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조선후기 3재로 불릴 만큼 뛰어난 화가였다.
이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들 중에서 독특한 실학적 화풍을 남긴 이가 공재 윤두서다. 이러한 화풍엔 그가 평소 생활 속에서 추구한 실학이 담겨있는데, 해남윤씨가의 가풍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밑바탕으로 공재의 미술세계는 사실주의와 풍속화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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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의 선구자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살았던 시대는 숙종 시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고 지식계급은 분열됐다. 선비들은 낙향하여 벼슬을 멀리하게 되었으며, 양반사대부들도 지배체제 내부의 모순에 대하여 비판의식을 싹틔우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뜻있는 학자들에 의해 현실성을 상실한 학문을 바로 잡고 우리나라의 현실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위해서 새로운 학풍인 실학이 일어나고 있었다. 숙종 시대는 이러한 실학사상의 발생과 더불어 신문물이 유입되고 각 방면에서 진취적인 기상이 엿보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그동안 주자학의 관념성에 회의를 느끼고 실사구시의 학문적 경향을 보인 학자들이 사물과 자연에 대해 사실적인 묘사를 강조하게 된다. 하나의 이상적인 자연을 묘사하기보다는 개개 자연의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하는 경향이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활동한 윤두서는 조선 양반사회에서 하층민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이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새로운 장르의 풍속화를 창조한 화가라 할 수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자화상>으로 대표되는 사실주의적인 작품과 함께 풍속화의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작품 중에 <채애도(採艾圖)>, <짚신짜기>, < 시차도(施車圖)>, <석공도>등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들 풍속화는 본격적인 조선시대의 풍속을 다룬다는 점 뿐만 아니라 농공(農工)과 서민생활을 그림의 소재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사대부 출신이었던 윤두서가 이처럼 민중적인 것을 소재로 다룰 수 있었던 것은 공산기예(工産技藝)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가졌던 그의 실학성과 박학(博學)을 추구하는 집안의 학문경향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까지 회화에 나오는 인물의 주인공은 대부분 선비와 신선 아니면 고작해야 미인 정도였던 것을 볼 때 이러한 서민을 중심으로 한 인물의 등장은 조선시대 회화사에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하였다.
공재에 이르러 나물 캐는 아낙네와 짚신 삼는 농부가 선비의 자리, 신선의 자리를 밀어내 당당히 주인공이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공재의 <짚신삼기>와 <나물캐기>는 조선 사회에서 서민의 위치가 전과 다르게 주목되고 있고, 그러한 시대조류를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공재는 기존의 전통적인 화법과 필법을 충실하게 계승하여 자신의 그림과 글씨의 밑바탕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글씨에 있어서는 옥동 이서와 함께 이른바 <동국진체>를 창안하였다. 그림에 있어서는 당시 새로이 대두하는 남종문인화를 수용하고 사실적 묘사를 강조하면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선구를 이끌었다. 이런 점에서 공재는 변혁기의 새로운 변화를 창조하였던 선구적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명확히 인식하면서 대담한 자기 결단과 자기 갱신으로 종래의 화가들은 생각지 못한 '속화(俗畵)'까지 그리면서 18세기 사실주의 회화의 길을 열어갔다. 중국에서는 남종문인화의 성과를 목판본으로 담은 각종 화보(畵譜)가 발간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고씨화보>이다. 고씨화보는 명나라 때인 1603년에 고병(顧炳)이 편찬한 그림책으로 그 원명은 <고씨역대명공화보>이다.
공재는 1614년 공재의 처 증조부인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을 통해 <고씨화보>의 내용을 알았다고 한다. 미수 허목은 <고씨화보>에 실린 문징명 그림을 보고서 그림의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고씨화보>가 제작되고 수입된 지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 공재가 처음으로 이 화보를 통해 남종문인화라는 새로운 미술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공재는 화본을 무작정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자기화하고 대상을 직접 사생하며 회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사실주의의 극치 '자화상'
공재의 그림 중에 가장 대표적인 '자화상'은 자화상 중 가장 빼어난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극 사실주의적인 그의 그림을 서양화법에 대한 이해와 시도로 보기도 한다. 공재는 현실을 직시하고 실용을 중시하였는데 그는 실학적인 학풍을 통해 사실주의에 입각한 회화의 세계를 열어간다.
공재의 회화는 철저한 사실주의 정신에 의해 그려졌으며 이는 현실을 직시하고 실용을 중시하였던 해남윤씨가의 학풍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재가 그린 여러 인물화 가운데 자화상은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한 인간의 외면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공재 자신의 내면적인 미묘한 정신세계가 훌륭하게 표출되어 있다. 볼륨 있는 얼굴, 움직이는 듯한 수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는 그의 정신세계를 말해주는 듯하다. 그의 자화상은 사실주의적인 화풍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윤두서가 평생 추구한 실득의 결과였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이처럼 실사에 비추어 증험하고자 하였던 그의 사생정신을 보여준 작품이자 서양화법을 실험한 작품이기도 하다. 자화상을 보면 얼굴부위를 정면으로 부각시켜 직접적인 인상을 강화시키고 얼굴의 입체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윤곽석 부위에 선염(渲染)처리를 하였다. 이것은 서양화의 음영표현과 유사하여 서양화법의 영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말을 좋아한 공재의 마벽
공재의 그림 중에서 가장 많은 대상이 된 것 중에 하나가 말 그림이다. 마치 말 애호가라도 되는 듯 여러 형태의 말 그림을 찾아 볼 수 있다. '공재공 행장'을 보면 그는 일찍부터 마벽(馬癖)을 갖고 있어 항상 준마를 길렀다고 하는데, 자제들이 교외나 먼 곳에 출입하더라도 말을 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공재가 멀리 갔다 와야 할 일이 생겼으나 말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말을 빌려 타고 가야했다. 그가 여행 도중에 말의 주인을 물으니 말이 역마(驛馬)인줄 알게 되자 그 말을 즉시 돌려주고 걸어서 다녀왔을 만큼 말을 함부로 타지 않고 사사로이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재는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만큼 말의 모습을 그릴 때 한참이나 관찰한 후에 그 성질을 파악하여 그렸다고 한다. 말은 보통 무(武)를 상징하기 때문에 조선 사대부가에서 말을 사랑한다는 것은 독특한 취미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특히 백마를 대상으로 한 것은 자신이 추구한 하나의 이상적 대상이기도 하였다.
공재는 말이 지닌 굳셈, 충직, 희생과 더불어 백마의 상서로움, 당당함과 의연한 풍모를 지닌 백마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최고의 서화 비평가였던 남태응(南泰應, 1687~1740)은 공재의 말을 아주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대표작 중에 '유하백마도'를 보면 강변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하얀 말이 한 마리 서 있는데 말의 자태가 당당하고 기품 있게 잘 그려져 있어 이러한 모습을 잘 엿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