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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인데도 안개가 짙다. 섬진강 댐에서 피어난 저녁 안개가 밤새 서리로 내려앉았다. 자동차 유리가 하얀 도화지다. 그 서리를 보는 순간 유리창에 '누구 바보'라고 써놓았던 유년시절이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산불감시원 일을 하려고 출근하자, "하지 안녕!" 손을 흔들고 어디론가 총총히 걸어가는 손녀. 혼자 가는 길을 뒤따라간다.
"할머니 어디 있어!"
"저기! 저기!"
뒷짐을 지고 걸어가는 아이 손을 잡고 돼지 축사를 가로질러 앞산에 이르렀다. 할머니의 인기척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돌아가자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 아니!"하며 비탈진 산길을 오른다.
"솔우야 나 간다!"라고 외치고 풀숲에 앉아서 동태를 살폈다. 뒤돌아보는 기척도 없이 뒷짐을 지고 오른다. 영락없는 할아버지 폼이다. 한참을 오르다가 뒤돌아본다. 쫑긋 솟아오른, 혼자라는 무서움에 소리를 지른다.
"한머니! 어디 있어! 우 왔어! 한머니!"
메아리도 대답이 없다. 할머니를 찾아 발걸음이 빨라진다. 가파른 산을 오르는 눈길이 불안하기 시작했다. 마른 풀숲에서 나온 꿩처럼 총총히 뒤따라 오른다.
나를 본 순간,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는다. 손녀의 불안한 마음을 감지한 할머니가 커다란 함지박을 이고 산비탈을 내려오고 있다. 할머니 머리끝 함지박에서 햇살을 노랗게 반짝이며 꽃들도 웃고 있다.
"한머니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뛰듯이 걸어가는 손녀, 내리사랑으로 달려오는 할머니. 함지박을 끼지 않는 한 손으로 덥석 품에 안는다. 할머니와 손녀의 산골 이야기 영화 촬영 한 장면 같다.
손녀는 할머니가 무거울까봐 함지박 안에서 호미를 한 손에 챙긴다. 호미를 잡은 손녀의 손을 잡고 내려오는 할머니, 얼굴에 달덩이 같은 행복의 미소가 떴다. 뒤따라 내려가는 내 발걸음도 흥겹다. 행복은 이렇듯 쉽게 전이되는 것일까?
할머니는 동네에서 가장 젊다. 그래서 마을을 가꾸는 것은 젊은 할머니 몫이다. 마을을 야생화 꽃밭으로 만들고 있다. 할머니는 집에서 씨로 번식한 할미꽃을 깨진 항아리에 심고, 산비탈에서 방금 캐온 아직도 땅의 온기가 남아 있는 복수초를 함께 심는다. 손녀는 그 아래에서 할머니에게 흙을 주기 위해 작은 괭이로 흙을 파고 있다. 할머니가 복수초를 심으며 노란 꽃봉오리를 터트리듯이 혼잣말을 한다.
"일본에서는 복수초가 관상용으로 판매되는가 봐요. 이유야 어쩌든 야생화는 산에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죄다 뽑아 가니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옮겨 심고 있어요. 동네 주변에 심어 놓으면 사람들이 함부로 뽑아가지 못해요.
이 할미꽃은 정갈해요. 양지 바른 언덕이면 지천으로 피어나던 할미꽃이 농약과 비료 때문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어요. 그보다 못된 '할미꽃이 어디에 좋다더라' 하는 한국 사람들의 중증 건강관리가 할미꽃 씨를 말리고 있는 것이죠."
"한머니 여기 꽃이 떨어졌어."
"어머 그렇구나. 꽃이 많이 아프겠지."
"호야 해야지, 호-호-"
수줍어 고개를 숙인 할미꽃처럼 자연에 대한 인간의 교만은 언제쯤이나 겸손해질 수 있을까. 양지 바른 언덕에서 받은 씨를 뿌려서 키운 할미꽃, 그 모종을 옮겨 심은 화분을 덮어둔 비닐을 걷어낸다. 이제 막 꽃봉오리를 열기 시작한 보송보송한 잔털에서 햇살이 눈부시다. 언제쯤이나 양지 바른 곳이면 어디서든지 할미꽃이 햇살과 손잡고 어린 아이처럼 뛰놀 수 있을까.
"아니 여기 꽃이 하나 피었네!"
"어디! 한머니! 우와 예쁘다! 음-, 한머니는 꽃을 만드는 기술자야!"
"솔우처럼 어린 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