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서 2·13 합의가 나오자 일부에서 북한이 기존에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6∼8개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고 사실상 용인한 채 당근만 제공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일단 2·13 합의는 지난 2005년 9·19 공동 성명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합의는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해 초기 단계에서 각국이 할 행동을 규정한 것이다. 그래서 합의문 제목부터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라고 되어있다. 굳이 따진다면 9·19 공동성명의 부속 문서 격이다.
9·19 공동성명에는 북한의 현존하는 핵무기와 모든 핵 프로그램의 폐기가 명시되어 있다. 이를 완수하기 위해 만든 첫 단계 60일간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문서가 2·13 합의인 셈이다. 2·13 합의가 잘 진행될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2·13 합의에 기존 핵무기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는 "9·19 성명은 말 대 말로 먼 미래의 모든 사항을 다 언급한 것이고 이번 2·13 합의는 행동 대 행동의 초기 단계를 규정한 것"이라며 "지금 단계에서 기존 핵무기 처리 문제를 협상테이블에 올리는 것은 협상을 깨자는 말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도 "2·13 합의에 기존 핵무기가 빠졌다는 보수 진영의 비판은 정치적인 수사(레토릭), 정치적 공세"라고 지적했다. 그는 "비핵화는 결국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과정인데 그들은 현재 자신을 '악의 축'이라고 부르는 나라를 상대로 대단히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며 "이 상황에서 처음부터 핵무기 폐기를 얘기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 핵무기는 어린아이들이 쌓다가 금방 무너뜨릴 수 있는 레고가 아니다"라면서 "북한의 핵 폐기는 한 단계 한 단계 점진적으로 나가는 과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만약 현재 한나라당이 집권하고 있었다면 아마 비용분담에서 더 덤터기를 썼거나 아예 협상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기존 핵무기가 논의되지 않았다는 비판은 네오콘 강경파인 존 볼튼 전 유엔주재 미국대사와 같은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1994년 제네바 합의 때 김영삼 정부는 협상에 참여하지도 못했으면서도 경수로 건설 비용 50억 달러의 70% 부담해 막대한 덤터기를 쓴 적이 있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보수 진영은 현 정부가 실적을 올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무조건 비판하는 것"이라며 "보수 진영의 이같은 태도는 한마디로 트집잡기"라고 지적했다.
기존 핵무기 폐기는 북미 관계정상화와 맞물릴 듯
그러면 언제쯤 북한의 기존 핵무기 폐기가 논의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대단히 지루하고 긴 과정이 될 것이 분명한 북한 핵 협상의 맨 마지막 단계, 북한 스스로가 말하는 '핵무기가 필요 없는 상황', 즉 북미 관계 정상화 단계에서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자신의 핵무기를 미국의 핵 위협에 대항하는 자위적 수단이라고 주장해왔다. 이 논리에 따르면 북미가 수교하면 핵무기가 필요 없게 된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기존 핵무기를 경수로와 맞바꿀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이는 가능성이 낮다. 북한은 그동안 영변이나 태천의 북한 핵시설은 전력 생산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던 만큼 이 시설의 완전 폐기와 경수로를 맞바꿀 것이다.
이정철 교수는 "북한은 비핵화는 정치적 결단의 문제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며 "기존 핵무기의 폐기는 아마도 북미간의 신뢰구축, 관계 정상화와 연계 지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홍현익 연구위원도 "북한 입장에서 볼 때 기존의 핵무기는 마지막 억제력이기 때문에 북미 관계 정상화 수준 때에야 폐기 문제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상황 진전에 따라서는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가 논의되는 단계에서 경수로 제공 문제가 논의되는 것과 동시에 기존 핵무기 처리 문제가 협상 대상으로 등장할 수 있다. 이는 2·13 합의에 따라 초기 조치가 잘 진행되고 6개국 외무장관 회담이 원만하게 열려서 관련국들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는 조건도 필요하다.
2·13 합의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이 남북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정부의 태도로 보나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은 지금 단계에서 남북 정상회담의 개최가 급선무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홍현익 연구위원은 "지금은 남북 정상회담보다는 장관급 회담을 할 분위기가 성숙됐다"며 "쌀·비료 등의 인도적 지원, 이산가족 상봉 재개, 경협 문제 등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장관급 회담 등이 차근차근 잘 진행되면 남북정상회담도 개최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렇게 해서 남북 관계가 강하게 진전되면 미국의 대북 정책 책임자들이 딴 생각을 못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정철 교수는 "2·13 합의는 초기 60일간의 행동만 규정하고 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예측하기 힘들다"며 "결국 핵심은 관련국들간 신뢰가 문제다, 핵 문제 해결의 출구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하면 의미가 약하지만 입구에서 열어 신뢰 구축의 방편으로 활용한다면 지금이 오히려 기회다"라고 강조했다.
미국, 제네바 합의 때보다 부담 훨씬 줄어
이번 2·13 합의 뒤 정부는 예전 9·19 공동 성명 직후 '외교 목표 100% 달성' 식의 발언보다는 덜 하지만 '자화자찬'적 모습도 보인다. 회담이 위기에 빠졌을 때 중재안을 적절히 내놓아 회담을 이끌어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북한의 핵실험 뒤 노무현 대통령부터 앞장서 포용정책 폐기를 말했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번복하는 등 우왕좌왕했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난 뒤에야 미국은 북미 양자 접촉 등 협상에 나섰고 이 와중에서 한국 정부가 한 역할은 아무 것도 없다"고 꼬집었다.
일부 언론들이 중유 100만톤을 전액 한국이 부담하는 덤터기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제기했으나 결국 관련국 균등 부담으로 귀결됐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고 했다가 '주도적' 덤터기를 피한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중유 100만톤 지원만 균등 부담일 뿐 다른 덤터기 요소는 여전히 남아있다.
일단 제네바 합의 때 매년 중유 50만 톤 제공은 전액 미국의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100만톤 중유 제공은 5개국 균등부담으로 바뀌었다. 진보적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지난 2002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북핵 문제를 질질 끌어왔다. 그런데 미국의 부담은 제네바 합의 때보다 훨씬 적다.
더 문제는 2·13 합의 이후의 비용이다. 한국은 이미 200만㎾ 대북 송전을 제안했고 이는 9·19 공동성명에도 언급되어 있다.
2·13 합의가 잘 진행되어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 단계에 이르게 되면 결국 경수로 건설로 귀착될 가능성이 높다. 경수로 건설에 10년이 걸리기 때문에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 때부터 경수로 건설 때까지의 10년간 한국은 매년 200만㎾의 전력을 단독으로 북한에 보내야 한다. 이 비용은 10조원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신포 경수로 재공사에 들어갈 경우 한국은 송전 비용 부담을 들어 균등 부담에서 빠질 수 있지만 그래도 부담은 엄청나다. 이것이 지난 2005년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대북송전안을 내놨을 때 많은 전문가들이 비판했던 이유다. 대북송전 비용도 최소한 관련국들이 균등 부담할 수 있었는데 한국 혼자 스스로 덤터기를 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