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숨을 마지막으로 에티오피아 북부 4대 역사유적지 여행을 모두 마치고 닷새 만에 아디스아바바로 돌아가는 날. 에티오피아 여행의 가장 중요한 일정을 마쳤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한결 가볍다.
비행기 안에서 보니 오른쪽으로 멀리 시미엔 산맥 국립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험준한 계곡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아름다운 시미엔 산맥은 바분 원숭이와 산양, 늑대, 왈리아 이벡스 등 야생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날씨가 좋아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땅 위의 모습들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마치 카메라 줌으로 당긴 것 같다. 황량한 산 사이로 흐르는 깊은 계곡은 평지에서 구불구불 흐르는 강줄기로 변했다. 가뭄으로 바짝 마른 강줄기는 사람의 내장을 보는 듯도 하고, 독사가 몸을 비비 꼬면서 앞으로 기어가는 모습 같기도 하다.
@BRI@나는 그 유명한 동아프리카대지구대 위를 날고 있는 것이다. 이 곳은 지층이 갈라져 어긋나면서 생긴 골짜기인데, 북으로 서아시아 요르단협곡으로부터 남으로 모잠비크의 델라고아만에 이르는 6000㎞의 세계 최대 골짜기이다.
에티오피아의 크고작은 호수와 케냐의 투르카나호, 탄자니아의 탕가니카호, 말라위의 말라위호 등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호수들이 이 지구대를 따라 만들어졌다. 인간의 발자취를 알려주는 루시 등 고대 인류 화석 등이 발견된 장소이기도 하다. 나의 아프리카 종단여행도 비행기 아래 보이는 동아프리카대지구대를 따라 걸어가는 것이다.
오랜 옛날 푸른 강과 우거진 숲으로 가득 찼을 산맥들은 벌거벗은 듯 황량하기 그지없다. 하얀 구름 덩어리가 밀려나자 산자락에는 다시 강렬한 햇살이 내리쬔다. 구름도 잠시 스쳐갈 뿐인 에티오피아 산은. 나무마저 없어 더욱 따가울 것 같다.
이 곳은 들판뿐만이 아니라 산들도 거의 사막화되었다. 나무를 땔감 등으로 모두 베어버리다 보니 벌거숭이산가 되고, 들판은 무분별한 유목으로 초지가 사라진 것. 여기에 지구온난화가 더해지면서 땅들은 속수무책 발가벗겨지고 있었다.
자연을 파괴한 결과는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야산의 황폐화는 식량부족과 기아를 불러왔다. 어디를 가든 나무 땔감을 등에 실은 노새나 머리에 이는 여인네들을 볼 수 있었다. 곤다르에 가까워서야 타나 호수 주변을 따라 푸른 숲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비자발급에 초청장 요구하는 황당한 나미비아 대사관
아디스아바바 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1시 30분. 에티오피아 여대생들과 작별인사를 한 뒤 택시를 타고 먼저 미리 비자를 받기 위해 말라위 대사관으로 갔다.
아프리카 종단여행 대상 14개 국가 중에서 미리 비자를 받아야 하는 곳은 말라위와 나미비아였다. 다른 국가들은 공항·국경에서 사진 한두 장과 30∼50달러만 내면 바로 비자를 발급해주는데, 말라위와 나미비아는 유독 대사관을 통해서만 비자를 발급한다. 이처럼 자국 대사관의 추천서나 현지인의 초청장을 요구하는 경우만큼 배낭여행객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없다.
말라위 대사관 직원은 "한국 대사관의 추천서(Letter)를 가져오면 비자를 내주겠다"고 하길래 시간도 없는 데다 어차피 다음 행선지인 탄자니아에 가서 받으면 되기 때문에 깨끗이 포기했다.
더 황당했던 곳은 나미비아 대사관이었다. 대사관은 커다란 철제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벨을 누르니 대사관 여직원이 나온다. 키 180㎝가 넘을 정도로 장신이다.
"여행 비자를 받으러 왔다."
"초청장이 있느냐?"
"무슨 초청장을 말하느냐?"
"나미비아 국민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사람한테만 비자를 내주고 있다."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배낭여행객이 나미비아에 아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초청장을 요구하다니. 대문을 닫고 들어가려는 여직원에게 "나미비아에 친척이 없는 사람은 방문도 하지 말라는 뜻이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는 "당신, 말뜻을 못 알아듣느냐"라며 신경질이 난 듯 대꾸한다.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나는 속으로 혹시 미국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당시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트 피트가 자신들의 아이를 낳은 나미비아 해안가 도시 스와콥문트에 머물고 있었는데, 파파라치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미비아 정부에서 언론인들의 입국 비자발급을 까다롭게 한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안젤리나 졸리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에티오피아의 커피 세리모니
나는 처음 묵었던 바로호텔 대신 바로 맞은편 우트마 호텔로 숙소를 바꾸었다. 가격도 조금 싼 데다 깨끗하고 1층에는 식당도 딸려있기 때문이다. 숙소에 배낭을 내려놓고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데 코끝을 유혹하는 은은한 향취가 날아왔다. 식당 모서리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여학생이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에티오피아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커피 세리모니(Coffee Ceremony)'를 하고 있었다. 나는 식사를 마친 뒤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여학생 옆에 앉아 커피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커피의 원산지답게 에티오피아 어디서나 커피를 즐겨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원두에서부터 커피를 직접 만드는 과정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여학생은 우선 식당 안에 있는 숯불 화덕 위에서 프라이팬 모양의 철판에 커피 원두를 넣어 30여 분간 골고루 볶았다. 커피 원두가 구워지면서 식당 안에는 나무타는 냄새와 함께 독특한 커피 내음이 풍기기 시작했다. 볶은 원두는 종업원이 식당 밖에 있는 나무절구통으로 가져가 무쇠공이로 빻아 가루로 만들었다.
밖에서 커피 원두를 빻는 동안 여학생은 숯불 화덕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끓였다. 물이 어느 정도 끓자 절구통에서 빻은 커피 가루를 주전자에 넣고 약 10분 정도 더 끓였다. 커피가 다 끓었는지 여학생이 작은 도자기 잔에 커피를 그대로 따라 주었다.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양도 적고 맛도 쓴 듯 하면서 진한 것이 독특하다. 스페인의 알람브라(Alhambra) 궁전에 갔을 때 마시던 에스프레소 커피보다 훨씬 더 쓰고 강렬하면서도 투박한 느낌이었다. 커피에는 설탕을 넣거나 '아담의 건강'이란 뜻의 '테나 아담'이란 일종의 허브 풀잎을 넣어 주기도 한다.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는 이처럼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와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은 브라질이지만, 애초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해 예멘과 아랍지역을 거쳐 유럽과 아시아 등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커피(Coffee)라는 이름 자체가 에티오피아 서부지역에 있는 커피 산지인 카파(Kaffa)라는 지역이름에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좋아하는 모카(Mocha) 커피는 에티오피아 하라르 지역에서 나는 가장 향이 강한 커피를 말한다. 하라르 지역의 커피가 홍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아라비아반도 예멘의 항구도시인 모카 항을 통해 유럽 각지로 수출되다 보니 유럽 사람들이 항구이름을 따서 모카커피라고 부르게 된 것. 커피는 해발고도 1500~1900m의 물이 충분하고 서늘한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서 주로 자란다.
이슬람의 음료인 커피와 기독교의 음료인 와인이 가져온 문명의 차이
커피 발견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에티오피아의 한 목동은염소가 빨간 열매가 달린 나무의 열매와 잎을 먹은 뒤 갑자기 활기를 되찾고,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눈을 말똥말똥거리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목동이 찾아낸 나무가 바로 커피나무라는 것.
커피는 에티오피아 정교회 수도원의 성직자들뿐 아니라 이슬람 사원의 성직자들에게도 졸음을 쫓아내면서 수행과 명상, 기도를 돕는 식품으로 애용되기 시작했다.
커피는 이슬람에서 알라 신의 선물로 여겨졌고, 와인은 기독교에서 예수의 피로 숭배됐다. 커피가 이슬람의 음료로 불리고, 와인이 기독교의 음료로 불리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역사적 연원이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졸음의 고통을 이기려 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준 음료가 바로 커피라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또 예수는 포도주에 대해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라고 말했다.
독일의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은 <커피의 역사>라는 책에서 "냉철하면서도 정열적이고 정열적이면서도 침착한 아랍문명은 커피의 효과와 연관이 있다"며 "알람브라 궁전에서 바그다드 모스크에 이르는 건축의 특징적인 양식은 커피를 마시는 이들이 이룬 것이지, 결코 와인을 마시는 술꾼들이 이루어낸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각성효과가 있는 커피가 정교하고 섬세한 아라베스크 문양의 이슬람 건축 양식을 가져왔다면, 수면효과가 있는 와인은 육체의 운동과 정신의 격동을 표현한 헬레니즘 문명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커피와 와인의 서로 다른 성질이 이슬람의 아랍문화와 유대교 및 기독교의 유럽문화의 차이를 가져왔다는 설명이다.
이 책에서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는 커피를 둘러싸고 유럽과 아랍의 여인들이 보였다는 시각차다. 17세기 말 영국 런던에서는 아내들이 커피를 마신 남편들이 밤에도 잠을 안 자는 바람에 침대가 허전하다며 당국에 커피 마시는 것을 금지해달라고 간청했던 반면, 18세기 초 투르크(현 터키)에서는 아내가 주는 커피를 남편이 거부하면 이혼사유에 해당한다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는 사실.
최근에는 세계적 커피 전문점 체인인 미국의 스타벅스와 에티오피아가 에티오피아산 커피의 상표권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 관심을 끌기도 했다. 에티오피아는 이르가체페와 시다모, 하라르 등 3종의 자국산 커피를 상표로 등록해 로열티를 받겠다는 입장이나 스타벅스는 일반적 상품명이라며 상표등록을 거부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다.
커피를 마시며 만난 아디스아바바의 다양한 젊은이 군상
커피를 끓이는 1시간 동안 나는 여학생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초등학교를 늦게 들어가 7학년이라는 17살의 여학생은 "졸업하면 돈을 벌고 싶다"며 "한국에 가면 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초청해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야무지게 생긴 여학생은 예전에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쟁 때 파병한 것은 모르지만, 한국이 자동차도 만들고 컴퓨터도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 3명이 몰려 들어왔다. 여학생하고 잘 아는 사이인 듯 인사를 하고 나에게도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역시 월드컵 얘기를 하면서 "아시아 넘버원"이라고 추켜세운다. 자연스럽게 이들도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이 식당은 주위 젊은이들의 마실터인 듯했다.
이 중 '안토뇨'라는 이름의 젊은이는 레게머리에 생김새도 밥 말리와 비슷하다. 안토뇨를 제외한 다른 젊은이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놀고 있다고 했다. 안토뇨는 배낭여행객들을 상대로 한 오지여행의 안내자로 일하는데, 영국 여행객 2명이 다음날 오모 밸리를 방문하기로 했다며 나에게 합류하라고 꼬드겼다.
오모밸리는 물시부족과 카로부족이 사는 곳으로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 오지탐험 단골 프로로 나온다. 물시부족은 입술에 접시를 끼고다녀 '접시부족'으로 알려졌고, 카로부족은 온 몸에 울긋불긋한 색칠을 한다. 이들의 생활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나의 목적은 주로 역사 유적지 방문인데다 신체에 상처를 내는 부족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여성할례를 전통이라고 용인할 수 없듯, 입술에 구멍을 뚫어 접시를 끼우고 몸에 상처를 내 문신을 만드는 행위까지 문화라고 할 수는 없다. 보존해야 할 전통이나 문화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는 악습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키작은 백인여자가 들어오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이스라엘에서 온 '아디'라는 여성으로 호텔 2층 숙소에 묵고 있다고 했다.
28살의 아디는 처음으로 외국에 나왔다고 한다. 두 달째 아디스아바바 양로원에서 노인들에게 매일 마사지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약간 침울해보여서 어디 아프냐고 물으니 그녀는 "일이 조금 힘들고 집 생각도 난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린다. 작은 체구로 매일 마사지를 하다보니 힘드는 게 당연해 보였다. 그녀는 다음 달 이스라엘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사실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오랫동안 에티오피아와는 예외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의 종교적 연관과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에티오피아인들의 동질감, 이슬람 세력의 팽창에 대한 경계 등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미국과 함께 오랫동안 에티오피아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해오고 있다.
아프리카 여행 중 이스라엘 사람을 만난 것은 아디가 유일했다.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아프리카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은 미국 이상으로 크다.
댄서를 꿈꾸는 힙합 차림의 도시 젊은이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가 안토뇨 등과 알고지내는 다른 젊은이를 만났다. 큰 신발에 통넓은 긴 옷, 커다란 목걸이가 힙합 가수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25살의 토마스는 아디스아바바의 '일류션 클럽'이라는 꽤 유명한 댄스클럽에서 남자 무용수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한껏 멋을 내며 으스대는 토마스를 보자 "아디스아바바 같은 도시에 나가 일하고 싶은데 많이 배우지 못하고 특별한 기술도 없어 갈 수도 없다"며 낙담하던 랄리벨라 숙소의 27살 시골 청년 '미니로하'가 생각났다.
에티오피아 여행 중에 만난 일부 젊은이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갖고 컴퓨터를 다루며 세계화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하르다르 지역에서 청나일 폭포를 함께 구경했던 젊은 의사, 비행기 탑승 시간을 앞당기려고 항공사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친절하게 대해주던 30대의 젊은이, "에티오피아에 대한 인상이 어떠냐"고 물은 뒤 신속한 탑승수속을 해주던 공항직원, 아디스아바바 거리에서 돈을 달라고 쫓아오는 아이들을 꾸짖던 40대 남자….
이들은 세계화 시대에 에티오피아의 국가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커피의 맛이 다르듯 에티오피아에는 이처럼 다양한 젊은이들이 있었다. 진한 커피의 맛처럼 에티오피아는 역사에서 문화에서 종교에서 사람에서 다양성의 깊은 향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