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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암의 기암괴석
추암의 기암괴석 ⓒ 김대갑
한명회는 아주 그로테스크한 인물이었다. 엉뚱하면서도 기이했고, 괴상하면서도 치밀했다. 개경의 경덕궁지기에서 영의정으로 입신양명하였으며, 예종과 성종의 장인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1504년에 발생한 갑자사화 때는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여 40세에 겨우 궁지기란 벼슬을 받았다. 그것도 음서제도의 덕택으로.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에 단골로 출연했던 한명회. 간악한 모사꾼의 대명사이자 음침한 지략가의 전형. 그리고 백성들을 수탈했던 가장 대표적인 양반, 한명회. 그는 추암의 절경과 파도치는 해변을 가리켜 '능파대'라고 감히 작명했다.

'능파'란 파도 위를 걷는다는 뜻이다. 주색잡기를 유독 밝혔던 그인지라 미인이 파도 위를 걷는다는 음험한 상상을 절경 속에서 유추해 낸 것이다. 그러나 추암은 그의 작명을 거부할 것이다. 미인의 걸음걸이를 닮았다 하여 '능파대'라고 이름 지었다는 그의 서툰 작명을 강한 몸짓으로 거부할 것이다.

앙증맞은 추암 해변
앙증맞은 추암 해변 ⓒ 김대갑
추암은 예전부터 추암이었다. 용추와 같이 기이한 암석으로 되어 있는 부락이 있었다고 하여 추암이라고 불렸다. 그곳에는 동해의 질탕한 파도를 생존의 터전으로 삼은 민초들의 애환이 숨어 있다. 또한 염풍을 맞아 검게 그을린 촌로들의 설움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찌 한명회 같은 모사꾼이 제 멋대로 이름을 고친단 말인가. 그에게 추암은 단지 하나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허나 그곳에서 살고 있는 민초들에게 추암은 오징어를 말리기가 좋은 곳이었다. 한명회 같은 사대주의 양반이 가마 위에 올라 교만한 눈짓으로 추암의 절경을 볼 때에도 동해의 민초들은 오징어를 말리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바위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바위 ⓒ 김대갑
그러나 '능파대기'에 나오는 양반체의 문귀가 다소 거슬리긴 하지만, 추암의 기암괴석을 나름대로 자세히 묘사한 공로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줘야겠다. 그는 추암이 경포대와 총석정보다 더 기이하다고 말했다. 그렇다. 추암 해수욕장은 밋밋한 동해안의 여타 해수욕장에 비해 기묘하면서도 생경한 풍광을 가지고 있다. 아니 뛰어나도록 괴이하고 미묘한 바위들을 가지고 있다.

추암해수욕장에는 그리움이 모래알갱이 마다 켜켜이 묻어 있다. <겨울연가>에서 준상과 유진의 밀월여행이 그림처럼 곱게 채색되어 있는 추암의 작은 해변. 동틀 무렵, 그 작은 해변을 굽어보는 동산에 오르면 촛대 바위 위로 태양이 온 몸을 휘저으며 내리비치는 장면이 유화처럼 펼쳐진다. 한마디로 감탄과 경이, 한적함과 호젓함이 밀물처럼 몰려오는 곳이 바로 추암 해수욕장이다.

그 유명한 촛대바위
그 유명한 촛대바위 ⓒ 김대갑
추암 해수욕장은 세 가지로 유명해졌다. 첫 번째는 촛대바위라는 기이한 바위덕분이었다. 끄트머리가 뾰족하게 생긴 바위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모습은 흡사 인공적인 연출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참으로 절묘하다. 능파대기에 나오는 '혹은 불끈 솟아오르고'란 대목은 분명 촛대바위를 보고 한 말이다. '불끈 솟아오른 바위'라는 표현은 일견 거대한 남근석을 연상시킨다. 멀리서 보면 화살촉 같고 가까이서 보면 촛대 같고, 더 가까이에서 보면 남근처럼 보이는 촛대 바위의 위용! 자연의 조화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두 번째는 애국가 첫 장면에 등장하는 촛대바위 위의 일출이었다. 지금에야 애국가 장면이 다양한 화면으로 시작하지만 예전에는 출렁이는 동해를 노랗게 물들이는 일출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에 울러 퍼졌던 애국가와 함께 등장하는 화면이 있었다. 그것은 추암 해수욕장의 촛대 바위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일출 장면이었다.

겨울 연가의 추억
겨울 연가의 추억 ⓒ 김대갑
세 번째로 추암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2003년에 방영된 <겨울연가>였다. 준상과 유진이 한적한 바닷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이 추암 해수욕장에서 촬영되었던 것이다.

<겨울연가>가 일본에 진출하여 대성공을 거두면서 추암 해수욕장은 내·외국인의 단골 관광지가 되었다. 매스컴의 위력은 여기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그러나 기실 추암은 그 자체의 절경에 의해 겨울연가를 불러들인 것이지 매스컴의 일방적인 미화에 의해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칼바위는 바람을 가르고
칼바위는 바람을 가르고 ⓒ 김대갑
또한 추암에는 <겨울연가>의 추억과 촛대 바위만 있는 게 아니다. 금강산의 해금강을 축소해놓은 듯한 소해금강이 해안 절벽을 따라 미인의 눈부신 나신처럼 펼쳐져 있다.

갖가지 동물 모양을 닮은 바위가 있는가 하면, 사랑하는 부부를 닮은 바위도 있고 넉넉한 시야로 중생을 굽어보는 관음보살을 닮은 바위도 있다. 육중한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가 하면, 칼처럼 날카로운 모습을 갖춘 바위도 있다. 누가 말했던가. 파도가 거친 날에 추암을 찾으면 포말이 절벽에 부딪히는 모습에서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본다고.

추암 해수욕장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동해변의 해수욕장 중에서도 작은 규모에 속한다. 인근의 망상 해수욕장과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그러나 작고 아담한 가운데서도 추암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백사장에는 적당한 파도가 들숨과 날숨을 거듭하고, 앙증맞은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해변을 오간다. 작은 어촌이 하얀 조가비의 몸매를 닮았으며 밤에는 진초록의 불빛들이 모래사장 위로 비친다.

해암정 전경
해암정 전경 ⓒ 김대갑
해변의 한쪽 편에는 해암정이라는 아담한 정자가 해풍을 맞으며 외로이 앉아 있다.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인 것이다.

정자는 동서남북의 모든 문을 열어젖힐 수 있는 누마루 형식이다. 그래서 뒷문을 열어젖히면 소해금강이 병풍처럼 둘러 쳐진 모습을 유감없이 볼 수 있고, 앞 쪽으로는 탁 트인 바다가 동공을 가득 채우는 희열을 맛 볼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들러 글을 남겼다고도 한다.

진초록으로 물든 추암의 야경
진초록으로 물든 추암의 야경 ⓒ 김대갑
추암 해수욕장의 해변을 거닐면 미묘함과 그리움이 교차되어 가슴 속을 스쳐 지나간다. 미묘함은 촛대바위와 해안 절벽의 기암괴석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그리움은 추암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시인 묵객의 풍류와 오징어를 말리는 민초들의 애환 때문이다.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촛대바위는 신기하고 장엄하다. 그 촛대바위에 살짝 걸리면서 떠오르는 아침 해돋이의 신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송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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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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