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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 정오 시드니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제751회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다.
ⓒ 윤여문

▲ 시드니 수요집회에 참가한 한국, 대만, 호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 윤여문
이런 현상을 '나비효과(The butterfly effect)'라고 하면 혹여 억지소리가 될까? 나비효과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다음 달 미국 뉴욕에서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과학이론이다.

지난 3월 7일 정오, 호주에서 최초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시드니 수요 집회의 반향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특히 일본정부가 눈치를 살피며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시드니에서 생긴 나비효과가 호주대륙은 물론 일본, 미국 등지에 파급되고 있는 것.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일 정부에 항의성명 전달 "우리는 사과받으러 왔다"

@BRI@부축해드리지 않으면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85세에서 91세에 이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러나 할머니들이 힘들게 토해내는 절규의 메아리는 폭풍을 연상시킬 만큼 크게 나타나고 있다.

때마침, 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에 촉촉하게 젖어들었던 할머니들의 떨리는 음성은 뉴욕타임스, 로이터통신, CNN 등의 보도를 통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호주 국내에서도 시드니모닝헤럴드, 호주국영 ABC-TV 등 거의 전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한국에서는 750번이나 열린 수요집회인데, '시드니 수요집회'가 갖는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시드니 주재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열린 제751번째 '수요집회'의 하이라이트는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85), 대만에서 온 우이시우메이 할머니(91. 吳秀妹) 그리고 호주에 사는 얀 오헤른 할머니(84)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보내는 항의 성명서를 히로시 마나베 시드니 주재 일본 부총영사에게 전달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세 사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오늘 시드니 주재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2차 세계대전 동안에 일본이 저지른 인권유린의 참상을 일본정부로부터 보상(사과) 받기 위해서 왔다"로 시작되는 성명서에는 세 할머니들의 요구사항과 서명이 들어있다.

한국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단 한 차례도 나타나지 않았던 일본 외교관이 시드니에서는 나타났다. 물론 잠깐 동안 총영사관 건물 앞에 나타나서 성명서를 전달 받는데 그쳤지만 그런 과정이 함의(含意)하는 상징성은 컸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듯, 총영사관 관계자와 안전요원을 대동하고 나타난 히로시 마나베 부총영사는 아주 긴장된 목소리로 "이 성명서를 아베 신조 총리께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집회참석자들의 격앙된 모습에 위축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가서 "한 마디 해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그는 "지금은 노코멘트다. 나중에 사무실에서 따로 만나자"고 답변했다.

▲ 오헤른 할머니로부터 항의성명서를 전달받은 히로시 와타나베 일본 부총영사.
ⓒ 윤여문
호주 국적 백인 할머니의 등장에 긴장하는 일본

아직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아시아 각국에 많이 생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아베 신조 총리가 "군이나 경찰이 강제로 끌고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발언한 사실을 두고 시드니 집회를 주관한 한인동포 박은덕 변호사는 "일본의 아시아국가 경시풍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국가에서 시비를 걸지 않으면 아시아 국가들의 항의쯤은 무시하면서 견뎌내겠다는 일본정부의 오랜 습관이 읽힌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네덜란드계 호주국적의 백인 할머니가 "나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면서 증언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헤른 할머니가 지난 2월 15일, 미국 하원 청문회에 나가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자 그동안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미국언론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런 구체적인 증거가 이번 시드니 수요집회에서도 나타났다. 뉴욕타임스 등의 미국 유력언론사가 취재기자를 시드니로 보내왔고, 로이터 CNN 등 호주 주재 기자들이 얀 오헤른 할머니를 며칠 동안 밀착취재 했다.

일본에서 온 기자들의 취재 열기는 더 높았다. 비록 그들은 일본우익단체의 테러위협 때문에 공개적으로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관련된 아주 작은 사안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 정부의 이런 행태를 오헤른 할머니가 모를 리 없다. 할머니의 건강상태가 썩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청문회에 적극적으로 임한 것도 그런 것을 염두에 둔 전략적 대응이었다.

3월 5일과 7일 기자와 만난 오헤른 할머니는 "일본은 미국을 두려워한다. 미국에서 압박을 가하면 일본정부가 공식사과 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민주당이 집권하면 일이 더 수월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오헤른 할머니는 웃으면서 "그게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할 이유다. 일본정부의 공식사과를 받을 때까지 나는 죽지 않은 것"이라면서 "나야 결혼도 하고 딸을 둘씩이나 낳았으니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한국이나 아시아 국가 할머니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 "우린 일본이 사과할 때까지 살아남을 겁니다."
ⓒ 윤여문

▲ 피맺힌 증언. 감정에 복바친 할머니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 윤여문
한국 할머니 돕기 위해 증언 시작한 오헤른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에는 자바섬에서 출생한 얀(Jan)이라는 이름의 네덜란드계 21살짜리 처녀도 있었다. 서슬 시퍼런 사무라이 칼로 위협하는 일본군 장교한테 순결을 유린당한 그녀는 그후 약 3개월 동안 밤낮없이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의 성적 노리개로 죽음보다 더 끔찍한 치욕을 당했다.

그녀는 엄청난 충격과 씻을 수 없는 수치심 때문에 그후 50년 동안 침묵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1992년 호주TV 보도를 통해서 한국계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악몽의 세월을 증언하는 모습을 시청했다.

한국 할머니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일본 정부 차원의 사죄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디에서도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때 얀 할머니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저 할머니들을 도와야 한다. 마침내 내 인생의 암흑기를 털어놓을 시간이 됐다"고 결심한 것이다.

할머니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두 딸에게 자신의 참혹했던 시절의 얘기를 들려준 다음 세상을 향해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위안부(comfort woman)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힌 최초의 백인여성(the first Caucasian)이다.

그후 할머니는 두 차례의 도쿄 방문을 비롯해서 호주, 북아일랜드, 영국, 네덜란드 등 전 세계에서 열리는 종군위안부 관련 행사에 참석했다. 그렇게 하기를 15년, 올해 84세가 된 오헌 할머니는 지난 2월 15일, 미국 하원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최초의 여성 3명 중의 한 명으로 역사적인 증언을 했다. 나머지 두 분은 한국의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다.
<'그들은 날 가장 잔인하게 강간했다 / 일본은 정의의 심판 받고 거듭 나야'(오마이뉴스 2007년 2월 16일자)에서 발췌

▲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거리서명에 관심을 보이는 호주여성들.
ⓒ 윤여문
호주노동계 LHMU도 적극 참여의사 밝혀

시드니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마틴 플레이스에서 열린 이번 시드니 수요집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호주 친구들(FCWA, Friends of Comfort Women in Australia)'이 주관했다.

FCWA의 간사를 맡고 있는 한인2세 송애나(23)씨는 "이번 행사는 호주사회에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리고 지금도 전쟁 속에서 인권유린을 당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국제연대 캠페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고 말했다.

이런 국제연대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한국에서 온 윤미향 정대협 공동대표를 비롯하여, 대만과 필리핀에서 온 여권 운동가들이 참가했다. 특히 윤미향 공동대표는 첫 집회를 갖는 시드니 팀을 돕기 위해서 동서분주하는 모습이었다.

한편 호주노동조합 산하 LHMU(잡역부노조) 소속 노동자들이 깃발을 들고 나타나서 행사에 적극 참여했다. 그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주최 측에서 준비한 전단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한 노동자는 국제노동기구(ILO)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오래전부터 개입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자에게 상기시켜주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의 노동조합들이 국제노동기구(ILO)에 군위안부 동원이 ILO의 강제노동금지규약 위반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던 것. 그 결과 ILO에서 일본의 위안부 동원 및 착취가 ILO규약 위반이며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적절한 배상을 해야 한다는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 호주정부에 강력한 대책을 촉구하겠다고 약속하는 녹색당 소속 캐리 네틀 연방상원의원.
ⓒ 윤여문
캐리 네틀 상원의원 "호주에서도 결의문 만들 것"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행정수도 캔버라에서 온 녹색당 소속 캐리 네틀 연방 상원의원은 "전쟁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사과하지 않는 일본정부를 규탄한다"면서 "호주 의회에서도 미국 하원처럼 결의안을 만들어서 통과시키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연설을 마치고 기자와 만난 네틀 상원의원은 "미국 하원 청문회를 계기로 호주에서도 관심이 높아져서 다행"이라면서 "그러나 녹색당이 3석밖에 없는 소수정당이어서 노동당 등 진보성향의 정당과 연대해서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네틀 상원의원은 "호주의 젊은 세대에게 일본의 전쟁역사를 보다 정확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면서 "일본정부와 가까운 집권보수정당이 문제이지만 올 연말 총선에 기대를 건다"고 희망을 피력했다.

한편 3월 말 일본을 방문해서 아베 신조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인 존 하워드 호주 총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보수집권정당인 자유-국민 연립당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공화당, 일본의 자민당과 친근한 자유-국민 연립당은 경제우선, 안보우선 정책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한편 시드니 수요집회는 저녁 7시부터 시드니한인회관에서 한인동포와의 만남을 가졌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밤 모임에서 세 분 피해자 할머니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참석하여 60여년 전의 비극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다.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E.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떠올랐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파멸될 수 있을 지언정 결코 패배당할 순 없다(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may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덧붙이는 글 | * 다음 기사엔 할머니들의 증언과 미국 일본 등지에서 온 기자들과의 인터뷰 중심으로 '일본은 왜 미국만 두려워하는가?'를 게재할 예정이다.


태그:#위안부, #호주, #수요집회,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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