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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간정 정경, 소나무와 정자 돌기둥을 함께 감상하면 좋다.
청간정 정경, 소나무와 정자 돌기둥을 함께 감상하면 좋다. ⓒ 김정봉
청간정은 천후산과 설악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청간천의 물굽이가 바다를 만나는 합수머리 언덕 위에 있다. 우뚝 솟은 언덕 위에 있지만 몸집 큰 소나무가 쭉쭉 수직으로 뻗어 올라 제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나무와 소나무로 둘러싸인 계단 오솔길을 올라야 비로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거칠게 다듬긴 했어도 굵직한 12개의 돌기둥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고성의 힘이 느껴진다. 돌기둥에 얹힌 정자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지만 돌기둥은 적어도 조선 중종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니 연륜 또한 깊다.

정자는 정자에 올라 사방을 감상하는 것이 참 맛이다. 망양정처럼 바다에 그리 멀리 있지도 않고 의상대처럼 바다 반대쪽이 막히지 않아 시원하다. 서남쪽 멀리 설악의 모습이 들어오니 사방으로 터진 정경은 청간정이 최고가 아닌가 싶다.

청간정 누정에서 바라다본 동해 바다.
청간정 누정에서 바라다본 동해 바다. ⓒ 김정봉
누정 안쪽에 있는 최규하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이채롭다. 편액에 남긴 '경신년 성하'가 눈에 확 들어온다. 경신년 성하(庚申年 盛夏), 80년 여름인데 퇴임이 8월 16일이니까 퇴임 직전에 다녀간 것이다. 사실 80년 8월 1일에 다녀간 기록이 있다. 정자에 올라 온갖 핍박으로부터 해방감을 맛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한 것은 아닌지, 측은한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송지호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 어명기 전통가옥이, 북쪽으로 왕곡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모두 포근한 여행을 담보해 준다. 어명기 전통가옥은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 않다. 산등성이를 한 굽이 넘으면 잘 생긴 소나무 몇 그루가 눈에 들어와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저기가 어명기 가옥임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에 들기 전엔 이런 곳에 논과 밭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지만 산언덕을 오르면 제법 넓은 땅이 펼쳐 있는 것이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이런 산골에 이만한 상류집이 존재할만한 근거가 된다.

뒷동산에서 바라본 어명기 가옥 정경.
뒷동산에서 바라본 어명기 가옥 정경. ⓒ 김정봉
어명기 가옥은 낮은 언덕에 기댄 채, 양지바른 곳에 살포시 앉아 있다. 네모 반듯한 여느 상류집과 달리 휘어져 돌아가는 담이 포근하기만 하다. 그 흔한 꽃담을 마다하고 토담으로 쌓아 주변 집들과 어울리려 하였다.

그 흔한 꽃담을 마다하고 토담으로 쌓아 정겨워 보인다.
그 흔한 꽃담을 마다하고 토담으로 쌓아 정겨워 보인다. ⓒ 김정봉
집 구조와 모양새는 다른 집들과 많이 다르다. 한 개의 용마루에 두 줄로 나란히 방을 만든 겹집구조로 되어 있다. 양통집이라고 하는데 상류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이며 민가의 영향을 받아 지은 것이다.

꼭꼭 잠긴 문은 답답하게 느껴지고 마당에 깔린 자갈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집주인도 서울에 거주하면서 이따금 내려온다고 하니 사람냄새는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집을 감상하기 제일 좋은 곳은 뒷동산 소나무 밭이 아닌가 싶다.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토담과 기와지붕이 내려다보이고 산등성이를 타고 길게 뻗은 논과 밭, 한적한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송지호를 지나 왼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가면 왕곡마을. 왕곡전통마을은 송지호 북쪽 나지막한 오음산밑, 마을을 관통하는 개천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오봉리 이름의 유래가 된 높고 낮은 5개의 산봉우리가 마을을 감싸고 있어 아늑하다. 왕곡마을은 이 중 오봉1리를 말한다.

오음산(五音山) 이름 또한 재미있다. 이 산밑에 선유담(仙遊潭)이 있어 신선이 여기서 오음육률(五音六律)을 즐겼다고 하여 이렇게 불렀다 하기도 하고, 이 산의 정상에 올라가면 장현리, 왕곡리, 적동리, 서성리, 탑동리에서 들려 오는 닭소리와 개 짖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전자는 이 마을의 품격을 높여 보려는 심정으로 붙인 이름 같아서 오히려 후자 쪽이 재미있고 정이 간다.

마을 이곳저곳이 한창 공사 중인데다 군데군데 비어 있는 집 때문에 어수선하지만 느림보 걸음으로 마을 구석구석 구경하다가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토담과 토담 너머 항아리를 이고 있는 굴뚝, 멀리 산봉우리를 그대로 빼다 닮은 초가지붕 등은 눈을 즐겁게 한다.

초가지붕, 오음산의 봉우리가 초가지붕 위에 그대로 내려앉은 모습이다.
초가지붕, 오음산의 봉우리가 초가지붕 위에 그대로 내려앉은 모습이다. ⓒ 김정봉
이렇다 할 양반 대가가 없는데도 이 마을에는 기와집이 많다. 이웃마을에 기와 굽는 가마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는데, 이고 있는 재료가 기와인지, 볏짚인지의 차이일 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은 아니다. 기와집이라 하여 넓지도, 초가집이라 하여 좁지도 않다.

항아리를 이고 있는 굴뚝, 굴뚝 관련 기사를 쓸 때 이 사진 자료를 빼놓은 것이 아쉽다.
항아리를 이고 있는 굴뚝, 굴뚝 관련 기사를 쓸 때 이 사진 자료를 빼놓은 것이 아쉽다. ⓒ 김정봉
기와집, 초가집 모두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하나같이 'ㄱ'자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방 마루 부엌 외양간이 한데 붙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외양간이 본채 처마 아래에서 튀어나와 내림지붕을 하고 있다.

본채 처마에서 내려온 내림지붕이 왕곡마을 집들의 특징이다.
본채 처마에서 내려온 내림지붕이 왕곡마을 집들의 특징이다. ⓒ 김정봉
이 마을의 특징이 마을에 우물이 없다는 점인데, 마을이 배 모양을 하고 있어 마을에 우물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 때문이라 한다. 언뜻 최근에 공사 중인 집에서 우물을 본 것 같은데 이제 이 전설도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선인들의 발걸음이 잦았고 강릉지역과 견줄 만한 어엿한 상류주택이 있고 전통의 맥을 잇는 마을이 있는 이런 땅에 명찰이 없을 리 없다. 금강의 초입, 남한 땅 최북단에 건봉사가 자리하고 있다.

건봉사엔 돌기둥에 금강저를 새긴 불이문(不二門), 두툼한 돌 솟대와 능파교 언저리에 서 있는 바라밀 문양이 새겨진 돌기둥 등 이색적인 것들이 많다. 그래도 대웅전과 극락전 영역을 잇는 능파교가 건봉사의 제일이다.

숙종 때 세워진 것이니까 벌써 300년의 세월이 흘렀다. 몇 차례 무너져 다시 지어지긴 했어도 비교적 규모가 크면서도 잘 보전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 중의 하나다.

2년 전 여름에 찾았을 때 홍수에 모두 쓸려 보지 못한 아쉬움이 그래서 더욱 컸다. 하얀 천으로 둘둘 말아 놓은 '능파교 육신'은 마치 시신이 들어있는 관을 보는 듯하였다.

홍수 때 쓸리어 간 돌들,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보는 듯하다(2005년 여름 촬영).
홍수 때 쓸리어 간 돌들,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보는 듯하다(2005년 여름 촬영). ⓒ 김정봉
원래 있었던 난간이 없고 상판이 평평하지 않아 복원이 잘못되었다 하나 이제 그런대로 제 모습을 찾아 어엿하게 서는 것이 싸늘한 시신이 부활이라도 한 것 같다. 30여 개의 돌이 제자리에 박혀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고 있으나 아직 핏기가 돌지 않은 해쓱한 모습이다.

능파교 정경, 아직 핏기가 돌지 않은 뽀얀 살결은 어딘지 어색하다.
능파교 정경, 아직 핏기가 돌지 않은 뽀얀 살결은 어딘지 어색하다. ⓒ 김정봉
고성에는 능파교 외에 숨겨진 보물이 있다. 육송정홍교다. 건봉사 가는 길, 간성읍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지점에 있다.

이 홍교는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건봉사 능파교와 함께 영조 때의 대홍수(1745년)로 붕괴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능파교와 비슷한 시기 혹은 능파교보다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육송정홍교, 변방의 고장, 고성에서도 변두리에 이만한 돌다리가 있으니 고성을 가볍게 볼일이 아니다.
육송정홍교, 변방의 고장, 고성에서도 변두리에 이만한 돌다리가 있으니 고성을 가볍게 볼일이 아니다. ⓒ 김정봉
동쪽 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그 위에 장대석을 쌓는 등 자연지형을 잘 활용하였으며 아기자기하고 앙증맞은 데가 있다. 역사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변방 중에도 변두리인 이곳에 이렇게 공들여 쌓은 돌다리이기에 고성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육송 정홍교야말로 가장 고성다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보물인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 지난해 12월 30일 강원도 고성에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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