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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시간대 방송되는 대하사극의 틈바구니에서 MBC의 <하얀 거탑>이 보여주는 선전은 의외이고 놀랍다. 모처럼 선 굵은 남성적 드라마를 현대극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선 반갑다.

드라마는 한 의사의 입신양명을 향한 욕망과 좌절을 탁월한 심리묘사와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성격, 다소 과장한 장소와 사건구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본격 의학드라마라기보다는 출세지향의 한 인간이 겪는 성공과 몰락의 정치적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마침 전국의 극장가에는 멕시코 출신의 천재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바벨>이 영화마니아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필연과도 같이, 혹은 우연처럼 엮인 사건과 인물, 그리고 장소를 씨줄과 날줄 삼아 현대인의 소통 부재와 단절, 그로 인한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드라마 <하얀 거탑>과 매우 닮았다. 그 중 제목에 은유적으로 숨어 있는 '탑'이 상징하는 것은 특히 흡사하다.

무너져 내린 탑 - 의심으로 세운 탑

바벨은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빌로니아의 고대 도읍이다. 성서에 의하면 인간의 언어는 하나였으나 인간이 하늘에 도전하는 탑을 쌓아올리자 신이 분노하여 언어를 혼잡하게 하였고, 그 때문에 인간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신은 그들을 온 땅으로 흩어버리고 그 사이에 혼돈과 단절을 만들었으니 바로 그때 그곳의 이름이 곧 바벨이다.

노아의 후손들은 왜 탑을 쌓아 올리게 되었을까? 그것은 가장 높은 탑을 세움으로써 자기 민족의 이름을 만방에 떨치고 또한 대홍수와 같은 신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성서에 의하면, 그러나 그들의 민족신은 다시는 물로써 그들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 불신이 가져온 신의 형벌이 바벨탑의 일화이다. 바벨이란 '그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이제 사람들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고, 이전에는 교통하였던 신의 음성 또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 사이의 단절, 신과 인간 사이의 단절로 말미암은 고통의 현대적 이름은 불안과 소외이다.

영화는, 언어는 있으나 서로 진정을 주고받지 못하는 의사불통 의사부재의 우울한 고독과 고립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카메라는 한 장소에 머무르지 못하고 모로코의 사막과 LA의 가정과 멕시코 국경지대의 사막, 그리고 도쿄의 어두운 빌딩 숲을 바쁘게 돌아다닌다.

▲ 영화 바벨의 한 장면
ⓒ babel2007.co.kr
영화의 첫 장면으로 등장하는 사막이 곧 우리가 내동댕이쳐진 삭막한 현실의 터전이라면, 적막하고 황량한 사막의 무료를 깨는 날 선 총성은 우리의 단절을 경고하는 신의 진노다. 신의 진노는 의심으로부터 온다. 신의 약속을 믿었더라면, 무너져 내린 바벨탑의 운명은 애초부터 쌓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양치기 형제가 총을 건넨 이웃 노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여행 중인 미국 여인이 애꿎게 관통상을 입고 생의 기로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의심에서 비롯된 한 발의 우연한 발사가 무료한 사막을 순식간에 테러의 공포에 휩싸이게 하고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를 경악시킨다. 한가로운 여행을 즐기던 관광객 일행은 졸지에 테러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테러대상이 되고 평화롭던 사막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포의 현장이 된다.

그러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는, 총을 맞은 수잔과 그녀를 사랑하는 리처드의 공포일 뿐, 다른 이들에게는 실재하는 공포와 불안은 아니다. 그럼에도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의심한) 관광객들은 죽음의 공포를 자신들의 것으로 단정해버린다.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무기력과 관성처럼 길든 의심 탓이다.

의심은 곳곳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현실을 사는 우리들의 운명을 조롱한다. 국경검문소의 경찰이 멕시코인에 대한 의심이 없었던들, 아멜리아(가정부) 조카의 의심에 찬 도주만 없었더라면, 무엇보다 리처드와 수잔이 제때에 귀국하여 아이들을 돌볼 수만 있었더라면 아멜리아가 추방되는 운명의 심술은 없었을 것이다. 어미의 자살이 없었더라면, 또한 농아가 아닌 정상인이었다면 알몸으로 울어야 하는 치에코의 불안이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

▲ 드라마 <하얀 거탑> 중 장준혁의 재판 장면
ⓒ imbc.com
의심의 그늘에서 피어난 불안의 공포는 의사 장준혁을 파멸로 몰고 가는 단초다. 최고의 실력을 겸비한 외과의로 그려지는 그가 왜 올바른 수단을 통하여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장인의 돈과 권력자에 대한 굴종을 통해 욕망을 실현해야 하는지, 그것은 자기불신이자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출세를 위해 부정을 서슴지 않는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관계'와 세계에 대한 불신이다.

<하얀 거탑>이 의학드라마라기보다는 한 남성의 야망쟁취드라마라는 데에도, 수단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를 떠나 야망을 가진 남성이라면 장준혁에 대한 심정적인 지지를 떠올리게 된다는 박형준 기자의 지적에 동의함에도, 장준혁은 무책임한 자기 과신과 수단을 등한시한 채 오직 출세에의 욕망에만 사로잡힌 인간파국의 전형으로 보아야 함이 마땅하다.

극적 전개의 긴장감을 위해 설정된 캐릭터와는 무관하게, 욕망의 실현을 위한 수단의 도덕적 가치를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을 부정하는 한 우리의 세계는 바로 지옥이다. 세태가 그럴수록 우리의 가치 판단은 더욱 엄정해야 한다. 모든 생명이 똑같이 고귀한 것이라면 자신의 출세욕을 위해 (살릴 수 있는) 한 생명을 등한시한 장준혁은 의사로써도 자격이 없다. 그가 쌓은 욕망의 탑은 바벨탑일 뿐이다.

세워야 할 탑 - 의심을 무너트릴 탑

한편으로 의심은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고 전망을 생산하는 씨앗이다. 문명과 과학의 발전은 의심으로 수태되었다. 뉴턴의 의심과 궁금증이 없었더라면 그의 과학적 발견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학적 사유의 출발은 의심에서 잉태된다. 의심이 없다면 우리의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얀 거탑>에는 장준혁과 대비되는 인물로 의사 최도영이 등장한다. 참으로 의심이 많은 인물이다. 우선 자신의 실력부터 자신하지 못하는 이 소심한 의사는 그래서 연구에 정진한다. 앞서 언급한 기자의 판단처럼 이론가형 의사인 까닭이 아니라 병 혹은 의료기술에 대한 많은 질문과 의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연구에 정진하는 것이다.

▲ 드라마 <하얀 거탑>의 한 장면
ⓒ imbc.com
'혹시나?' 하는 그의 의심을 장준혁이 한번쯤 들어주었던들 적어도 한 생명이 어처구니없이 죽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염동일의 건의를 그렇게 무참히 무시하지만 않았던들 자신의 명성에 먹칠하며 법정에 서지도, 유가족의 가슴에 피멍을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의사로써 당연히 가졌어야 할 병태에 대한 겸손한 의심을 가지지 않음으로 해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강을 건넜다 할 수 있다.

바벨의 주인공들은 파국을 면하기 위해, 서로와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와 관계 사이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다. 미국인 부부 리처드와 수잔의 여행은 그래서 시작된 것이고 뜻하지 않은 생의 기로에서 그들은 서로에 대한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에 이른다. 농아인 치에코 역시 불쑥 찾아온 낯선 남자(형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나서야 자신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얻고 아버지와 화해에 이른다.

'탑'은 인간의 염원과 열망을 상징한다. 바빌로니아인들이 바벨탑을 세운 것은 신에게 도전하고자 한 거역의 역사(力事)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한 인간의 희원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탑에 머리를 조아리고 신심을 다해 무엇인가 비는 것은 우상을 섬김이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힘겨운 숙명에 대한 자신의 위안과 위로는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어차피 다다르지 못할 하늘 혹은 이루지 못할 염원의 상징으로써, 감히 도전해서는 안 되는 불경의 영역으로서의 탑이 아니라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며 하루하루 한단, 한단 높아지는 열망의 탑을 쌓아야 한다. 장준혁이 쌓는 바벨탑과도 같이 부서져 내릴 그릇된 욕망의 탑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언 방 찬바람 속에서도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 탑을 쌓으라고…. 영화와 드라마는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덧붙이는 글 | *TV 리뷰 평가단 응모 기사
*ncn뉴스(ncnnews.co.kr)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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