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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서원
자산서원 ⓒ 이기원
전남 함평군 엄다면 제동마을에 있는 자산서원을 찾았다. 조선 중기 사림의 한 사람이었던 정개청이 선조 22년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병사하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광해군 8년 자산서원을 세웠고, 숙종 4년 사액을 받았다고 한다.

정개청과 자산서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시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던 정치적 소용돌이 기축옥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불리는 기축옥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무려 1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 가람기획
정작 더 큰 일은 그(정여립)가 죽고 난 뒤에 벌어졌다. 그의 가족들은 남김없이 몰살당했다. 전주에 살던 동래 정씨들은 샅샅이 찾아내 죽이거나 이주시켰고, 그의 이웃집 사람들, 그와 친구가 되었던 사람들, 그와 사돈네 팔촌이 되었던 사람들까지 죽거나, 유배되거나, 벼슬에서 떨려나거나, 도망쳤다.

이 소란이 전라도 일대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황해도와 경상도와 경기 일대에서 잡혀온 사람들이 서울 의금부 감옥에 넘쳐났고, 이들은 고문에 못 이겨 비명을 질러댔다. 이렇게 해서 1천여 명이 걸려들었다. 이런 철저한 보복은 역사 이래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어느 역적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가 없는 대사건이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기축옥사라 부른다. -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 4쪽


정여립 모반 사건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희생된 1000여 인물 중의 하나가 자산서원에 모셔진 정개청이다. 그럼 정개청은 어떤 연유로 기축옥사에 연루되었을까?

정여립 모반에 대한 고변이 올라오면서 선조는 서인인 서인인 정철을 조사책임자로 임명했다. 정철은 정여립 모반에 연루된 인물을 철저하게 색출해서 처단했는데, 이 기축옥사가 서인이 동인을 제거하는 것으로 악용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영산강 유역 나주목 제동마을에 살며 후진을 양성하던 정개청의 반역에 대한 상소가 올라온 것도 이 무렵이다.

정개청 시비
정개청 시비 ⓒ 이기원
"전 현감 정개청은 오랫동안 여립과 교우가 친밀하여 온갖 사설에 서로 호응한 자입니다. 졍개청은 일찍이 <배절의론>을 만들어 후배나 제자들을 현혹시키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 폐단이 반드시 간궤를 야기시켜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이다' 했습니다. 아, 성인이 <춘추>와 <강목>을 저술할 때 절의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는데, 지금 정개청은 글을 읽는 데 힘써 유민 출신으로 사대부의 서열에 참여한 뒤에는, 감히 터무니없는 말을 마구 만들어 스스로 역란의 길에 빠졌으니, 군친을 망각하고 버리는 마음이 뚜렷합니다. -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 209쪽

이 상소로 정개청은 끌려가서 국문을 받게 되었다. 정개청은 공초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임오년에 나주목사가 (신의) 헛된 이름을 듣고 그 고을 훈도에 천거하여 두 번이나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천성이 뻣뻣하고 옹졸하므로 때에 따라 변통하지 못했으니, <소학>과 <사서>와 <근사록> 같은 책을 가지고 부지런히 가르치고, 매일 유건과 의복을 정제하고 읍양진퇴하는 법을 가르칠 때, 혹 게으른 자가 있으면 매를 쳐서 벌을 주었더니 그중에 이렇게 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자가 신을 원수같이 미워했습니다. 교생 홍천경 같은 자는 신에게 면박하여 욕설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중략) …신이 비록 정여립과 더불어 같은 도 내에 살았으나 한 번도 얼굴조차 본 일이 없었습니다. 을유년에 교정랑이 되어서 처음 보았고, 공청에서 같이 교정하기 겨우 10여 일인데 어찌 그동안에 친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집터 보려고 내왕한 것이 사실이라면 역당에서는 어찌 한 사람도 공초에 이 말을 고하지 않았겠습니까. 나주향소와 향교 유사 등을 대질시켜 말의 출처를 엄하게 캐내어 나의 원통하고 억울함을 씻어주소서." -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 209~210쪽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지만 그를 고문했던 정철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정개청은 함경도 아산보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고문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음을 당했다.

정개청의 문집 우득록을 인쇄 보급하기 위해 만든 목판, 숙종 때 자산서원이 사액되면서 목판이 제작되었다.
정개청의 문집 우득록을 인쇄 보급하기 위해 만든 목판, 숙종 때 자산서원이 사액되면서 목판이 제작되었다. ⓒ 이기원
정개청이 죽은 뒤 그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안중묵은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송강이 동인에 밀려 낙향해 광주 근교에 머물러 있을 무렵, 곡성현감의 자리에 오른 정개청이 그 길목을 지나다니면서 단 한 번 위로 문안을 오지 않은 것에 사감을 품고 정여립 역모에 연루된 것으로 몰아 죽였다" -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 213쪽

정개청을 배향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광해군 때 자산서원이 세워졌다. 그 후 숙종 때 이 서원에 사액이 내려지면서 국가로부터 서책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으며 정개청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산서원의 앞길은 순탄하지만 않았다. 붕당 사이의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인이 집권하면 헐리고, 서인이 물러나면 다시 세워지기를 되풀이했다.

우득록 목판을 촬영하고 있는 역사교사들
우득록 목판을 촬영하고 있는 역사교사들 ⓒ 이기원
송강 정철은 서인을 대표해서 기축옥사 때 권력의 칼을 휘두르며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동별곡의 작가로 관동 지방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묘사했던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

정철에 의해 국문을 받고 유배되어 죽음을 당한 정개청은 어떠한가. 그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 받고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자산서원이 서인이 집권 여부에 따라 헐리고 다시 세워지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권력을 휘두르던 이들의 삶과 그렇지 못해 밀려난 이들의 삶이 역사의 의미로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곰곰 되새기며 자산서원을 둘러보았다. 역사의 주류에 밀려 지워지고 사라진 이름들이 어떻게 후대에 되살아나는지를 자산서원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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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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