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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맨이 사흘간 나를 따라 다니며 찍었다.
카메라맨이 사흘간 나를 따라 다니며 찍었다. ⓒ 전희식

한 달여 전의 일이다. 케이비에스(KBS)의 유명 프로그램인 '여섯시 내 고향'에 내가 나왔다. 미리 알고 있었던 나는 집에 텔레비전이 없기에 아랫집 할머니 댁에 가서 티브이를 보는데 방송이 채 다 끝나지 않아서 서울 사는 할머니의 큰 며느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티브이에 할머니가 나온다며 얼른 티브이 보라는 전화였다. 할머니는 나도 보고 있다고 전화에다 큰 소리로 얘기했다.

@BRI@여든 다섯의 아랫집 할머니는 처음으로 티브이에 나온 당신 모습이 꾀나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머리 빗질도 안했다느니, 쪼그랑 밤송이 얼굴이라느니 타박을 해 가며 티브이를 봤다.

내가 할머니 집을 나서기 전까지 서너 군데서 더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아랫동네에서 시집 온 할머니는 친정인 아랫동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는 사이에 나는 자리를 일어섰다.

할머니에게 작별인사를 드리는데 바로 이때 내 손전화가 울렸다. 이때부터 내게 쏟아져 들어 온 외부의 연락들은 한 주 내내 계속되었다. 남녀가 따로 없었고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맨 처음 걸려온 전화는 그래도 아주 모범적인 전화였다. "여기 서울인데요. 케이비에스 여섯시 내 고향 봤거든요"라고 시작되는 전화였기 때문에 모범적인 전화라고 하는 것이다. 그날 밤에 걸려온 전화의 대부분은 막무가내 식 전화였다. 제일 많았던 유형은 이런 것이었다.

"거기 찾아가려면 어떻게 가요?"
"전희식씨죠? 귀농한지 얼마나 됐어요?"
"그렇게 집 지으면 평당 얼마나 됩니까?"

너무도 다급한 전화들이었다. 의례적인 인사조차 나눌 여유를 갖지 못한 분들이 당일 전화를 건 사람들인 것 같다.

밤 12시가 넘어서까지 걸려오는 전화는 집전화로도 걸려왔다. 전화를 꺼 놓을까 하다가도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나중에는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냐고 물어봤다. 케이비에스에 전화해서 알았다는 사람, 케이비에스에서 안 가르쳐줘서 언젠가 <오마이뉴스>에서 글을 봤었기에 <오마이뉴스>에 물어서 알아냈다는 사람, 이도저도 안돼서 티브이에 나온 지명을 보고는 우리 동네를 찾아 내 이장님에게 전화해서 집 전화를 알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날도 계속 이어지는 전화에 나는 내 누리집을 가르쳐 주면서 우선 그곳에 들러 집 짓는 내용을 둘러 본 다음에 게시판이나 전자우편으로 자세한 사연을 남겨 달라고 했다.

무슨 놈의 티브이에 다 나갔냐고 핀잔을 주는 후배가 있었다. 기다리던 전화였다. 최근 여러 해 동안 티브이에서 온 출연제의는 모두 다 거절했었지만 이번에 결국 내 마음을 꺽게 된 사연을 얘기했다.

사실 담당프로듀서가 강남의 집값 폭등 얘기를 하면서 이 비정상적인 사태에 대해 내가 쓰레기장과 고물상을 돌며 재활용품으로만 집을 짓는 모습을 꼭 소개하고 싶다는 말만 아니었다면 티브이에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핀잔을 주던 후배는 여전히 티브이에 나온 나를 못마땅해 했다. 나를 아끼는 마음이려니 싶다.

언론을 탈 때마다 겪던 일인지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고물을 보물로'라는 부제가 달린 이번 '여섯시 내 고향'에 출연하고 나서 이처럼 많은 관심과 극성스러움을 겪을 줄은 몰랐다.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생태집짓기 참가자들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생태집짓기 참가자들 ⓒ 전희식
지금 나는 이틀째 눈에 갇혀 꼼짝을 못하고 있는데 이런 산골에 쓰레기로 만드는 집을 눈여겨보고 탐을 내다니 한편으로 의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속으로 귀의(?) 하고자 하는 그 사람들의 동기와 의지에 가슴이 싸아 했다.

중한 병에 걸렸다며 꼭 그렇게 집을 지어 달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나를 쓰레기로 집 짓는 업자로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화를 건 사람의 처지에 따라 같은 프로를 봤으면서도 나를 이해하는 각도가 다 달랐구나 싶다.

어떤 사람은 보따리학교라는 대안교육장으로 알고 대안학교 문의를 해 왔었다. 근 100여명에게서 연락이 왔었는데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집에 찾아 온 시청자들이 많을 듯싶겠다. 그러나 정 반대다. 단 한사람도 찾아 온 사람이 없었고 두 번째로 연락을 해 온 사람이 꼭 한 사람 있었을 뿐이다.

두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일도 하고 집짓는 것을 배우겠다며 날짜를 잡아달라고 첫 전화에서 떼를 쓰다시피 하여 수첩을 봐 가며 날을 잡았었다. 결과는? 둘 다 연락도 없이 안 왔다. 둘 중 한 분만이 오기로 한 다음날, 집안에 일이 있어 못 갔다면서 어제가 가기로 한 날임을 이제야 알았다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전화를 했다.

그렇다고 내가 성의 없이 전화를 받았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며칠 접속이 폭주하던 내 누리집에 연락처나 사연을 남긴 사람도 없었다.

구성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피디가 현장을 지휘한다.
구성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피디가 현장을 지휘한다. ⓒ 전희식
우리 집까지 거의 다 왔던 분이 있다. 이 사람은 우리 집 5킬로미터 앞까지 온 분이다. 길가의 수퍼 앞이라면서 어느 쪽으로 들어가야 하냐고 내게 전화를 했었다.

티브이에 나온 동네이름만 보고 아무 말도 없이 찾아 온 것이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이런 일도 그동안 여러 번 겪었던지라 손짓 발짓 해 가며 왼쪽 오른쪽, 무슨 농장 끼고 어쩌고 한참 설명을 해 드렸는데 10분이 지나도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데 이렇게 늦을 수가 없었다. 엉뚱한 곳으로 길을 잘못 들어 손 전화 불통지역인가 싶어 수신자번호를 보고 전화를 걸어봤다.

아 이럴 수가. 황당 그 자체였다. 동행한 사람이 갑자기 함양 녹색대학부터 들르자고 해서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시간 나면 오겠다고 했다. 역시 그 사람은 아무 연락도 없이 안 왔다.

편지가 두 통 왔었다. 인천과 경북 달성군에서 온 것이었는데 티브이에 나온 대로 번지수도 없이 동네 이름과 내 이름만 적혀 있는 편지였다. 인천서 온 편지는 답장 보낸 지가 보름여 된다. 그분은 전화번호를 적지 않아서 답장에 내 전화번호를 적어 드렸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

대구 아래 달성에서 편지를 보낸 젊은 처자는 내게 온 연락들 중 제일 꼴찌다. 서두르지 않는 그 성품에 왠지 신뢰가 갔다. 손전화가 없다는 그 분은 집 전화번호를 적어서 편지를 보냈다. 편지 받은 지 닷새 만에 나도 답장을 썼다. 눈이 좀 녹으면 마을을 내려가 편지를 부칠 생각이다.

이렇게 ‘여섯시 내 고향’의 추억은 저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삶이 보이는 창> 2007년 1-2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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