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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사진을 촬영 하자 남편 한명석씨가 "북한사람 사진처럼 나오면 어쩌지"라는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오른쪽부터 아들, 한명석씨, 김영란씨, 큰딸, 외손녀들)
ⓒ 이화영
어른들이 살아온 인생보따리를 풀기 전에 흔히 "3박 4일 얘기해도 다 못하고, 내가 살아온 거 책으로 쓰면 소설책으로 몇 권을 족히 될 것"이라고 말한다.

충북 음성에서 '된장아줌마'로 통하는 김영란(51)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지난 32년간의 결혼 생활에 대해 "목숨 걸고 살아왔다"고 말할 정도로 질곡의 세월을 토해냈다.

[첫 만남] 몸이 불편한 친구와 결혼한 사연

ⓒ 이화영
6남매 중 5번째로 태어난 김씨는 그리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면소재지에서 가장 큰 집에 살아 부보상들이 딱히 기거할 곳이 없으면 이곳에서 고단한 몸을 누이곤 했다.

라디오가 흔치 않던 시절 고모 댁에 놀러 갔다가 라디오를 통해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사연과 함께 주소를 듣게 된다. 이때부터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해 3년 4개월 동안 지금의 남편과 우정을 쌓아갔다. 서울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던 4촌 오빠를 만나러 가는 길에 경유지였던 친구의 집을 방문해 첫 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친구는 '나중에 보자'고 했을 뿐 문을 잠그고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자신을 보여주길 거부했던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편지를 주고받을 당시 조금 불편하다고 해 목발을 짚고 거동하는 정도로 여겼는데 생각보다 많이 불편했던 것.

그동안 친구는 흙벽에 작은 구멍을 내 유리를 끼워놓고 밖을 내다보며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전부였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인 집 밖으로 한걸음도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막차를 놓쳐 하루를 잤는데 다음날 친구 어머니가 일어나지 않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가끔 심하게 앓아눕는데 공교롭게 김씨가 온 다음날부터 자리를 보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 김영란씨가 "지금까지 목숨걸고 살았다"며 지난 삶을 얘기하다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 이화영
설상가상으로 당시 고1이었던 친구 여동생마저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어머니가 아프면 학교에 못 가게 하기 때문에 미리 집안을 빠져나간 것이다. 김씨는 그때부터 친구 가족들을 위해 밥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19살이던 김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가족들을 누가 보살피나,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3명의 친구 여동생(고1·중1·초2)들 사이에 끼어 자면서 밭일을 비롯해 쉴 틈 없이 일을 했다. 한 달이 지나자 '내가 가면 가족들이 못살 것 같다'는 생각은 굳어져 버렸다. 집에 못 가겠다는 내용으로 친정에 편지를 보내자 집안어른과 한번 다녀가란 답장을 받고 당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친구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꾸지람을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어머니는 '널 믿는다, 모래성을 쌓는 심정으로 살아라'는 말과 '아버지 없이 컸다는 소리 듣지 않게 잘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들었다. 그때 상황을 언급하던 김씨는 복받치는 감정에 눈가가 불거지더니 이내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 이후 결혼을 했지만 아버지처럼 여기던 큰오빠는 결혼식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고 어머니와 동생은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다. 하지만 김씨는 서운한 감정보다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었다.

결혼 초기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논 몇 마지기에 팔려 온 것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김씨의 여린 마음에 화살이 되어 꽂혔다.

[시련의 파도를 넘어] "이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막상 결혼은 했지만 생활고가 큰 문제였다. 시아버지의 얄팍한 월급으로 7명의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언제나 모자랐다. 차례로 아이가 태어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고 젖이 모자라 갓난아이에게 설탕물을 떠먹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이사한 동네에서 구판장을 지어 운영자 신청을 받고 있었다. 시아버지께 말씀드리자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 막걸리 장사 못 시킨다"며 완강히 말렸다. 보름을 조른 끝에 허락을 받고 도매상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들여 장사를 시작했다.

김씨는 뜬금없이 '우리나라에서 부가가치세가 시행된 것이 언제냐'고 물어왔다. 대답을 못하자 1977년 7월 1일이라고 일러주면서 "그날이 내가 장사를 시작한 날이었다"며 너무 기뻐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장사뿐만 아니라 남의 밭을 얻어 틈틈이 농사도 지었다.

도매상에서 물건을 해올 때면 차비를 아끼기 위해 아이를 업은 김씨는 뚝방에 물건을 올려놓고 그 아래로 내려가 물건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른 아침 물건을 하러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오후 3∼4시가 된다. 밥값을 아끼려고 점심을 걸러 허기도 지고 녹초가 된 상태에서 먹었던 막걸리 맛을 지금도 못 잊고 있다.

장사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자 김씨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세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통편이 문제였다. 휠체어가 없어 남편을 업고 다니다 보니 힘도 들었거니와 70년대만 해도 택시 기사들은 '재수 없다'며 장애인들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 가족들의 발이 되어준 빛바랜 사진 속의 '노란차'
ⓒ 한명석
공업사에 부탁해 남편이 운전할 수 있도록 삼륜차를 개조하고 눈에 잘 띄도록 노란색으로 색칠을 했다. 이 차를 이용해 인근의 명소는 안 가본 곳이 없으며, 특히 충주댐은 너무 자주 가 수자원공사에서 개근상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이 차는 김씨 가족에게 행복과 추억을 가져다준 발이 되어 줬다.

하지만 무면허 상태로 운행을 하다 보니 늘 불안했다. 그 당시 경찰들은 "이게 뭐야 차야? 신기하네"하며 보내주곤 했지만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다닐 수가 없다는 생각에 남편의 운전면허 취득을 돕기로 결심했다.

가족을 세상과 연결해 줄 운전면허증은 이들 부부가 반드시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존재였다. 첫 단계인 운전을 할 수 있는지 능력을 검사하는 과정부터 벽에 부딪혔다. 능력시험장의 차량이 파워 핸들이 아니어서 팔 힘이 떨어지는 남편이 조작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담당 경찰관은 "안 된다"고 잘라 말하곤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한다며 사무실 문을 잠갔다. '이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다'고 생각한 김씨는 "허락해 줄 때까지 가지 않겠다"며 버텼고, 점심을 먹고 돌아온 경찰관은 "이 아줌마 아직도 안 갔네"라며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4∼5시간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핸들을 돌리기 쉽도록 하는 장치를 부착할 것을 조건으로 허락을 받고 나니 이미 마음은 운전면허증을 거머쥔 기분이었다.

교재가 없어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남편이 걱정돼 필기시험장 방범창을 사이로 시험 보는 남편을 지켜보며 합격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는 걸 알았는지 채점을 마친 경찰관은 손으로 원을 그리며 합격했음을 표시해줬다. 합격점수 70점에 1점도 틀리지 않게 턱걸이로 합격을 한 것이다.

실기시험장은 응시자 이외에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끈으로 된 저지선이 둘러쳐져 있었다. 김씨는 실기시험을 알리는 총소리와 동시에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남편이 합격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덕을 오르는 시험코스에서 시험장 관계자들에 의해 끌려 나와야 했다. 시험장에서 나오라는 방송을 수차례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 방송이 김씨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부부의 노력에도 시험 결과는 '불합격'. 시험 마지막에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떨어진 시험 결과를 김씨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곧바로 감독관실로 향했고 "깜빡이를 켜고 안 켜는 것이 불합격시킬 만큼 큰 잘못이냐"며 합격시켜 줄 것을 사정했다.

그동안 노력한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복받치는 설움에 눈물을 흘리자 감독관은 "왜 우느냐? 아줌마 같은 사람 처음 봤다"며 마지못해 합격을 시켜줬다. 그 이후 이 시험장에선 면허를 따려면 음성 김씨 아줌마처럼 열의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 돌기도 했단다.

(* 2편이 이어집니다.)

▲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점심 상을 차리고 있는 김영란씨
ⓒ 이화영

덧붙이는 글 | 이화영 기자는 공무원노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김영란, #충북 음성, #선돌메주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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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의 아빠입니다. 이 세 아이가 학벌과 시험성적으로 평가받는 국가가 아닌 인격으로 존중받는 나라에서 살게 하는 게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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