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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 새로 공개된 케네디 암살 직전의 사진. 동영상은 케네디 암살 박물관 홈페이지(www.jfk.org/home.htm)에서 볼 수 있다.
ⓒ Six Floor Museum 제공
지난 19일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암살 직전 상황을 보여주는 새 동영상이 공개됐다. 아마추어 사진작가 조지 제프리가 40년 넘게 보관해 온 동영상을 미국 대통령의 날에 맞추어 댈러스 케네디 암살 박물관(Six Floor Museum)이 공개한 것. 이 동영상에는 케네디가 암살된 댈러스시 다운타운 옛 텍사스 교과서 보관창고(Texas School Book Depository) 건물 앞을 지나기 직전 90여 초 간의 장면이 담겨 있다.

암살 진상조사 과정에서 아브라함 자프루더의 동영상 등 여러 편의 동영상이 공개됐으나 새롭게 공개된 동영상은 케네디의 부인이었던 재키 케네디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났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가 암살된 이후 40년이 훌쩍 넘었지만 미국의 언론들은 이 동영상의 공개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 공식 언론 말고도 암살 장소 인근에는 아직도 케네디 암살 관련 음모론을 믿으며 관련 책자를 파는 사람들이 있고, 그 책자를 소중하게 구입하는 하루 수 천명의 관광객들이 있다.

이 관광객들은 암살 박물관 1층 공식 기념품점보다 음모론 관련 기념품만 모아 놓은 '음모론 박물관(Conspiracy Museum)'을 더 많이 찾는다. 미국인들은 '케네디'라는 이름이 주는 상징성에 흥분하고 그의 암살 이후 나타난 '집단 트라우마(trauma,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듯 하다.

결론이 다른 두 진상조사

케네디 암살 이후 진상조사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첫째는 암살 직후인 1964년 케네디에 이어 대통령이 된 린든 존슨에 의해 구성된 '워런 위원회(Warren Commission)'였다. 이 위원회는 케네디 암살 후 2시간 만에 붙잡힌 전 해병대 저격수 리 하베이 오스왈드에 의한 단순 범행으로 결론내렸다.

체포 직후 자신은 "희생양(patsy)"이라고 주장했던 오스왈드가 잡힌 지 이틀 만에 잭 루비에 의해 암살되고, 교도소에서 잭 루비마저 폐렴으로 죽어 사건의 진상이 묻힐 뻔 했다. 하지만 케네디 암살은 한 검사의 용기 때문에 다시 파헤쳐 지게 됐다.

1967년 뉴올리언스주 검사였던 짐 게리슨은 케네디 암살 음모 혐의로 지역 유지였던 클레이 쇼를 법정에 세웠다. 이 재판은 케네디 암살 진상조사를 다시 하라는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미 연방 하원은 1976년 '암살특별위원회(HSCA, the House Select Committee on Assassinations)'를 구성해 케네디 암살 사건을 다시 조사했다.

HSCA는 워런 위원회와 달리 "음모의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내려 전 미국을 뒤흔들었다. HSCA의 결론은 91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 JFK >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 케네디 암살 장소인 댈러스시 다운타운 엘름(Elm) 도로에 온 관광객들. 사진 오른편 도로 가운데 X표시(원 안)가 케네디 전 대통령이 두 번째 총알을 맞고 즉사한 장소.
ⓒ 신기해
단독범행 vs. 제2의 암살자

음모론의 핵심은 "오스왈드 외에 제2의 암살자가 있었다"는 것. 암살자가 2명 이상이라면 암살은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계획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 '누군가'의 정체를 밝히는 게 사건의 핵심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오스왈드 단독 범행이냐, 제2의 암살자가 존재하는가라는 논쟁은 각각의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팽팽하게 진행됐다.

단독 범행의 증거는 오스왈드가 총을 쏘았던 텍사스 교과서 보관창고 6층 바로 아래층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위층에서 3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한 증언,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총에 오스왈드의 지문이 묻은 것, 케네디가 타고 있던 차와 그 인근에서 발견된 3발의 탄알이 모두 한 종류라는 것, 아브라함 자프루더의 동영상에는 뒤에서 총을 맞았기에 케네디의 피가 앞쪽으로만 터진다는 것 등이었다.

반면, 제2의 암살자가 존재한다는 측은 워런위원회 조사 당시 케네디 앞쪽에서도 총성이 들렸다고 한 35명의 증언, 총에 맞은 케네디를 보호하며 병원까지 호송한 경호원 클린트 힐과 병원 의사들이 "케네디 대통령의 오른쪽 뒤편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해 총알이 앞쪽에서 날아온 것으로 짐작케 한 증언, 전 해병대 저격수 훈련교관들이 "오스왈드가 가진 이탈리아제 '만리커 카르카노' 총으로는 워런위원회가 조사한 대로 2.3초 안에 2발의 총알을 발사할 수는 없다"고 한 증언 등을 근거로 들었다.

음모론, CIA에서 이스라엘까지

제2의 암살자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암살을 계획한 세력들의 정체에 대해 나름의 논리를 펴 왔다.

가장 유력한 것은 CIA 연루설. 케네디 이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쿠바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피그만 침공' 계획을 세웠다. 케네디 취임 직후인 61년 이 계획은 실행됐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CIA에 대한 케네디의 신뢰가 추락했다. 이후 CIA의 해외 공작을 케네디가 자주 제지하면서 CIA는 대통령을 갈아치울 계획을 세웠다는 것.

케네디 당시 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이 뇌물 수수 등 자신의 정치적 스캔들을 책망하던 케네디를 죽이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려 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동서 냉전이 최고조를 이루던 당시 소련이 케네디 암살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물론, 가톨릭 신자였던 케네디가 아랍 정부를 옹호하고 자신의 핵개발을 저지하려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정보조직이 케네디를 죽였다는 음모론까지 대두됐다.

▲ 10년 이상 케네디 암살 장소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음모론 관련 책자를 팔고 있는 제임스씨와 그가 파는 '음모론 신문'.
ⓒ 신기해
음모론 전도사들 "이 사진을 보세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는 케네디 암살. 미국 사람들은 공식 진상조사 결과 보다 음모론에 더 솔깃하다. 2003년 ABC 방송의 조사에서 70%의 미국인들은 아직도 "케네디가 음모에 의해 살해됐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1일 케네디 암살 장소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10년 이상 음모론을 소개하는 책자를 팔고 있는 제임스를 만났다. 그는 그 70%의 미국인들 중 한 명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사진을 보세요. 케네디가 타고 있던 차가 지나가려던 저 앞쪽 다리 위에 정체 모를 한 사람이 급히 몸을 숨기는 게 보이죠. 그가 분명 제2의 암살자였을 겁니다. 그 동안 진상위원회는 이 사진을 전혀 조사하지 않았어요. 다리 위에는 분명 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하수구가 있어 이 암살자가 다른 곳으로 쉽게 피할 수 있었는데 위원회는 조사하지 않았죠."

곁에서 그의 설명을 듣는 서 너 명의 관광객들은 그의 말을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가 설명한 다리를 연신 카메라에 담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그 중 몇 명은 주머니를 털어 제임스가 건낸 잡지와 신문을 사 들었다.

같은 장소의 또 다른 음모론 전도사인 로버트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 그림을 보세요. 진상조사 위원회는 오스왈드가 쏜 첫 번째 총알이 케네디의 목을 통과한 뒤 케네디 앞쪽에 타고 있던 당시 텍사스 주지사 코넬리의 오른쪽 어깨 부분을 통과했다고 밝혔죠. 하지만 왼쪽으로 날아가던 총알이 어떻게 방향을 갑자기 바꿔 코넬리의 오른쪽 어깨를 지날 수가 있죠?"

▲ 음모론 박물관
ⓒ 신기해
케네디 암살 공식박물관이 있는 곳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는 사설 '음모론 박물관'이 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 위해 잠시 문을 닫았으나 한창 음모론에 대한 전국적 관심이 일 때는 하루 수 백 명이 이곳을 들렀다. 공식 박물관보다 관광객 수가 더 많았던 것.

이 박물관에는 케네디 암살과 음모론을 보도한 당시 신문들, 오스왈드와 그를 암살한 잭 루비에 대한 기사와 소장품들, 음모론 관련 각종 책자들이 전시돼 있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대통령

이런 음모론에 대한 끊이지 않는 관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암살 사건을 둘러싼 추리 자체가 매력이기도 하지만 케네디에 대한 미국인들의 진정한 추모에서 나온 관심이다.

재임 기간 3년이 채 안 되는 대통령에 대해 미국인들은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이나, 노예 해방의 영웅 에이브러햄 링컨만큼이나 케네디에 대해 존경심을 감추지 않는다. 그가 남긴 프론티어 정신, 우주 계획, 쿠바 미사일 위기 타개 등의 업적은 이런 존경의 부차적인 원인이다.

43세에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미국인들의 뇌리에 '희망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는 진정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외교관의 자녀로 태어나 프린스턴, 하버드대에서 수학한 그가 2차 대전에 형과 마찬가지로 해군으로 참전해 목숨을 무릅쓰고 부하를 구해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었다.

올해 12월 19일 한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다. 몇몇 유력 후보자들에 대한 잡음이 벌써 나오고 있고 부동산 투기, 병력기피 문제 등이 불거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댈러스를 배회하고 있는 케네디의 유령은 이런 한국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태그:#케네디, #댈러스, #유령,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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