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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제2대 황제 양광(楊廣, 569~618년, 재위 604~618년)의 시호인 양제(煬帝)는 '불길이 세다'를 뜻하는 양(煬)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의 생애는 불(火)보다는 물(水)과 더 밀접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물로 흥하고 물로 망한 군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양제가 물로 흥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중국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대운하 건설을 벌였기 때문이다. 남북조(南北朝)의 분열을 통일한 수나라의 제2대 황제인 그는 산양독(山陽瀆)·통제거(通濟渠)·영제거(永濟渠)·강남하(江南河) 등을 차례로 개수(改修)하거나 개착(開鑿)하였다. 당시의 연호인 대업(大業)처럼, 이 같은 대규모 공사 덕분에 중국의 남과 북은 대운하를 통해 상호 연결될 수 있었다.
한편, 수양제가 물로 망했다고 하는 것은 그의 30만 별동대가 고구려 살수(薩水)에서 수장(水葬)되는 대패배를 계기로 수나라의 통치질서 전반이 와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북조시대의 진(陳)나라나 돌궐·토욕혼 등에 대해서는 군사적 자신감을 가졌던 수양제는 살수(薩水)와 고구려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수나라를 단 2대만에 '요절'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신은 진시황과 함께 대표적인 폭군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에게는 '자기도취에 탐닉한 폭군'이라는 부정적 평가와 함께 '대운하 건설로 중국의 국가통합과 국민경제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따라다니고 있다. 그가 대운하 건설로 민생을 피폐시킨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 대운하 자체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그 대운하의 혜택을 입고 있는 후세 즉 오늘날 중국 '국민'들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수양제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그 평가의 기준을 곰곰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만남이기 때문에, 역사적 평가를 할 때에는 현대의 가치관과 당대(當代)의 가치관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현대의 가치관을 고려하지 않는 역사적 평가는 현대에 아무런 교훈을 줄 수 없고, 현대의 가치관만으로 과거를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의적 폭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수나라 당시의 가치관과 현대의 가치관에 따라 각각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수양제는 중국에서 어떤 인물인가
수나라는 전근대(前近代) 시대의 국가였다.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여럿 있겠지만, 국가 주권의 소재(所在)를 기준으로 하면 전근대는 왕조국가(dynasty state) 시대, 근대는 국민국가(nation state)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근대의 가치관에서는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이 어떻게 평가될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누구를 위한 대운하 건설이었을까?
전근대의 왕조국가 시대에는 국가를 위하는 것이 좁게는 '왕실을 위하는 것'이고 넓게는 '왕실을 포함하여 사(士) 계급까지 위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전근대에는 여론이나 공론의 형성 주체도 기본적으로 사 계급까지로 한정되었다. 오늘날처럼 길거리에서 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양상을 전근대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중국 신(新)나라의 왕망(王莽)이나 고려시대의 신돈(辛旽)처럼 전근대의 역사적 인물들이 일반 민중의 편에 섰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전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전근대 국가에서는 왕실을 위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일인데, 왕실을 제쳐두고 일반 서민만을 위한다면 그것은 국가질서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근대 국가에서 벌이는 국책사업은 기본적으로 왕실을 위한 것이라는 한계를 띨 수밖에 없었다. 수양제가 대운하 건설을 추진한 기본적인 동기도 바로 거기서 찾아볼 수 있다. 보다 넓은 범위에서 물자와 인력을 확보하여 왕실을 튼튼히 하는 것이 당시 관념에서는 국가를 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치관 하에서는 왕실이 우선적으로 고려되기 때문에, 일반 민중이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인해 경제적 피폐를 입을 것이라는 점은 그야말로 부차적인 고려 대상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인체 각 부위에 영양분이 골고루 공급되든 말든, 두뇌(지배층)로 영양분이 공급되는 것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은 인체 특정 부위(주로 강남지방)의 영양분을 가급적 두뇌로 집중시키기 위하여 대(大)혈관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그것을 두뇌에 연결시키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수양제 시대의 가치관 하에서는 대운하 건설이 국민을 위한 게 아니라 일차적으로 왕실을 위하고 이차적으로 지배층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봉건적 수탈의 강화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이 중국의 국가통합과 국민경제에 기여했다는 평가는 다분히 현대적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은 오늘날 대운하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중국 국민들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아직 국민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전근대의 사건을 대상으로 그것이 국민경제에 이바지했다고 하는 식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순전히 근대적인 혹은 현대적인 접근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왕조국가 시대와 달리, 오늘날의 국민국가 시대에는 ‘국가를 위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국민을 위하는 것’으로 통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정치인을 평가하는 기준도 전근대와 다르다. 과거처럼 최고지도자에게만 충성하는 정치인은 오늘날에는 배척을 당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국민을 운운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적 가치관에 따라 수양제의 대토목 사업을 평가하면, 그가 대토목 사업을 벌여 민중을 고달프게 한 것은 나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국가통합과 국민경제에 기여했으므로 그 점만큼은 좋은 일이라는 평가를 하게 된다.
위와 같이 어떤 가치관을 대입하느냐에 따라,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은 여러 가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 인류사회의 가치관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 현대의 가치관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종래에는 지배층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를 위하는 것을 훌륭한 일로 보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훌륭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지배층만을 위하건 국민 전체를 위하건 간에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위한다는 범주에 국한된다. 다분히 인간 이기주의를 저변에 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단지 국민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존재'까지 고려하여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동식물까지 포함하여 환경을 생각하는 국가정책을 점차 선호하고 있다.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인간만을 위하는 것은 더 이상 인간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관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 고속철도 KTX가 연약한 스님 한분 때문에 일부 구간 공사가 '지연'된 사건은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그것은 국가공권력이 일 개인에 의해서 막힌 게 아니라, 인간만을 고려하던 종래의 가치관이 인간뿐만 아니라 환경까지 고려하는 새로운 가치관 앞에서 막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그 사건을 두고 "국민을 위하는 길인데 왜 저렇게 방해를 하는 것일까?"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이 국민 즉 인간만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환경까지도 정치적 공동체의 일부라는 새로운 시각을 갖지 못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이러한 새로운 가치관에 따라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을 재평가하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은 당시 민중들의 고혈을 빨아낸 봉건적 수탈인 동시에 중국의 통합과 국민경제에 초석을 놓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한 별다른 고려 없이 환경을 파괴한 일이 된다.
"환경 생각 않는 지도자, 수양제처럼 될 것"
전근대의 가치관과 현대(지나가고 있는)의 가치관 그리고 새로운(다가오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대운하 건설은 위와 같이 여러 가지로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과거 군주들의 대토목 사업을 평가함에 있어서 이러한 새로운 가치관을 반영한다면, 국가가 인간만을 위한 무분별한 환경파괴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도 정치공동체의 주권자이며 수혜자라는 사고가 인류의 보편적 지지를 얻을 때에만, 인류와 인류 이외의 모든 생명이 공존하는 세상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및 미래의 정치인들은 대토목 사업 같은 장밋빛 구호로 국민 즉 인간만의 환심을 사려 할 것이 아니라, 인간과 환경을 일체로 하는 새로운 친환경적 사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앞으로는 듣는 인간 유권자뿐만 아니라 '듣지 못하는' 환경 유권자까지 고려하는 선거 캠페인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지도자는 수양제처럼 결국 물로 시작해서 물로 망하는 지도자, 개발로 시작해서 개발로 망하는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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