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인 '신'을 마주 대하는 신학은 모든 신앙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서로 종교적 주소를 달리하는 신앙인들에게도 큰 반감 없이 설명되고 받아들여져야 학문으로서의 위상도 선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이론을 넘어서기 마련. 다양한 종교 현상 앞에 보편적 신학의 기틀을 세우기는 좀처럼 쉽지 않으며, 예외를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종교다원주의' 논쟁이 대표적이다.
지난 1일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제6강을 진행한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는 신학계에 종교다원주의 논쟁을 던져준 캐나다 출신의 미국 종교사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와 독일의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를 통해 현대 신학의 역할과 과제를 설명했다.
종교는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
@BRI@그리스도교 신학, 불교 신학, 이슬람교 신학 등의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전통 신학은 종교 생활을 저마다의 교리 체계에 근거한 상호 배타적인 집단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속해 있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종교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통념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념은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 속에서 종교의 흔적을 더듬어 종교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를 고찰한 스미스는 자신의 주저 <종교의 의미와 목적>(1991)에서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상호 대립적인 실체들로서의 종교개념은 그 어떤 고대 종교적 문헌에도 들어있지 않을 뿐더러, 서구에서 지난 200여 년 동안 전 세계로 수출한 근세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 스미스의 결론이다. 인류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자리 잡은 종교 현상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끝없이 변화하며 쉬지 않고 생성되는 것이어서, 특정한 인간집단이나 개별적인 교리 체계 안에 묶어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태초에 신이 있었고,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신의 창조성에서 신앙의 보편성을 이끌어내는 선험적 추론을 거부한 스미스는 진정한 신학자의 모습을 종교 역사가에서 찾고, 일차적 탐구 대상을 '축적적 전통'이란 이름으로 제시했다. '축적적 전통'은 신앙이 외적으로 표현된 다양한 문화유산 전체를 뜻하며 경전이나 제도, 종교 의례나 교리체계, 관습과 법률이 모두 포함된다.
이런 '축적적 전통'은 탐구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 그 자체를 만들어낸 또는 전통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근원인 '신앙'으로 인도하는 표시들이며, 상징의 역할을 한다. 이 전 교수는 "신앙이란 종교 생활의 내면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며, 초월적인 세계에 응답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능력 그리고 자신, 이웃, 우주에 대한 인격적 정향"이라고 설명했다. 종교가 있는 곳은 바로 이 '신앙'이지, 결코 교리체계나 의례와 같은 상징이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종교인들은 객관적인 형상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상징의 홍수 속에서 종교를 찾고 있을 뿐 그 종교적 삶을 사는 사람의 마음, 즉 신앙을 보지는 않는다. 내면을 보지 않고 형식화된 종교성만 바라보는 결과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상숭배' 논쟁이다.
이 전 교수는 "나무와 돌을 통해 초월적 실재를 느끼는 그 신앙인의 신앙을 떠난 관찰자에게는 그저 나무와 돌만 있을 뿐"이라며 "상징이나 성현을 통해 궁극적 실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지닌 삶의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종교 그 자체가 하나의 인격체이며, 그러한 종교에 대한 접근도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인 신앙인의 관계, 그리고 관찰대상에 대한 인격적 접근의 여부는 종교에 대한 서양의 접근을 구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스미스는 서양의 전통적 접근이 냉철한 관찰자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른 이들의 종교를 하나의 사물인 '그것'(it)으로 본 것이라고 말한다. 종교의 인격화가 이뤄진 최근에는 다른 이들의 종교를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인격 주체인 '그들'(they)로 드러낸다. 그러나 여전히 관찰자는 단순한 타자에 불과한데, '그들'에 관찰자의 존재가 더해지는 순간 그 대상은 '나'를 포함한 '우리'(we)가 된다. 그 다음 단계는 우리가 '너'(you)에게 말하는 대화의 단계다. "이런 발전의 최종적인 것은 우리 모두(we all) 서로 우리 자신(us)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특정 종교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신학은 더 이상 설 곳이 없으며, 세계 종교사적 관점을 아우르는 '세계 신학'(World Theology)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 신학'은 보편적인 인간의 신앙을 연구함으로써 세계 모든 신앙인이 공감할 수 있는 학문이므로, 기독교 안에서만 통하던 교리 신학과는 양과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기존에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석한 것이라면, 세계 신학적 관점에서는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필요충분조건은 '사랑'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으로 유명한 라너는 스미스처럼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서 종교의 흔적을 더듬지 않으면서도, 결국 종교적 다양성을 긍정하는 신학적 이론 체계를 이끌어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한 가톨릭교의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구원'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어가며 종교성의 핵심을 규정하는 중요한 명제로 간주된다. 그래서 흔히 '구원'은 선교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구원론을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또는 교회에 나가야만 구원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라너는 이러한 기독교적 구원론은 지극히 협소할 뿐이며, 오히려 반(反)신론적인 접근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하느님의 은총이 오직 예배당 안에만 갇힐 정도로 왜소하거나 초라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라너는 인간을 '차별 없는 은총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어떠한 조건 없이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이미'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다고 보듯이, 모든 사람들은 예배당에 나가든 그렇지 않든 다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갖추고 있고, 누구나 다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상태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다.
이 교수는 이를 "그리스도적이긴 하되, 아직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 상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복음 선포를 듣지 못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한 사람의 상태"라고 설명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에도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자기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의 도덕적 양심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행한 것처럼 이웃에 대한 철저한 자기 내어줌의 사랑은 그러한 실천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여기저기에 퍼져 있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을 감안한다면, 교회가 단순히 협소한 공간이 될 수도 없다. 라너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구체화되는 모든 곳', 즉 "하느님의 은총 위에서 선의의 양심을 갖고 온 힘을 다해 객관적인 실천 규범을, 객관적으로 주어진 도덕 상황을 지향하는 곳은 어디나 교회"라고 말한다. 만약 현재의 예배당들이 그런 '교회' 공동체라면, 그곳에 속해야 구원된다는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거꾸로 "인간이 구원되는 곳은 어디나 교회"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이러한 라너의 신학에 대해 한스 큉(Hans Kung)은 '교회의 역사성을 무시한 신학적 기만'이라고 불쾌감을 나타냈고, 존 힉(John Hick)이나 니터(Paul Knitter)등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잣대로 다른 종교를 평가하려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전 교수는 이러한 비판들이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을 보전하면서도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통한 인간과의 본래적인 연결성, 결국 하느님은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기본 원리를 확립"하려 했던 라너의 목적을 무시한 오해라고 말했다.
또한 이 전 교수는 라너가 교회의 역사적 역할과 그 중요성을 무시한 것도 아님을 강조했다. 오히려 "타종교인들을 가시적인 교회의 틀 안으로 몰아넣는 것이 교회의 과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신 본래적 구원을 이웃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게 진정한 교회의 과제"라는 것이다.
신학의 보편성은 신앙의 보편성에서 나와야
모든 사람들을 '익명'이라는 전제로 '그리스도인'으로 규정하는 라너의 입장에 대해서도, 이 전 교수는 "라너가 이미 익명이라는 언어가 지니는 한계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라너 스스로 그 용어를 얼마든지 새로운 용어로 대체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볼 때, '불자'(佛者)라는 낱말에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신실한 불자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생생하게 살려내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익명의 불교인'으로 표현해도 무방하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승인해야 하는 어떠한 의무도 없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한국의 종교학자나 신학자들이 이른바 타종교의 연구를 보다 더 열심히 연구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상대방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의 이면에 깔려 있는 유사한 종교적 지향과 믿음의 순수성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종교를 더욱더 잘 이해하고 종교간 평화로운 공존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이다.
"사실 조금만 알고 나면 타 종교의 신학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인간들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는 라너의 신학은 천도교의 핵심 사상인 '시천주'(侍天主)-하늘의 주인을 내 안에 모신다-와 일맥상통합니다."
신앙의 보편성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종교간 넘어설 수 없는 벽을 세우는 한국 신학계의 폐쇄성과 획일화에 던지는 따끔한 일침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권연대 최철규 간사가 작성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