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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대선이 있을 뿐 아니라 북핵 문제를 중심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도 긴박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오마이뉴스>와 외교안보 전문 싱크탱크인 코리아연구원은 '2007 코리아의 전망과 과제'를 주제로 공동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이 글은 모두 9편의 글 중 7번째로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이 '2007년의 한반도와 사회운동 - 안보의 역습과 민주주의'라는 제목을 썼습니다. 원문은 코리아연구원(www.knsi.org)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한미FTA 6차 협상이 시작된 15일 오전 서울 신라호텔 정문 건너편에서 한미FTA 저지 범국본이 '협상 목표 하나도 못따낸 망국적 협상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한미FTA 6차 협상이 시작된 15일 오전 서울 신라호텔 정문 건너편에서 한미FTA 저지 범국본이 '협상 목표 하나도 못따낸 망국적 협상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I. 2007년의 한반도 : 선거, FTA, 핵무기

@BRI@올해는 대선이 있는 해이다. 이번 대선이 87년 6월항쟁 이래 20년간 지속되어 왔던 '민주개혁 국면'에 중대한 변곡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정권교체 여부를 놓고 중단 없는 개혁이냐 아니면 후퇴냐 식으로 상황을 규정하는 것이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5년 전 가장 극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을 통해 집권한 '참여정부' 노무현 정권의 성쇠를 살피건대, 전선의 이편과 저편을 가르는 정치공학의 내포는 때론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회운동이 "지난 20년간 추구해 왔던 '민주개혁'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20년 민주개혁의 성공과 후퇴의 조건은 무엇이었으며 장애물과 극복대상은 과연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보다 진지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는 이른바 87년 체제의 극복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도 있겠고, 민주발전 도상에서 직면한 내적 한계와 외적 도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한편, 올해는 한미FTA 체결 여부가 사실상 판가름되는 해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는 대선 이상의 의미를 지닐런지도 모른다. 한미FTA는 97년 경제위기 이후 분명해져 온 신자유주의적 경쟁구조와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고착화 시키는 것은 물론, 나아가 한국경제의 발전경로를 미국경제의 하위체계로 고착시키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배타적 영향력을 항구화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한미FTA는 사실 단순한 경제적 선택이라 할 수 없다. 정부가 올인하고 있는 이 도박은 꼼꼼한 경제적 이해타산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 한미FTA는 시장에 대한 맹신 이상으로 미국의 정치군사적 패권에 대한 맹신, 즉 '안보 논리'에 기초해 추동되고 있다.

현 시기 미국과의 경제통합은 한반도의 전후체제 혹은 분단체제의 근간이 되어온 배타적 대미편승구조를 다시 한 번, 변형된 형태로 재승인하는 의미를 지녔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편승하고자 하는 미국이 '대 테러전쟁 시대', 자기중심성을 한껏 노골화한 패권제국이라는 점이다. 한미FTA는 실제에서도 졸속적이고 불평등한 경제적 동맹으로 귀결되고 있다. 당연하게도 한미FTA가 부동산 정책을 비롯한 공공정책의 선택 폭을 심각하게 제약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가볍게 취급되고 있다.

이 선택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과연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선택인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준비되지 않은 주체들에 의해 강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한미FTA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며 미래에 대한 선택권의 탈취라 할 만하다. 또 우리 사회 내부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심화시킴은 물론 장래 한반도 주변국 관계도 꼬이게 할 수 있는 '트로이의 목마'로 작용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올해로 5년째를 맞은 이른바 '2차 한반도 핵 위기' 역시 중요한 고비를 지나고 있다. 최근 북미 양자접촉 결과 양국의 입장이 긍정적이고 6자회담도 곧 재개될 것이라고는 하나 아직 최종 결과는 낙관할 수 없고, UNDP 대북원조 중단 시비 등 새로운 복병도 만만치 않다. 이라크에서 이란으로 무장개입을 확대해 가는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동향을 보더라도 미국의 대북정책이 위기관리 수준을 넘어선 전향적 방향으로 전환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요컨대 핵을 둘러싼 한반도-동북아 위기의 평화적 해결 전망은 쉽게 단정할 수 없고 매우 유동적이다.

북핵 해결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최근 북한의 조기붕괴를 점치는 '유사사태' 대비론이 심심치 않게 거론된다. 그러나 이 전망이 다분히 주관적 기대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흡수통일 혹은 휴전선 이북으로의 군사개입 등 일방주의를 당연시한다는 점에서도 경계되어야 한다. 다만, 북한체제가 이행의 도정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정권은 미국의 봉쇄와 군사적 위협을 이유로 선군주의라는 특유의 군사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북의 '선군주의'는 자위의 체제이자 매우 불안정한 이행의 체제이다. 그러나 이행의 맥락에서 북한정권과 인민을 바라볼 때 선국주의가 정당화하는 외부의 위협은 실재이면서 또한 허구이기도 하다. 북의 군사주의가 동북아에 또 다른 군사주의를 부르는 부메랑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 불확실성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북한 핵 혹은 북한 문제는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시아 전후 냉전체제의 이행의 구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대테러전쟁이라는 새로운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 이행의 복잡한 동학을 간과하고 '북핵'문제 혹은 '북한문제'를 고립적으로 사고하고 집착해서는 좌표를 잃을 수 있다.

최근의 상황은 미국의 대북정책의 타깃이 북한일 뿐만 아니라 남한일 수 있다는 서동만 교수의 지적을 되새기게 한다. 미국은 북의 핵폐기뿐만 아니라 통일국가로까지 이어질 군사동맹의 영속화를 추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진행되는 남한에서의 한미동맹 재편은 동북아 전체의 판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북핵 문제 해결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이 점에서 '동맹'과 '패권'에의 편승이 가져올 연쇄적이고 장기지속적인 부작용에 주목해야 한다. 미래 동북아에서 과연 '군사동맹'이 건설적인 틀인지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하다.

남한 시민사회와 국가에게 필요한 것은 지역평화체제를 주도할 일관된 민주주의 평화 역량이다. 우리의 선택방향이 얼마나 '독립적이고 민주적'인가, '문제해결 지향적인가', '평화지향적'인가를 점검하는 것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II. 지난 5년 - 대테러전쟁과 민주주의의 충돌

노무현 정부는 대테러전쟁 정책에 편승하면서 이른바 '균형적 실용외교'라는 이름으로 이라크 파병 대신 북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전향적 접근을 대가로 제공받으려 시도했다.
노무현 정부는 대테러전쟁 정책에 편승하면서 이른바 '균형적 실용외교'라는 이름으로 이라크 파병 대신 북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전향적 접근을 대가로 제공받으려 시도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2007년 한반도 주변 정세에 조응하는 사회운동의 과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지난 수년간의 과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21세기 초 남한의 시민사회는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5년 전 이 땅에선 붉은 악마의 물결, 촛불집회의 열기, 그리고 한 비주류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참여정치의 폭발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2000년 낙선운동에서 2004년 탄핵반대 시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자발적 시민행동들은 87년 이래의 민주개혁 국면에서도 매우 독특한 현상이었다. 이 역동적 민주주의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형성된 민주화 동력과 6·15선언으로 마련된 한반도 해빙의 분위기가 연결된 시점에서 터져나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9·11 이후 미국이 선포한 이른바 대테러 전쟁은 한반도의 짧은 해빙국면을 다시 얼어붙게 했다. 미국은 '대테러전쟁'을 동북아에 대한 정치군사적 영향력의 재강화에 십분 활용했다. 대테러 공조와 반확산을 내세운 미국의 이해관계와 한반도 평화와 교류협력을 추구하는 한반도의 지향과의 상충은 보다 뚜렷해졌다.

초기의 마찰음은 격렬했다. 부시 미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선제공격 구상에 대한 반발에서 촛불집회, 이라크 파병반대 운동까지 남한 시민사회는 거의 본능적으로 '사그라드는 봄'을 되찾기 위해 행동했다. 6·15선언 전후의 대북포용정책은 2차 한반도 핵위기에도 93년 '불바다' 논란 당시의 사재기 열풍과 같은 '심리적 공황'의 재연을 막아주었다. 이는 놀라운 '불가역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테러 전쟁 이후 냉전시대에 형성된 안보집단, 극우적 대결적 가치관의 목소리는 명백히 강화되고 행동화됐다. 북미간 갈등이 군사적으로 첨예화되는 조건에서 한국정부의 선택폭은 줄어들었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보다 한 층 어려운 조건에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야 했지만 김대중 정부보다 더 미숙했다. 이러한 이중의 한계는 노무현 정부 대외정책의 혼선을 심화시켰다.

노무현 정부는 대테러전쟁 정책에 편승하면서 이른바 '균형적 실용외교'라는 이름으로 이라크 파병 대신 북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전향적 접근을 대가로 제공받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라크 점령정책과 대북 압박 정책은 미 부시행정부 대테러 전쟁 구상의 핵심적인 기둥으로서 '파병'의 대가로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곧 드러났다. 노무현 정부는 또 '협력적 자주국방'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고 동북아 허브기지를 제공하는 한편, 작전통제권 환수와 더불어 국방비 증액 등 군의 정예화를 추구했다.

이는 국내 보수세력으로부터 '반미좌파'라는 왜곡된 비난에 시달리면서도 종국에는 한반도에서 미국이 바라던 동맹재편의 모든 요구조건을 세계 어느 동맹국보다 가장 먼저,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는 결과로 드러났다. 노무현 정부는 '북핵의 평화적 해결과 대북교류협력의 병행추진'을 강조했지만 사실상 북핵우선 해결에 경도되었다. 그리고 북핵문제 우선해결을 위해 정부가 수용한 각종 정치군사적 대미협력과 군비증강은 역설적으로 대북포용정책 이행의 환경을 제약하고 옥죄어 갔다.

노무현 정부는 실용과 현실을 내세웠지만 결과적으로 현실의 바다 위를 좌표 없이 떠돌다 패권과 군사주의라는 암초에 좌초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외교는 도구주의와 예외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근시안의 외교였다. 북핵 해결을 말하면서도 세계의 핵, 특히 미국의 핵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예외주의,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이중기준, 동북아 균형자를 말하면서 미국의 동북아 허브기지를 제공하는 자기모순, 주변국의 군사력 형성은 위험하고 남한의 군사력 형성은 불가피하며 북의 미사일은 위협이 되어도 한국의 첨단군사력은 북을 위협할리 없다는 자의적 판단 등이 그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그릇된 현실주의와 특유의 공학적 접근은 대외정책결정의 비밀주의와 독단적 추진을 일상화했다. 이라크 파병, 전략적 유연성, 대북식량지원 중단, 한미FTA에 이르기까지 참여정부를 자임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중대한 전략적 선택'들은 하나 같이 민주적 의견 수렴과정과 절차적 정당성을 결하고 있다. 이같은 독단적인 정책 추진은 정책추진 결과 자체의 실패에 머무르지 않고, 2000년 전후 한국사회에 존재했던 역동적 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의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한미FTA는 그 결정판이다. 한미FTA에 이르러 노무현 정부의 독단적 외교는 더 이상 대외관계의 실패를 넘어 일상의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삶 전반에 대한 공격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노무현 정부에 와서 절차적 민주주가 나름대로 정착되고 있다는 주장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대테러 전쟁 시대에 한국은 물론 지구 전역에서 민주주의는 공격당하고 있다.

2004년 이후 한국사회의 참여민주주의적 역동성은 보수의 세력화만이 아니라 참여민주주의를 자처한 정부의 공격에 의해 극적으로 쇠퇴했다. 이것을 민주개혁 세력의 분열과 분화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본질은 민주주의의 빈곤, 민주개혁 내포의 빈곤, 한반도 비전의 빈곤이라고 말해야 옳다. 따라서 한계는 노무현 정부만이 아닌 시민사회 일반, 민주개혁 일반에도 존재한다.

분단냉전체제 아래서 성장한 시민사회의 민주주의 역량은 사회공공성과 연대성이라는 면에서는 아직 발육 부진 상태에 있었고 국익의 논리에 대해 민주주의를, 안보의 논리에 대해 평화를 일관되게 발전시켜나갈 뒷심을 가지지 못했다. 아직 우리의 민주주의 수준은 전 국토에 나부끼는 '베트남 처녀 사세요'라는 플래카드 만큼이나 일천한 게 사실이다.

대테러전쟁 시대의 '신자유주의와 군사주의의 세계화' 앞에서 민주주의 문제, 평화의 문제, 권리의 문제를 국지적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은 힘을 가질 수 없다. 협소한 국익의 경계를 넘어, 안보와 공포의 논리를 넘어 공공성과 평화를 위한 연대, 민주주의를 위한 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지난 수년에 걸쳐 지구적 수준의 저항은 '현실의 힘'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어 놓았다. 대 테러전쟁 선포 이후 노골화된 미국의 정치군사적 경제적 패권정책에 단호히 반대한 시민사회와 정부를 가진 나라의 민주주의는 이 기간 동안 역동적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우리에겐 없는 민주주의의 역동적 드라마가 그들 나라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부러워하게 되었다. 중동에서의 강력한 저항, 민주적 과정을 통한 남미 좌파 정부들의 등장, 미국 영국 등 유럽에서의 강력한 반전운동, 환경, 여성, 노동운동은 패권국가의 대외정책과 국제관계와 규범을 수정시키고 있다. 한국 정부의 외교는 이러한 동학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고, 우리 시민사회와 이들과의 연대는 여전히 불충분하다. 이는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우리 시야의 한계와 역량의 한계로도 작용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테러 전쟁은 냉전 해체로 이완된 세계를 새로운 '안보패러다임'을 통해 재편하고 지배하려는 의도로 고안됐으며, 이는 각 국가의 민주주의와 평화지향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둘째, 대테러 전쟁이 새로운 지배질서를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전 세계의 사회적 운동은 단순한 반전운동을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와 연대의 질서를 지향하고 있다.

셋째, 남한의 국가와 시민사회는 국가안보 혹은 국익으로 명명된 주제에 관한 한 자신의 민주적 선택에 대한 자신감이 현저히 부족한 기형적인 저성장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이는 모든 나라에 일반적이지만 특히 남한은 냉전과 분단의 후과가 크다. 넷째, '안보'에 취약한 이러한 발육부진은 남한의 민주발전에 중대한 병목 지점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와 주변국, 예컨대 이라크와 이란,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 매우 공격적인 결과마저도 초래하고 있다. 다섯째, 특히 남한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저성장은 북의 군사주의, 미국의 패권주의와 더불어 한반도 분단극복 과정을 매우 비극적인 과정으로 인도할 수 있다.

III. 2007년 사회운동 : 공공성과 평화를 위한 연대

김선혁 박사의 주장대로 문제는 역시 민주주의다. '민주파의 정치세력화'도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민주파의 정치세력화를 말하기 전에 시민사회 내에서 민주주의와 평화국가를 향한 지향과 운동의 형성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본다. 사회적 지향과 비전, 구체적 요구와 운동의 형성이 전제될 때 민주파의 결집도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대 테러 전쟁 이후 한국 시민사회의 취약고리인 국익과 안보의 물신화가 더욱 부추겨지는 조건에서 이에 대한 응전을 지식사회와 삶의 현장에서 본격화해야 한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의 주도성이다.

한국사회의 어떤 정치인과 정치 정당도, 어떤 정권도 모두 다 민주주의, 복지, 평화를 말한다. 한미FTA를 추진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사회복지와 양극화 해소를 말하고, 한나라당이 평화를 말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국익, 성장, 안보라는 공유된 인식의 틀, 게임의 공식을 공유하고 있다. 게다가 이 나라의 관료들은 위임받지 않은 범위에 대해 설계자임을 자처하고 그것을 비밀스럽게 추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라고 속단한다.

사회운동의 이의 제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국익과 공공의 이익을 분리하여 과연 누구를 위한 어떤 이익인지 더욱 촘촘하게 따져야 한다. 국익과 위협 해석에 대한 국가안보 엘리트들의 독점에 도전하여 공동체의 안전, 이익, 평화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시민이 주도하여 마련해야 한다. 시장과 패권에 대해 맹목적 추종에 제동을 걸고 민주적 절차의 보완과 사회통합의 대안에 대한 논의를 더욱 본격화해야 한다. 60년 분단체제, 20년 민주화 국면이 넘어서지 못한 성역을 향해, 내외의 장애물들을 넘어 민주주의 운동은 확대되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다방면의 노력을 전제로 2007년 집중해야 할 연대의 과제를 꼽는다면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한미FTA의 저지, 둘째 한반도 평화체제 형성이다.

한미FTA는 내용도 문제이지만 추진 과정과 방식 그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졸속적인 한미FTA 추진을 강행하면서 사회양극화 해소, 사회투자, 참여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 맹목의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특히 정부가 이른바 '빅딜'을 통해서 무리한 최종타결을 시도할 경우, 각계각층의 거국적인 반대 운동을 통해 이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한미FTA는 국익과 시장의 이름으로 진행될 장기 지속적이고 전방위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의 신호탄이다. 한미FTA 저지운동은 특정 사안에 대한 반대운동을 넘어 남한이 사회경제적 발전방향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토론과 연결되어야 하며 연결될 수밖에 없다. 혹여 민주파의 정치세력화가 가능하다면 이에 대한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통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6자 회담은 여전히 냉탕과 온탕을 오갈 수 있지만 더 이상 한반도 주민들의 평화지향이 여기에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 5년간의 후퇴와 답보, 새로운 군사동맹 질서로의 편입을 반복할 수 없다. 한반도 평화체제 형성을 요구하고, 평화국가로의 지향과 선택을 분명히 하는 시민주도의 운동이 필요하다. 화해협력 인도지원정책의 일관된 추진을 옹호하고, 한미 동맹의 공격적 재편에 반대하여 한반도 전체의 비핵군축을 추구하며, 지구적 범위의 대테러 전쟁 협력에 거부하는 시민의 의지가 행동화되어야 한다.

이라크파병반대국민행동의 김광일씨는 미국 중간선거에서 반전운동진영이 전개한 'Vote for Peace' 운동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남한 정치 현실에서 동일한 운동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자구적 운동으로서 일종의 'Act for Peace'는 실현가능한 연대운동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단, 이 시도가 민족공조운동, 자주운동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평화국가로 나아가는 시민사회의 시야는 남한 내부에 머물러서도 안되지만 민족이라는 배타적 인식의 틀에 긴박되어서도 안 된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동북아 정부들의 군사주의와 국가적 접근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민의 평화선언, 국경을 초월한 평화 호소일 때 이 운동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코리아연구원(www.knsi.org)은 연구자, 정책전문가, NGO 활동가 등을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형 민간 싱크탱크'로 외교안보 및 양극화 관련 정책대안 및 국가전략 제시를 목적으로 연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반전운동#평화#대테러전쟁#안보#국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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