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5일에서 28일까지 열린 세계 최대의 만화도서전인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이 자리에 프랑스 카스터만 출판사의 콜렉션 중 하나인 ‘한국’(hanguk)전에 초청된 장경섭 작가는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출판사가 “단지 만화적인 측면에서의 애정이 아닌 한국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둔 콘퍼런스를 벌였기 때문”이다.
기자들을 부른 자리에서 출판사는 한국의 역사, 분단 등에 대해 언급하며 ‘한국의 문화에 기반한 만화’를 총체적으로 알려나가고 있었다. ‘한국’ 콜렉션에 대한 왕성한 의욕을 보이고 있는 이 출판사는 이미 나온 최규석이나 변기현 그리고 강풀, 이희재 뿐 아니라 곧 석정현, 강도하, 박흥용 등의 작품을 잇따라 선보일 예정이다.
전세계 도서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유럽의 독자들이 한국의 만화를 주목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만화’를 한국만화의 고유한 브랜드로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만화만의 글과 그림에 탄복한다. 올해 앙굴렘 전시장을 처음 방문한 부천만화정보센터의 관계자는 “축제에 참가한 누구나 만화와 망가를 구분하고 있어 놀라웠다”며 “판넬 하나하나의 글자까지 모두 읽는 그들을 보면서 내용에 보다 깊이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만화산업을 영위하는 사업체의 수출액은 전년도 190만9000달러에서 약 71% 증가한 326만8000달러로 조사됐다. 또 최근 2년간 대원씨아이와 서울문화사, 학산문화사 등 모두 각 100작품 이상의 작품들을 수출한 것으로 조사됐으며, 그외 신원에이전시, 오렌지에이전시 등 만화수출전문 에이전시를 통해 나간 작품들 역시 30작품에 달한다. 이 중 유럽은 북미, 동남아에 이어 세 번째인, 약 41만 3천 달러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를 시작으로 해외에 소개되기 시작한 만화는 2000년대에 들어 세계 주류만화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2003년 1월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의 한국 주빈국 전시가 그 기폭제였다.
약 10억 원을 들인 주빈국 전시는 인지도와 신뢰도 제고를 통해 세계시장에서의 만화의 점유율을 높이자는 취지에 부합, 이미 십여 년전부터 유럽에 진출해 있던 ‘망가와 구별되는 새로운 콘텐츠와 트렌드’로서 만화를 띄우는 데 성공했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김진규 산업진흥본부장은 “만화 브랜드를 통해 각국의 만화독자들에게 아시아만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인지시켜 궁극적으로 만화 브랜드와 망가 브랜드의 경쟁을 통해 세계만화시장에서 아시아만화에 대한 수요와 파이를 키운다는 측면에서 의미있는 행사였다”며 “이 행사로 유럽에서 모든 아시아만화는 ‘망가’로 통했던 과거 모습에서 탈피하게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듬해인 2004년부터는 빠르게 증가한 유럽과 미국 만화팬들을 위한 B2C 프로모션 사업이 정부 차원에서 시작됐다. 그 즈음 진흥원은 ‘한국만화 로드쇼’ 사업을 통해 2004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프랑스 파리와 리옹, 니스, 미국 샌디에고와 LA 등 6개 도시를 순회하며 한국 만화작가들과 현지의 만화 팬들이 직접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팬미팅과 팬사인회 등을 개최했다.
해를 거듭하는 가운데 신대륙 유럽에 우리 만화가 계속적으로 알려졌고, 2만 부에 가까운 판매고를 기록한 <천추>로 대변되는 장르만화는 물론 한국적 작가주의 만화 등이 유럽 만화의 주요한 흐름으로 떠올랐다. 이 가운데 ‘한국식’ 작가주의 만화는 만화 브랜드의 독특한 현상으로 주목되며, 이 흐름의 대표 주자로는 김동화가 손꼽힌다.
스위스 불어권 출판사인 파케에 의해 출간된 김동화의 <빨간 자전거>는 유럽인들에게 한국 작가주의 만화를 강하게 인식시켰다. 프랑스 평단에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근사한 선물”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은 프랑스 만화 비평 협회가 선정하는 2005년 비평 대상의 최종 후보작 5편에 오르기도 했다. 김 작가의 다른 작품 <기생 이야기>와 <못난이>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희재의 <간판스타>는 벽안의 그들에게 한국적 리얼리즘의 진수를 보여줬으며, 단편집 <부자의 그림일기>로 유명한 오세영은 이탈리아의 유명 만화가 디노 바타글리아에 비견되고 있다. ‘머털도사’ 이두호는 올해 <임꺽정>을 출간할 예정이다.
젊은 작가들의 움직임도 세찬 물결을 이루고 있다. 선두 주자는 단연 변병준. 변 작가는 프랑스에 제일 먼저 소개된 한국의 작가주의 만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2005년 카나를 통해 펴낸 <달려라, 봉구야!>로 PACA(프로방스-알프스-코트-아주르) 지역 연합의 2007년 문학상 후보에도 오르기도 했다. 이밖에 안도현의 산문집 <짜장면>의 콤비였던 최규석, 변기현 등이 각각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와 <로또 블루스> 등으로 주목받고 있다.
일본과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의 만화시장을 형성하며, 유럽 만화의 중심인 프랑스에서의 한국만화는 더욱 특별하다. 지난 11월에는 한불 수교 100주년을 기념, 한불 작가 12인이 의기투합해 기념단편집인 <아미띠에>를 선보이기도 했다.
망가의 거센 인기에 비하면 아직 미미한 모습으로, 25개사에 달하는 아시아 만화 출판사 중 한국 만화를 출판하는 출판사는 2005년 현재 5~6개에 그칠 뿐이지만 유럽에서의 만화는 분명히 많은 가능성을 던지고 있다.
이미 일본 망가 혹은 한국 만화로 대변되는 아시아 시장의 성장은 미국 코믹스와 전통적인 유럽 만화의 약세를 불러오고 있다. 유럽은 2006년 8월에서 12월 사이 출간 예정된 신간만화 종수 1592종으로, 이 가운데 아시아 만화 시장의 점유율이 42%(665종)로 늘어났다. 프랑스와 만화산업계에서는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
김진규 산업진흥본부장은 “아시아 만화 시장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는 이 현상은, 다르게 보면 한국만화에게 기회라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일본보다는 10년 정도 늦게 출발했지만 빠른 시간 내에 만화의 한 장르로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양적으로 열세인 것은 사실이나 ‘망가’와 더불어 뚜렷한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 여기에는 자국 내 시장 규모만도 10배 이상의 차이가 나고, 유럽시장 개척에도 10년 이상의 시간의 뒤져 있어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하다는 의견 또한 여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유럽은 몇 년 전부터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만화 산업계에 분명 매력적인 신대륙”이라고 전문가들의 진단처럼 우리만화의 유럽 진출은 만화가 아시아권을 제외한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줌과 동시에, 이제는 북미 시장뿐만 아니라 새로운 해외 독자들을 고려한 작품 제작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연간 300만 달러 내외로 성장하고 있는 국산만화 수출시장에 있어 유럽이 중요한 시장이 될 것이라는 것. 이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국내시장 활성화 △신규시장 개척 △수출전문인력 양성 등의 노력들이 필요한 것으로 관계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국내시장의 발전이 중요한데 다양성에 기반을 둔 시장 발전이 다양한 작품들을 부르고, 이것이 다양한 구미를 가진 유럽시장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정부 지원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지길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유럽에 전문적으로 만화를 수출하고 있는 오렌지 에이전시의 박정연 대표는 “유럽에 이제 첫발을 들인 한국만화가 잘 되어야 한다. 각종 만화축제와 전시회 등 큰 이벤트로 만화가 판매되고 있는 유럽의 현실상 공공기관의 각종 전시회나 현지 작가 사인회에 대한 적극적인 프로모션이 계속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진규 본부장은 “한국만화가 단시간 내에 해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화 브랜드화나 해외전시 마켓 참가 등도 도움이 됐겠지만 무엇보다 한국만화가 갖고 있는 콘텐츠 자체의 힘 때문”이라고 말하고, 앞으로 이를 더욱 키워나가기 위해 △해외 출판사업(‘한국만화해외가이드북’, ‘한국만화100선’ 등)과 △‘수출정보시스템’(www.koreacontent.org)을 통한 온라인 만화콘텐츠 전시관을 운영 △해외 전문 마케터 교육 및 해외 사무소를 통한 비즈니스 매칭 지원 등의 구체적 계획을 실행중이라고 밝혔다. 특히 독일·러시아·베트남·아르헨티나 등에 위한 한국문화원 12곳을 활용, 한국만화 상설 홍보를 강화해나갈 계획이다.
기회의 땅에 입성하기 위한 만화인들의 관심과 노력 또한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참신한 소재와 캐릭터야말로 그 주무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따른다.
장경섭은 “분단된 상황이나 미국과의 관계 그리고 오랜 독재에 시달리다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는 우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드라마다. 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시도들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프리스트>의 할리우드와 영화화 계약을 진행한 형민우의 예를 들며 “상업적인 스타일들, 사실 이게 우리 만화가 보여줄 수 있는 진짜 승부가 아니겠는가”라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