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한 나라의 지폐를 만들면서 만든 사람은 그림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과학 부총리라는 사람은 이런 그림을 두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또 이 돈을 바꾸려고 며칠 밤을 새우고…."
최근 새 지폐 도안을 두고 한 네티즌이 올린 글이다. 지난 22일 새롭게 선보인 새 천원, 만원짜리 돈에 들어간 그림을 둘러싼 논란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확산되고 있다.
특히 한국은행은 지폐 발행과정에서 문화재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도 제대로 하지 않은채 도안 작업을 추진하거나 국민 여론 수렴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한 나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지폐 발행과정이 사실상 관(官)주도로, 패쇄적으로 운영되면서 총체적인 부실을 낳았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한은의 화폐 발행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와 함께 제도적인 개선도 요구된다.
새 지폐에 들어간 그림 모두 부적절 논란 휘말려
@BRI@지난해 1월부터 올초까지 한국은행이 내놓은 새 지폐는 모두 3종. 천원권과 오천원권 그리고 만원권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이 일고 있는 돈은 만원짜리다. 우선 지난 22일 새 돈이 나오자마자 뒷면의 천문 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가 논란이 됐다. '혼천의' 자체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를 통해 만든 시계가 '혼천시계'다. 혼천시계는 국보230호로 지정돼 있다.
한은은 "혼천시계가 국보라면 그 일부도 국보 아닌가"라며 별 문제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화폐의 상징성을 감안할 때 혼천의보다 혼천시계를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다.
앞면에 실린 일월오봉도 그림도 논란이 됐다. 일월오봉도는 해와 달, 5개의 산봉우리가 있는 그림이다. 한은쪽은 발행 당시 "세종대왕의 뒷 배경으로 조선시대 궁중행사에서 사용했던 일월오봉도 병풍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학계에선 일월오봉도가 조선초의 세종대왕 때와는 무관한 조선후기 때 사용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박사는 "일월오봉도는 17~18세기인 조선 후기 때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세종대왕과는 관련 없다"고 말했다. 이같은 사실은 조선시대 궁중그림 연구서인 '조선시대 어진관계 도감의 궤 연구'라는 책에도 나와 있다. 이 책에도 일월오봉도는 1688년에 사용했다고 쓰여있다.
우왕좌왕 한은, 뒤늦게 학계에서 검증하라?
천원짜리는 뒷면에 실린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그림이 도마 위에 올랐다. 논란의 핵심은 이 그림 속의 정자가 '도산서당'인지, '계상서당'인지다. 한은쪽은 작년 1월에 '도산서당'이라고 밝혔다가, 최근 새 화폐를 소개하는 책자에는 '계상서당'으로 슬쩍 바꿨다.
물론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한 네티즌이 인터넷을 통해 두 서당이 세워진 연대기가 서로 맞지 않다는 지적을 하자 한은쪽에서 수정한 것이다. 그러자 도산서원관리사무소쪽에서 2일 공식적으로 그림속의 주변 지형을 감안할 때 계상서당이라기보다는 도산서당이 맞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은 관계자는 "천원권 뒷면 그림속의 서당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도산서당과 계상서당의 세워진 시기가 다른것도 맞고, 도산서원쪽 말도 일리가 있는 만큼 학계에서 고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스스로 한 나라 지폐에 들어가는 도안이 어떤 그림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넣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 된 것이다. 김완 문화연대 활동가는 "사전에 철저하게 전문가의 검증을 거쳐서 발행해야 할 화폐 그림을 두고, 논란이 되니까 나중에 학계가 알아서 고증하라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작년에는 오천원권 지폐에 실린 신사임당의 그림이 논란이 됐었다. 그림 내용 가운데 수박모양의 과일이 아프리카에서 온 외래산 수박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한은이 새롭게 선보인 지폐 3종에 들어간 도안 모두가 부적절 논란이 휘말린 것이다.
화폐발행과정 총체적 부실... 시스템 전면 재검토해야
새 지폐 도안 논란이 확산됨에 따라 한은의 화폐 발행과정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중요 문화재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제대로 된 검증 절차와 함께 국민여론도 수렴 과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한은쪽에선 화폐 발행과정에서 국민의 여론 수렴을 제대로 하지 않고 과거와 같은 관 주도의 패쇄적인 형태로 지폐 발행을 운영해 왔다는 지적 때문이다.
한은의 지폐 발행과정은 크게 다섯 단계를 거친다. 지폐 발행결정을 내리면 정부의 승인을 거친다. 그리고 한은 내 화폐도안자문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고 도안을 공개한다. 이후 새 지폐를 발행한다.
작년 1월 새롭게 나온 오천원권의 경우, 두달 전인 2005년 11월에 화폐 도안을 공개했다. 두달 동안 제대로 된 국민여론을 묻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현행 발권시행규칙을 보면, 새지폐를 발행할 경우 호칭·크기·모양 등을 관보 또는 일간신문과 각 금융기관의 영업점에 게시하기로 돼 있다.
한국은행이 새 천원과 만원권을 관보에 화폐발행 공고를 낸 것은 올 1월15일이었다. 그리고 일주일후인 22일 발행했다. 오천원권도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형식적으로 알릴 뿐이지, 새 지폐에 대해 별도의 여론 수렴 절차가 없는 것이다.
현행 화폐도안자문위원회의 구성도 마찬가지다. 15명의 자문위원 가운데 미술사(美術史)를 전공한 위원은 단 한명뿐이다. 과학사나 문화재와 관련된 인사들은 포함돼 있지도 않다. 따라서 지폐 도안에 들어가는 주요한 문화재나 역사적 의미 등을 제대로 검증하기란 당초부터 어려운 구조를 갖춘 셈이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화폐 도안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한은의 화폐발행과정에 총체적 부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면서 "한은 스스로 국민의 문화에 대한 의식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황 위원장은 이어 "이번 기회를 통해 한은 내부의 형식적인 위원회 구성과 불투명한 운영 방식 등 제도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