣어 삶았으니 옷이 희게 되기는커녕 땟국으로 천연염색을 한 꼴이었다. 셔츠가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인체에서 채취한 절은 때를 염료로 천연염색을 감행했으니 아주 기발한 착상이었다.
이 때문에 어머니에게 구박을 당했는지 칭찬을 받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어머니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늙으신 분들은 최근의 기억은 못해도 왕성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은 빈틈없다고 하니 이 일을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까만 때가 낀 티셔츠의 목덜미를 아무리 비누칠을 해서 문질러도 때가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 옷은 후배가 한번 빨았던 옷이다. 마른 빨래를 개키면서 때가 빠지지 않은 목덜미께를 들이대면서 나는 그 후배에게 빨래를 이 모양으로 하면 되겠냐면서 한참 타박을 했었기 때문이다.
빨래감을 하나하나 봐 가며 때가 있을 곳에 비누를 칠해가면서 조물조물 빨아야지 빨래통에 한꺼번에 넣어서 주물거리면 이렇게 된다고 심하게 핀잔을 주기까지 했는데 정작 내가 아무리 문질러도 때가 안 빠지는 것이었다. 몇 번을 건성으로 빨면서 이미 때가 팍 절어버린 상태였다.
내가 빨래를 하는 동안 마당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그 후배에게 갔다. 빨래를 보여주면서 사과를 했다. 후배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후배는 싱긋 웃었다.
언젠가 서울 사는 형님이 우리 집에 왔다가 빨랫줄에 널린 장갑들을 보고는 장갑장수 다 굶어 죽겠다면서 몇 번이나 빨아 쓰냐고 물었었다. 요즘은 막노동하는 사람들도 장갑은 물론 작업화나 작업복도 흙탕이 되면 버리고 새것을 사용한다고 했다. 그게 더 경제적이라는 것이 이유의 전부였다.
자기 것이 아니고 고용주가 지급하는 것이라는 것도 원인일 수 있다. 내가 아는 바도 그렇다. 내가 아는 막일하는 사람들도 절대 장갑을 빨아 쓰지 않는다. 빨고 말리고 할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헌 나무에 박힌 못도 빼서 다시 쓴다. 못 한 근을 철물점에서 사면 백 수 십 개가 넘는다. 단돈 2000원이면 산다. 그만큼 한 못을 빼서 쓰려면 하루 종일 걸릴 수도 있다. 그래도 지구자원이 고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껏 그렇게 한다.
노총의 모든 조합원들이, 막노동을 하는 모든 노동자들이 회사에서 공짜로 지급받는 장갑과 작업화를 집에라도 가져가 빨아서 다시 쓰는 날 세상이 뒤바뀌지 않을까 생각 해 본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는 '사람대접 받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똥 묻은 팬티
빨래하면서 시린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물의 감촉이 계절을 실감하게 했다. 지하수로 흘러 해발 550미터의 이 높은 곳으로 솟구쳐 올라 온 물의 경로가 잠시 나를 땅속 여행길로 안내 하기도 했다.
곧 입어야 할 속옷은 방에다 널었는데 유독 내 팬티 하나가 똥구멍 쪽에 얼룩이 져 있는 것이었다. 빨면서 물속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는데 널다보니 눈에 띈 것이다. 다시 빨아야 하는가 싶어 잘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옷에 똥을 엄청 쌌던 일이 있는데 그때 똥물이 든 것이었다. 오해는 마시기 바란다. 내가 싼 것이 아니고 건너 동네에 사는 내 후배가 싼 것이다. 내 팬티에 어떻게 후배가 똥을 쌌냐면 사연이 아주 재미있다.
이번 달 초로 기억된다. 옆 마을에 놀러 갔었다. 김장을 하는 날이라 도우러 갔다가 밤에 술판이 벌어졌다. 지나치게 술을 많이 한 후배 하나가 술에 취해 집에도 못 돌아가고 그 집에서 자다가 똥을 싼 것이다. 새벽녘이었다. 질긴 남자 하나와 질긴 여자 하나가 남고 다 집으로 돌아간 새벽에 술을 거의 안 한 나랑 셋이서 차를 마시고 있던 때였다.
후배가 자는 방에서 야릇한 냄새가 나서 제일 정신이 맑은 내가 들어가 봤더니 아랫도리를 벗은 채 골아 떨어져 있었는데 똥을 싸서는 이불과 옷은 물론 벽과 몸에 다 똥칠을 해 놓고 있었다.
이때부터 내가 취한 조치들은 아주 눈물겨운 것이었다. 후배의 몸을 다 닦아주고 옷가지는 물론 이불을 두 채나 화장실로 가져가 똥 덩어리들을 긁어낸 후 빨기 시작했다. 이때 내가 입었던 속옷을 다 벗어 후배를 입히고 나는 겉옷만 걸쳤다. 나는 10월이 되면서부터 내복을 입기 때문에 이 위급한 일에 대처하기가 유리했다.
이때 빌려 주었던 내 팬티와 내복, 티셔츠 등이 내게 돌아왔는데 그 후배의 후미진 똥구멍을 깨끗이 딲지 못했던 내 불찰로 내 팬티에 후배의 똥이 묻어났었던 모양이다.
어찌 웃음이 나지 않을쏘냐
그 후배를 그날 새벽에 목욕탕에 데려가 함께 목욕을 하고 해장국집에 가서 아침을 사 먹였는데 그때도 입에서 술 냄새가 코를 찔렀었다.
이틀 후에 나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못 드는 후배와 약속을 했었다. 한 달 간 술을 끊자고 했다. 나도 동참하겠다고 하자 후배는 그러마고 했고 지금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다. 그때의 풍경이 똥물 흔적이 남은 팬티를 널면서 되새겨졌다.
이렇게 손빨래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궁금할 것이다. 하루 종일 걸렸다. 만약에 이 빨래 감들을 세탁기에 넣었다면 두어 시간 안에 다 해치웠을 것이다. 세탁기를 사용한 사람이 남긴 시간보다 손빨래 하면서 흘려보낸 내 시간들이 결코 아깝지 않다.
내 삶의 짧은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었기에.
덧붙이는 글 | <열린전북> 2007년 1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