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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으로 알려진 곳.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으로 알려진 곳. ⓒ 김성호
전설과 역사적 사실이 엇갈리는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

에자나 왕의 비석을 구경하고 내려오다 보면 그리 멀지 않은 왼쪽에 커다란 연못 같은 웅덩이가 보인다.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이라는 곳이다. 경사진 산의 바위를 깎아 만든 시바의 여왕의 야외 목욕탕은 폭 30m, 길이 67m나 되고 깊이가 5m나 되어 목욕탕이라기보다는 대형 수영장이나 저수지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내가 찾았을 때도 한 여인은 빨래를 하고 있었고,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는 노란색과 파란색의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집으로 가져가려는지 물통을 옮기고 있었다. 옛날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이라는 이곳은 지금 지역주민들이 물을 깃는 생활용수 저장소이자 옷을 빠는 빨래터로 이용되고 있었다.

재미난 사실은 에티오피아인들이 이곳을 시바의 여왕이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내며 목욕을 하던 신성한 장소로 철썩 같이 믿고 있는데 반해 역사학자들은 시바의 여왕 시대보다 1천여 년이 뒤진,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시바의 여왕은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인 B.C.10세기의 인물이기 때문에 목욕탕이 만들어진 시기와 1천여 년의 시대적 차이가 나는 것.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하나로 부합되지 못하고 엇갈리는 순간이다.

전설은 역사적 사실에 의해 무너져 내려야 할 운명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전설은 역사적 사실과 별도로 당시 민중들의 열망과 바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민중의 꿈과 희망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전설로 승화되는 법.

예로부터 물이 귀한 자신들의 터에 중요한 식수를 제공하는 이 저수지를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이라고 여길 정도로 신성시해왔으며, 시대를 넘어 시바의 여왕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자부심, 나아가 자신들의 공동의 시조로 여기는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이기 때문에 당연히 조상대대로 지역주민 모두의 공동재산이고, 시바 여왕의 목욕탕의 물처럼 물 한방울도 아껴 사용해야 한다는 에티오피아인들의 물에 대한 숭배의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에티오피아인들에게는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선조들의 혼과 교훈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가 시바의 여왕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는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하기 전 내가 타고 온 비행기 안에서도 알 수 있었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아디스아바바로 오는 비행기를 갈아타고 오는데, 에티오피아 비행기 안에 있는 항공사 안내책자에 보니 에티오피아항공사의 마일리지 서비스 이름이 '시바마일스(ShebaMiles)'였다.

마일리지 서비스 이름을 시바의 여왕의 전설에서 따온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솔로몬 왕과의 관계, 그리고 에티오피아 건국신화에 대해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에티오피아는 시바의 여왕의 '미모'와 유대왕국의 솔로몬 왕의 '지혜'를 겸비한 민족이라는 과시였다.

성경과 코란에 기록된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 왕의 만남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이라는 곳에서 물을 깃고 있는 주민들.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이라는 곳에서 물을 깃고 있는 주민들. ⓒ 김성호
악숨에는 이처럼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뿐 아니라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 등 역사적 사실과 전설, 설화가 빗겨가는 유적지들이 즐비하다. 이런 일들은 에티오피아의 건국신화에서부터 비롯된다.

B.C.10세기 고대 이스라엘(유대) 왕국의 지혜의 왕으로 알려졌던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 사이의 전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원본에서 시작되는데, 그 이후 시대가 지나면서 계속해서 첨가되거나 윤색되면서 에티오피아의 전설로 굳어졌다. B.C 555년 이후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구약성서 열왕기(상 10:1∼13)에 나오는 이야기.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의 명성을 듣고 어려운 문제를 들고 시험하고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많은 수행원과 함께 향료와 금과 보석 등을 낙타에 싣고 왔는데,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바친 것처럼 그렇게 많은 향료가 온 적이 없었다. 솔로몬 왕은 시바의 여왕에게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하사품으로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갖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구약 성서에는 이처럼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시바의 여왕의 이름이나 솔로몬 왕과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서기 646년 완성된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의 사자(使者)(수라 27)에는 시바의 여왕의 이름이 '빌키스(Bilqis)'이라는 새로운 사실과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이야기가 다른 버전으로 나온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해 왕궁으로 들어가는데 입구에 호수 같은 물웅덩이가 있어 치마를 들어올려 물을 건너기 위해 두 다리를 드러냈다. 그러자 솔로몬 왕은 그것은 물이 아니라 바닥에 유리로 깔은 길이라며 치마를 내리도록 했다. 물이라고 보인 것은 진짜 물이 아니라 유리에 비친 반사일 뿐이었다. 이와 같이 실체는 하나일 뿐이고 그것은 바로 창조주 알라이다. 여왕은 그 이후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을 버리고 창조주 알라를 숭배하게 되었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만난 뒤 태양신을 버리고 이슬람교의 유일신인 알라를 믿게 되었다는 '이슬람판' 이야기로 바뀌어 있다.

한참 지나 14세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작가들에 의해 쓰인 에티오피아의 대서사시인 <케브라 네가스트(Kebra Negast)>라는 전설모음집에서는 시바의 여왕의 이름이 코란과 달리 '마케다(Makeda)'로 나온다.

암하릭어로 '왕들의 영광'이라는 뜻의 '케브라 네가스트'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여왕인 시바의 여왕은 오랜 여행을 통해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솔로몬 왕을 방문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게 되자 솔로몬 왕은 방안에 선을 긋고 자신의 물건에 시바의 여왕이 손을 대지 않으면 자기도 그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하도 목이 말라 잠을 자다 깨어난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 왕이 옆에 놓아두었던 물통의 물을 그만 마셔버리고 말았다. 지혜로운 솔로몬 왕이 저녁 음식으로 매운 향신료가 많이 담긴 음식을 시바의 여왕에게 먹여 갈증이 나도록 했던 것.

시바의 여왕이 약속을 어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솔로몬 왕은 아름다운 시바의 여왕을 품에 안고 밤새 사랑을 나누었다. 오랜 기간 이스라엘에 머물던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 왕과 나눈 하룻밤 사랑으로 아들 메넬리크를 낳아 에티오피아로 돌아왔다.

메넬리크는 성장한 후 다시 자신의 아버지인 솔로몬 왕을 보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십계명을 담은 법궤를 가지고 돌아와 악숨 왕국을 세웠다. 그가 바로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인 메넬리크 1세 황제이다.

이처럼 시바의 여왕의 이야기는 처음 구약성서의 '유대교판'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코란의 '이슬람판' 이야기로, 그 뒤 케브라 네가스트의 '기독교 에티오피아판' 이야기로 시대에 따라 내용이 첨가되거나 바뀌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시바의 여왕을 둘러싼 에티오피아와 예멘의 시조 분쟁

퉁소를 불면서 주검이 든 관을 옮기고 있는 장례행렬.
퉁소를 불면서 주검이 든 관을 옮기고 있는 장례행렬. ⓒ 김성호
에티오피아의 전설에 따르면 역사적 사실과 달리 시바의 왕국이 과거부터 예멘이 아니라 에티오피아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악숨도 1세기가 아니라 B.C.1000여 년 전에 세워졌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시바의 여왕과 관련해서는 알렉산더대왕(알렉산드로스대왕. B.C.356∼B.C.323)을 둘러싸고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사이에 시조 논쟁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티오피아와 예멘 사이에도 역사왜곡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시바의 여왕을 둘러싼 논란은 에티오피아인들의 조상이 바로 예멘에서부터 이주해온데다 에티오피아의 칼렙 왕(514∼542)시대인 525년부터 잠시나마 에티오피아가 예멘을 직접 지배하면서 에티오피아의 역사와 예멘의 역사가 뒤섞여 버린 데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시바의 왕국에 살다 에티오피아로 이주해온 선조들이 자신의 나라인 예멘과 여왕까지 에티오피아 역사로 가져오면서 전설과 역사적 사실이 혼재되어 버린 것.

에티오피아에서 유대왕국의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그리고 법궤와 관련된 전설은 이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변형된 이야기들이 내려오고 있다. 그 내용이 어떻든 전설이 설령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설에는 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어디서 찾느냐 하는 민족적 정체성과 역사관, 세계관, 미래관, 종교관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단군신화에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천제(天帝) 환인의 아들 환웅과 100일 동안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을 먹으면서 생활해 곰에서 인간으로 변한 웅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바로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끈기 있게 참아내는 곰에게서 인내심과 자주성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에티오피아인들도 솔로몬 왕의 지혜와 영광, 시바의 여왕의 아름다움과 여왕으로서 사막과 바다를 건너는 험한 여정을 마다지 않고 지혜를 배우기 위해 솔로몬 왕을 만나러 갔던 개방성과 진취성 등을 전설을 통해 교훈으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시바의 여왕의 아들인 메넬리크 1세의 직계후손이라고 믿는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의 뿌리에서 국민통합과 민족적 자부심을 찾기도 했으나 역대 지배자들은 시바의 여왕의 전설을 통치의 정당성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1268년 예쿠노 암라크 황제는 자신이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후예라고 주장하면서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조 재건을 내세웠다.

에티오피아가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수록한 케브라 네가스트는 바로 암라크 황제의 손자인 암다 세욘 황제시대인 14세기에 쓰였던 것. 이 황제들이 민중 사이에 내려오던 시바의 여왕의 전설을 통치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9년 메넬리크 2세 황제는 아예 이름을 시바의 여왕의 아들 이름을 따서 불렀고,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도 자신은 솔로몬 왕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통치는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1974년까지 에티오피아 제국헌법에는 아예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전제하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메넬리크 1세로부터 이어진 솔로몬 왕의 왕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규정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아무리 솔로몬 왕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통해 영원한 통치권좌를 누리려던 에티오피아 황제들도 모두 폐위되었다.

자신의 출생신분을 아무리 미화해도 민중의 신뢰를 잃은 황제의 경우에는 혈통 자체가 황제의 자리를 보호해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짐은 곧 국가'라는 왕권신수설은 '국가의 주인은 민중'이라는 천부인권론과 국민적 저항권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황제의 통치권은 조상이나 혈통이 아니라 민중들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퉁소를 부는 에티오피아 전통 장례행렬이 지나가고...

두시간 정도 지나 장례식을 마친 뒤 내려오는 주민들.
두시간 정도 지나 장례식을 마친 뒤 내려오는 주민들. ⓒ 김성호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에서 내려와 악숨 박물관으로 가는 데, 퉁소 소리와 함께 도로를 따라 1백여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지나가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전통 장례행렬이다. 나는 차량에서 내려 장례행렬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맨 앞에 퉁소를 부는 사람이 앞장서고 바로 뒤에 6, 7명의 젊은 남자들이 울긋불긋한 천으로 덮은 관을 메고 따르고 있었다.

관 뒤에는 하얀 천을 어깨에 두른 남자들이 따르고, 남자 뒤에는 하얀 천을 머리부터 두건처럼 쓴 여자들이 쫓아가고 있었다. 앞쪽에 있는 사람들은 주로 죽은 사람의 친인척 같았고, 나머지는 문상객과 마을 주민들같이 보였다. 장례식을 마을 공동의 행사로 치르는 것은 우리와 같았다. 도로를 따라 걷던 장례행렬이 오벨리스크가 있는 마을 뒤쪽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가까운 곳에 있는 공동묘지에 매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죽은 자의 마지막 가는 길에 모든 마을 주민들이 애도하고 함께 하는 것은 동서고금 다를 것이 없다. 여행 중에 장례행렬을 보는 것은 그 지역사람들의 장례풍습이나 내세관을 알 수 있어 독특한 경험을 하는 셈이다.

악숨 고고학 박물관 입구.
악숨 고고학 박물관 입구. ⓒ 김성호
악숨 고고학 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토끼풀 모양의 십자가 돌
악숨 고고학 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토끼풀 모양의 십자가 돌 ⓒ 김성호
시온의 성 메리 교회 바로 앞에 있는 악숨 고고학 박물관에 도착하자 마침 소낙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했다.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간이 건물에 악숨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전시실 입구에는 1906년 독일발굴단이 칼렙 왕 무덤 주위에서 발견한 토끼풀 모양의 십자가를 새긴 네모난 석판 등이 놓여 있었다.

안쪽 유리 전시실에는 깨어진 접시와 기와 파편, 항아리, 장신구 등이 있었고, 유리 향수병과 악숨시대의 동전들도 있어 흥미로웠다. 특히 은과 구리로 만들어진 동전에는 그리스어와 암하릭어의 고어인 게이즈어로 왕들의 이름과 초상화 등이 그려져 있는 데, 동전 뒷면에 그려진 문양을 보고 기독교가 국교로 제정된 333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인지 여부를 알 수 있다.

박물관 안내자는 "서기 333년 이후에 만들어진 동전에는 대부분 십자가 모양이 새겨져 있고, 그 이전의 동전에는 초승달이나 태양을 상징하는 원형형태가 그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초승달과 원형형태의 문양은 유일신인 기독교가 아닌, 태양신 등 다신교를 믿는 아라비아 남쪽지역에서 유래한 상징들이기 때문이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나오면서 많은 유물에 비해 전시공간이 너무 작다고 말하자, 안내자는 "2007년에는 새로운 박물관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말했다.

눈길을 끄는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 샤워시설

시바의 여왕의 왕궁 터로 알려진 곳. 오른쪽 철판 지붕이 부엌 아궁이
시바의 여왕의 왕궁 터로 알려진 곳. 오른쪽 철판 지붕이 부엌 아궁이 ⓒ 김성호
시바의 여왕의 궁전터 뒤에 세워진 철제 전망대에서 찍은 대학생과 왕궁터
시바의 여왕의 궁전터 뒤에 세워진 철제 전망대에서 찍은 대학생과 왕궁터 ⓒ 김성호
고고학 박물관을 나오자 다행스럽게도 그사이 비가 그쳤다. 오히려 하늘이 맑고 깨끗해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현지사람들이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로 부르는 둔구르 유적지로 갔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는 훤하게 트인 넓은 벌판에 있었다. 돌들을 쌓아 만든 왕궁터의 건물은 거의 무너지고 토대가 된 돌기반과 형태만을 알 수 있을 정도의 2∼3m 높이의 벽만이 복원되어 있었다.

한 방에는 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샤워시설과 바닥의 돌에 물이 흐르는 도랑이 파여 있는데 목욕탕으로 사용되던 것이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물을 흘려보내는 하수구가 잘 만들어져 있었다. 내 관심을 끈 것을 바로 천장 위에 홈을 파서 물이 위에서 떨어지도록 한 샤워시설이었다.

그 옛날 시바의 여왕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 오늘날처럼 천장 위에서 떨어지게 하는 샤워시설을 갖춰 놓고 매일 목욕을 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사람들이 이곳을 여왕의 왕궁터로 믿는 데는 바로 샤워시설과 시바의 여왕의 미모를 연관시키는 상상력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건물 끝에는 별도로 네모난 공간이 보이는데, 빵을 굽는 화덕과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잘 보존되어 있어 인상적이었다. 두 개의 화덕과 빵에 여러 가지 무늬를 내기 위한 틀도 그대로 놓여 있었다. 부엌은 빗물에 훼손되지 않도록 위에 철판 지붕을 덮어 씌워놓고 있었다. 옛날에도 사람이 사는 집에서 가장 중요한 부엌과 물을 흘려보내는 하수구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는 것을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는 잘 보여줬다.

왕궁의 뒤쪽에는 여행객들이 왕궁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5m 정도의 망루 같은 철제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전망대에 올라가 왕궁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왕궁터의 전면이 위에서 아래로 나온다. 실제로 철제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보니 왕궁터의 모습과 탁 트인 벌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에티오피아에서는 보기 드물게 여행객을 위한 시설을 갖추어 놓은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도 전설일 뿐이라는 데...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로 알려진 내부의 모습.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로 알려진 내부의 모습. ⓒ 김성호
시바의 여왕의 왕궁터라는 둔구르 역시 시바의 여왕의 목욕탕과 같이 애석하게도 그 건축연대가 여왕이 살던 기원전(B.C.) 10세기보다 무려 1500여년 뒤인 7세기경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 유적지의 석조기술이 4세기 또는 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시온의 성 메리 교회의 돌기반과 비슷하고, 역시 4세기 또는 5세기 때 만들어진 타크하 마리암 왕궁의 양식과 비슷하지만 작다는 점에서 그 후인 7세기 무렵에 만들어졌고, 용도도 왕궁이 아니라 당시 귀족의 저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유적지 뒤로는 작은 둔덕 같은 언덕이 보이고, 건너편 앞에는 10세기 구디트 여왕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구디트 오벨리스크 유적지가 있다. 당시 왕을 죽이고 권좌에 오른 구디트(Gudit) 여왕은 요디트(Yodit.영어의 유디트(Judith)라는 뜻) 여왕이라고도 불리는 데, 다신교도 또는 유대교도로 알려졌다.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구디트 여왕은 악숨 왕조를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둔구르 유적지와 칼렙 왕의 왕궁터, 교회, 오벨리스크 등 유적지를 철저히 파괴해 악숨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구디트 여왕은 구교도로서 수많은 신교도들을 처형한 16세기 영국의 메리 1세 여왕과 18세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7세기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처럼 에티오피아에서는 악명 높은 여왕의 대명사로 꼽힌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기자는 전 국회의원입니다.


#에티오피아#악숨#시바의 여왕의 목욕탕#시바의 여왕의 궁전 터#악숨 고고학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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