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베이의 아침은 너무나 잔잔하고 평온했다. 코레히도르 섬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 페리호에는 주말이라 그런지 꽤 분주했다.
나는 지금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였던 코레히도르 섬을 향해 떠나고 있다. 12월 초, 이곳 하늘은 우리나라의 가을하늘처럼 높고 맑았다. 배 안에서는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노병이 생생한 현장을 설명하면서 역사적 현장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BRI@1시간 반 만에 도착한 코레히도르 섬. 섬에 내리자마자 내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바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었다. 어릴 적 6·25전쟁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나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에 남다른 관심이 갔다.
1942년 일본군이 이곳을 맹렬히 공격할 당시, 맥아더는 호주로 떠나면서 '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I shall return)'라며 이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말한대로 일본군에게 빼앗긴 이 섬을 1945년에 다시 탈환하고, 마닐라 만을 장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고 삼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작전사령부로 활용했던 지하터널과 각종 건물들이 폐허가 된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불과 6km 거리에는 바탄반도가 머리를 내밀고 있고 당시의 참혹했던 현장이라도 말해주듯 흰 구름이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만약에 맥아더가 이 섬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나는 문득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보면서 맥아더 동상 철거와 관련된 세간의 역사인식의 혼돈을 보면서 역사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
1942년 이 섬 건너편에 있는 바탄반도가 일본군에 함락되자 맥아더는 호주로 피신하였다. 맥아더 장군에 이어 이 섬을 사수하던 연합군 측 총지휘관 웨인라이트 중장이 필리핀 전역의 연합군에게 항복 명령을 내림으로써 5개월에 걸친 마닐라 만 공방전은 끝을 맺었다.
그 후 이 섬은 일본군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유엔군에 의해 1945년 완전 탈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천연의 요새지로 비운을 함께 간직한 이 섬은 참혹한 당시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이곳에는 전쟁 당시에 유엔군 작전본부와 병원 등으로 사용했던 말린타 터널(Malinta Tunnel)이 있다. 길이 50m, 넓이 7m의 터널로 원래 병기고로 쓸 계획이었지만 언덕 아래에 있고 폭격을 피하기에 적당하여 군사령부로 사용하였다.
한때 필리핀 대통령이 사용한 적도 있다고 한다. 현재 필리핀의 저명한 영화감독이 고안하였다는 '빛과 소리'라는 주제의, 전쟁 당시의 모습을 재연한 영상 쇼를 볼 수 있어 이색적이었다.
1968년에 건립했다는 태평양전쟁기념관도 있어 필리핀은 이곳을 성지로 개발하고 있다. 전쟁으로 무수히 죽어간 병사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진혼비(鎭魂碑)도 세워져 있었으며 해마다 후손들이 이곳을 찾아 그들을 위로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 유엔군은 물론 일본군의 친혼비도 함께 세워져 있어 깜짝 놀랐다. 만약 맥아더가 살아있었다면 이 사실을 허락했을까. 적과 동침을 허락해 버린 역사의 아이러니를 새삼 느끼게 하였다.
진혼비가 세워진 언덕에서 아스라이 보이는 '드럼요새'지는 한 척의 작은 군함이 떠있는 것 같이 보였다. 당시의 참혹한 전쟁사를 잊은 듯 평상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코레히도르(Corregidor)는 스페인 말로 엄격하게 심사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마닐라 항구를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되는 관문으로 스페인이 점령 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마닐라에서 서쪽으로 45Km, 바탄반도에서 6Km 떨어진 마닐라 만에 있는 작은 섬. 꼭 올챙이 같이 생긴 천연의 요새지로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마닐나 만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 섬을 빼앗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마닐라 만에서 1시간 반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매일 아침 8시에 출발하여 오후 3시 45분에 도착하는 당일 코스 관광 일정도 있고 하룻밤을 자고 오는 일정도 있다.
당일 코스에 들어가는 비용은 점심식사를 포함하여 3-4만원 정도면 충분하다. 이 섬은 주민이 살지 않으며 민간 기업이 개발한 리조트, 호텔이 있으며 청소년들의 역사공부와 수련을 위한 시설도 있어 인기가 높다.
나는 2차 대전의 현장과 세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당시 일본의 야망을 보면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움을 느꼈다. 최근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현 시점에서 일본의 또 다른 야망의 싹을 자르는 길은 우리의 국방력을 키우는 길 밖에는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인식하는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