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힐은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 장관의 지침을 받아 움직이고 있다. 힐은 (부시로부터) '당신이 할 수 있다면, 북핵 문제를 풀어보라'는 말을 들었다."
미국의 시사잡지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최근호가 국무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대목이다. 이 잡지는 부시 대통령이 힐 국무부 차관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며, 최근 워싱턴에는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새로운 기류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BRI@특히 지난달 중순에 있었던 베를린 북미 양자회담은 이러한 변화된 기류의 반영이라고 강조했다. 부시 행정부가 줄곧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거부했다가, 베를린 회담을 수용한 것 자체가 강경파의 퇴조와 협상파의 부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도를 뒷받침하듯, 힐은 최근 "진전을 이룰 기반 있다는 믿음 갖고 있다"고 말했다. 2002년 10월 우라늄 농축 문제를 둘러싸고 북미간의 충돌이 발생한 이후, 미국 협상 대표가 이러한 낙관론을 펼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처럼 힐이 자신감을 피력한 배경에는 대북강경파의 퇴조 속에 부시 대통령의 신임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길목마다 딴지를 걸었던 강경파의 견제를 뚫고 대통령으로부터 협상 권한을 위임받아 '이제 협상다운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무대 뒤로 사라지는 '네오콘'
실제로 대북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네오콘의 퇴조가 눈에 띈다. 네오콘의 핵심적인 이론가인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은 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세계은행으로 자리를 옮겼고, 도날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작년 11월 중간선거 참패 직후 해임되었다.
또한 대표적인 대북강경파이자 강경한 대북 유엔안보리 결의안 채택을 주도한 존 볼튼 유엔 대사도 사임했고, 대북 금융제재를 포함한 '맞춤형 봉쇄'의 창안자로 알려진 로버트 조지프 국무부 차관도 사임했다.
딕 체니 부통령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우군을 잃은 그가 예전만큼 대북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그는 CIA 정보원의 신분을 유출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리크게이트'와 핼리버튼을 비롯한 이라크 재건 사업체들의 비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이들 문제에 대한 재판과 의회 청문회가 본격화되면, 체니는 부통령 임기를 제대로 마칠지도 불투명한 신세에 직면할 수도 있다.
물론 대북강경파의 정점에는 최고정책결정자인 부시 대통령이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기독교 근본주의와 미국 우월주의로 무장한 부시에게 김정일 정권인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최근 부시는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삼가고 있다.
지난달 연두교서에서도 "한반도 비핵화 외교에 주력하고 있다"는 짤막한 발언이 있었을 뿐이다. 워낙 이라크 상황이 어렵고 북핵 문제가 우선순위에서 밀린 탓도 있지만, 북한이 작년 7월 미사일과 10월 핵 실험을 강행했던 점을 떠올리면, 부시의 대북 인식과 정책에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가능케 한다.
한반도, 기회는 오고 있다
흔히 한반도 정세를 두고 '예측불허'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최근 2년간의 시간은 그야말로 '위기와 기회의 변증법' 그 자체였다. 2005년 2월 북한의 핵보유 선언, 부시의 유엔 안보리 회부 방침, 북한 핵실험설, 미국의 영변폭격설이 잇따라 나오면서 '6월 위기설'이 팽배했었다.
그러나 2005년 5월 들어 남북관계가 회복되고, 북미 양자 접촉이 재개되면서 위기는 대화 국면으로 반전되었다. 그리고 그 해 7월말부터 재개된 4차 6자회담에서는 2개월 가까운 협상 끝에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다시 낙관론이 팽배해졌다.
그러나 9.19 공동성명 채택을 전후해 미국이 대북금융 제재를 가하고 북한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또한 9.19 공동성명에서 '미래의 문제'로 넘긴 경수로를 둘러싼 북미 양측의 갈등이 재발되면서 공동성명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휴지조각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작년에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및 핵실험, 그리고 이에 대한 미국, 일본 주도의 대북 제재와 봉쇄가 기승을 부리면서, 한반도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의도 한켠에는 6자회담 복귀 명분을 스스로 만들겠다는 것이 깔려 있었다. 부시 행정부 역시 11월 중간선거 참패하고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요구하는 미국 안팎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또한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갈수록 버거워지는 상황에서, 북한과의 협상을 마냥 거부하기도 힘들어졌다.
역설적으로 작년 하반기 한반도를 강타한 위기는 또 다른 기회를 잉태한 '창조적 파괴'였던 셈이다.
물론 아직 낙관은 금물이다. 아직 금융제재 문제가 풀린 것도 아니고, 북핵 문제는 정치적 문제 못지 않게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복잡한 사안이다. 또한 북한이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우를 범할 수도 있고, "악행을 보상하지 않겠다"던 부시 행정부가 북한 핵포기에 대한 상응조치를 어느 정도 취할 지도 불확실하다.
무엇보다도 숨죽인 미국 강경파들이 또 다시 판을 깨려고 할 수도 있다. 9.19 공동성명 채택을 전후해 미국 강경파의 반격이 본격화되었듯이, 이번 6자회담에서 이행 합의가 나오면 미국 강경파들은 또 다시 꼬투리를 잡고 늘어질 것이다.
또한 한국은 대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대외정책 추진력과 연속성의 문제가 불거질 수 있고, 일본인 납치 문제를 앞세운 일본의 훼방놓기도 만만치 않다.
전화위복의 서막은 오를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고도 어렵게 조성되고 있는 기회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만약 북미 양측이 대타협에 이른다면, 이는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질서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부시의 대북강경책 및 북한의 핵개발로 조성된 위기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역설적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시 행정부 임기 내에 문제 해결의 길목에 들어선다면,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부시 행정부 임기 내에 북한과 합의에 도달한다면,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가 이에 제동을 걸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를 되돌리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1994년 제네바 합의 직후 공화당이 상하원을 장악하면서 이 합의 이행에 제동을 걸었다. 2000년 북미공동코뮤니케 직후 실시된 대선에서 부시가 당선되면서, 북미관계는 다시 적대 관계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사례가 재발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낮다.
북한이 주목해야 할 미국의 정치환경의 변화는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북한이 부시 행정부가 궁지에 몰렸다고 판단해 핵포기 조치에는 극히 인색한 반면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면, 모처럼 조성되고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릴 수도 있다. 미국 강경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대북정책과 관련해 지난 6년간 부시 행정부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면, '북한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믿음의 허구성이다. 마찬가지로 북한도 부시 행정부가 힘이 빠져 있고 중동에 정신이 팔려 있다고 해서 미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지금은 크게 주고 크게 받겠다는 '통큰 외교'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