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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코의 절규
카나코의 절규 ⓒ 후지TV 백색의 거탑 캡쳐
일본판 <백색의 거탑> 스토리를 토대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제약회사 영업사원인 카나코(키무라 타에)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절망에 빠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는 잘 알고 있어요. 암에 걸린 사람이 어떻게 죽음을 맞는지. 전 가족이 없어요. 일만 해왔기 때문에 애인도 없어요. 라이벌은 있어도 친구는 없어요. 사토미 의사 선생님, 제가 죽는 순간까지 곁에 있어 주세요. 제가 믿는 사람이 곁에 있어 주어야만 편히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판 최도영인 사토미 슈지는 카나코에게 같이 있어 주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카나코 환자는 며칠 뒤 대학병원의 침대 확보를 위한 불치병 환자 포기라는 역겨운 관행을 눈치 채게 된다. 곧 자의 반 타의 반 등 떠밀려 퇴원한다.

사토미 슈지는 카나코가 떠난 직후 갈등했다. "내가 무리한걸까? 그녀를 괴롭힌 걸지도…."

대학병원은 치료가 최우선 목적이 아니라 돈이 최우선 목표다. 환자는 곧 돈이다. 사토미 슈지 혼자서 대학병원의 지나친 상업성 추구라는 부조리한 관행을 타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본판 장준혁인 자이젠 고로는 심난해진 사토미 슈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조언한다.

"나라면 카나코를 훨씬 더 빨리 능숙하게 퇴원시켰을 거야. 고민만 하는 게 환자를 위한다고 볼 수 없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 그래서 난 교수가 될 거야. 확실한 것을 원하니깐."

자이젠 고로와 사토미 슈지가 선과 악이 아닌 가치관만 다를 뿐 같은 목표, 같은 꿈을 꾸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이젠 고로 "고민만 하는 게 환자를 위한다고 볼 수 없어"
자이젠 고로 "고민만 하는 게 환자를 위한다고 볼 수 없어" ⓒ 후지TV 백색의 거탑 캡쳐
일본판 <백색의 거탑>을 토대로 구체적인 증거, 그 두 번째 예를 들어보자. 자이젠 고로와 사토미 슈지는 어떠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똑같이 "의사는 신이 아니다"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자이젠 고로는 사토미 슈지에게서 우카이 료이치(이부 마사토, 한국판은 우용길, 김창완 분) 내과 교수가 오진한 환자를 수술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하지만 자이젠 고로는 사토미의 부탁을 거절한다. "우카이 교수였어?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수술을 부탁하게. 우카이 교수가 오진으로 놓쳤던 환자를 내가 수술하면 곤란해져."

사토미 슈지는 자이젠 고로에게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그만 두겠다는 건가"라며 반문한다.

자이젠 고로는 "난 그렇게 비겁한 놈이 아니야. 다만 우카이 교수에게 창피를 줘서 아즈마 테이조 교수(이시자카 코지, 한국판은 이주완, 이정길 분) 귀에 들어간다면 대학병원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아질 거야"라고 대꾸한다.

사토미 슈지는 언성을 높혀 "어떠한 경우라고 환자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다시 반문한다.

돌아오는 답변은 "의사는 신이 아니야, 인간이니깐"이라는 자이젠 고로의 냉정한 시각일 뿐이다. 사토미 슈지도 앞서 자이젠 고로에게 같은 말로 충고한 적이 있다.

자이젠 고로가 암으로 의심되는 환자에게 "당신은 암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직설적인 말투로 완치를 약속할 때였다.

이에 사토미 슈지가 "위험한 시각 아니냐"면서 핀잔을 주자, 자이젠 고로가 말한다. "환자에게 의학전문용어를 남발해서 우롱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절대로 걱정 없다는 강한 한마디 어조가 안심시킬 수 있어."

사토미 슈지는 자이젠 고로에게 "의사는 신이 아니라 환자와 똑같은 인간이야"라면서 환자를 위한 의사가 되길 바란다.

사토미는 99% 확신이 서도 단 1% 이견이나 불확실한 사항이 있다면 철저한 조사와 검증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시각이야 어찌됐든 자이젠 고로나 사토미 슈지 모두 환자를 위한 자기만의 최선의 치료방법이라는 철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닌, 가치관의 차이일 뿐, 환자를 위한 휴머니즘 구현이라는 결론 도출은 같다.

사토미 슈지 "의사는 신이 아니라 환자와 똑같은 인간이니까"
사토미 슈지 "의사는 신이 아니라 환자와 똑같은 인간이니까" ⓒ 후지TV 백색의 거탑 캡쳐
일본판 <백색의 거탑>에서 자이젠 고로는 숨을 거두기 직전 말한다.

"사토미 슈지, 드디어 새로 건립된 암센터 내과부장을 맡아주기로 했구나. 이걸로 내 암센터도 반석 위에 선거야."

"카나코씨(대학병원의 침대 확보를 위해 강제퇴원당한 환자), 당신도 우리 암센터에 입원한다면 침대를 내드릴게요. 제가 센터장이거든요."

"사토미 슈지, 사사키씨(자이젠 고로의 오진으로 숨진 환자)에게는 한 마디 정도 해줄 수 있겠지? 전이가 아니었다면, 암 자체는 나 밖에 수술할 수 없었다고."

"세상을 바꾸자고 했었는데, 둘이서 같이 세상을 바꾸자고 했었는데, 둘이서 같이…, 둘이서 같이."

자이젠 고로 시신, 의학발전 위해 대학병원에 기증
자이젠 고로 시신, 의학발전 위해 대학병원에 기증 ⓒ 후지TV 백색의 거탑 캡쳐
한국판 <하얀거탑>에서 장준혁이 지나치게 권력욕구 강한 남자로 묘사됐지만 시청자들 사이에서 이상하게 연민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장준혁의 실체나 꿍꿍이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이유가 자이젠 고로 투영 때문일 것이다. 한국판 <하안거탑> 결말은 야마자키 도요코 원작소설과 2003년 일본판 <백색의 거탑> 내용처럼 장준혁의 죽음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장준혁은 일본판과 달리 끝까지 자신이 원했던 그 무엇을 말하지 않았다. 환자 중심의 대학병원 구현이라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시청자들의 오해가 '완전히' 풀리긴 어려워 보인다. 다만 한국판 고유의 미세하게 다른 결말을 기대했던 이들이라면 만족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판처럼 가치관의 차이를 내세우기보다는 악인에 좀 더 가깝게 묘사하는 것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한국판 장준혁이나, 일본판 자이젠 고로 모두 큰 틀에서 보면 휴머니즘 실현을 꿈꾸었던 의사라는 사실엔 변함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데일리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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