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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그림 1> ⓒ 김종성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좌어(坐御)하였는데, 당나라에 청병한 일에 대해 통보가 없음을 걱정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김춘추는 당나라의 파병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으며 당나라에서 아무 회답도 보내 주지 않자 근심하는 빛이 역력했음을 알 수 있다. 사관(史官)이 왕의 기분을 역사에 기록할 정도였으니, 이때 김춘추가 얼마나 초조해 하고 있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닦은 군"라느니 "웅변과 외교술에 능란한 군주"라느니 하는 기존의 역사적 평가를 무색케 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정권의 안보를 지키기에도 급급한 무기력한 김춘추의 모습일 뿐이다.

굳이 신라측이 협공을 요청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당나라에서는 고구려 협공을 위해서라도 신라와 연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당나라 군주인 고종은 아버지 태종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지 신라와 연합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외교적 능력의 발휘 여하에 따라서는 당나라에게 얼마든지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신라왕인 김춘추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으니, 나당연합이 상호 대등하게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 결과는 나당연합군의 불평등한 지휘체계로 나타나게 되었다.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킬 당시의 나당연합군의 지휘체계를 신라본기 5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2> 및 <그림 3>의 줄 친 부분이다. 글자 몇 개가 잘 나타나지 않은 데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그림 2>
<그림 2> ⓒ 김종성
<그림 3>
<그림 3> ⓒ 김종성
"3월에 당나라 고종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륙(水陸) 13만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는 동시에, 왕(김춘추)을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응원하게 하였다."

이에 의하면, 나당연합군의 최고통수권은 당나라 고종이 보유하고 있다. 그 아래에 대총관 소정방과 부대총관 김인문이 있었으며, 신라왕 김춘추는 응원군 사령관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전작권을 당나라측이 갖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신라왕 김춘추가 드러내놓고 당나라 원군을 학수고대하는 상황 속에서 신라가 당나라의 하위에 놓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당나라는 신라의 도움을 꼭 필요로 했고 또 전장(戰場)이 당나라보다는 신라와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외교적 능력의 발휘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대등한 혹은 우월한 지휘체계를 관철시킬 수 있었겠지만, 초조하고 불안에 떠는 김춘추는 그런 조건을 유리하게 활용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굴욕적인 지휘체계를 받아들였기에, 이후 신라는 한동안 계속해서 당나라에 끌려다니고 말았다. 신라가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에 당나라는 백제 고토에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고토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는 등, 당초의 약속을 깨고 영토적 야심을 노골적으로 내보였던 것이다. 심지어 당나라는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함으로써 신라까지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결국 신라는 백제·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다시 당나라를 상대로 수년 간 싸움을 벌인 끝에 676년에 이르러서야 대동강 이남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733년에 가서야 비로소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이 신라 영토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신라를 끌여들여 발해의 위협에 공동 대처하기 위하여 신라에게 '선심'을 베풀었던 것이다.

신라 김춘추가 외세를 끌어들이고 또 외세에게 군대 통수권까지 내어주었기 때문에 그 후의 신라인들은 당나라와 새로운 전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 전쟁의 결과로 고구려 고토의 극히 일부밖에 차지하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영토마저 빼앗길 위험을 겪기도 하였다. 내주지 말아야 할 것을 쉽사리 내주었기 때문에 이후 신라는 70년 넘게 당나라와 길고 긴 '2라운드'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치 이승만이 내주지 말아야 할 작전지휘권을 미국측에 쉽사리 내준 일 때문에 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이 전작권 논란을 겪고 있는 것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세에게 굴종하는 군주들은 흔히 종사의 안녕이나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한번 외세에게 굴종하면 그 후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그 뒤처리를 하느라 훨씬 더 많은 국력을 소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실익을 따지자면, 잠깐의 안녕을 위해 외세에게 굴종하는 일이 장기적으로 보면 더 큰 손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솔직히 말해서 김춘추는 백성의 안녕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라 정권 상실의 두려움 때문에 당나라에게 의지하고 또 당나라에게 전작권까지 내준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에 걱정하는 빛이 나타났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라는 칭찬은 그야말로 과찬이다.

일부 사람들은 백성의 안녕을 위해 외세에 굴종하는 지도자들을 높이 평가하지만, 실제로 그런 지도자들은 나라가 아닌 자신 혹은 정권의 안전을 먼저 걱정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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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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