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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 따르릉…."
'전화를 안 받으시네. 오늘은 봉사 가는 날도 아닌데 어딜 가셨나….'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집에는 자주 오시지만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낮에만 잠시 잠깐 왔다 가시기에 통 뵐 수가 없어서다. 퇴근 길에 한 번 더 전화를 할까 하다가 포장마차에 들러 홍합을 사는 바람에 그만 잊어버렸다.

요즘은 일이 바빠서인지 배가 왜 그리도 빨리 꺼지는지 가뜩이나 군것질을 안 하는 습성이라 퇴근 길에는 더더욱 허기를 느끼곤 한다.

씻는 동안 아내는 가져온 홍합을 끓이며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급한 김에 자리에 앉자마자 반주를 한 잔 들이켰다. 그리고 넘어가는 홍합의 국물 맛이라니. 그렇게 맛나게 저녁 식사를 하면서 아내와 집안 돌아가는 얘기들을 나누었다.

큰아이가 중학교에 가니 초등학교 때보다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둥, 작은 아이도 내년이면 함께 중학교에 갈 텐데 걱정이라는 둥, 아이들이 빨리 크니 옷값도 많이 드는데 엄마가 많이 사주신다는 둥 한다.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집안에서 혼자 고생하는 아내에 대한 성의를 표한다는 생각이었는데, 가만 듣다 보니 손톱으로 유리를 긁어대듯 듣기 거북한 소리로 들렸다. 그래도 장모님이 사주시는 것이니 너무 감사하다며 공감의 의사를 표하는데, 아내가 불쑥 물어본다.

"당신, 아버님 생신이 언제야?"

갑자기 당한 질문인데다 술기운 마저 한창 올라가는 중이라 언듯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형광등이 번쩍하며 불이 들어오듯 음력 3월 4일이자너, 그러자 또 날라오는 질문 하나.

"그럼, 어머님 생신은?"

또 생각이 가물가물하다가 당당하게 음력 4월 15일! 내가 아무리 바빠도 뭐 그런 것도 모를까봐 하며 남은 술잔을 들이켰다. 내가 대답을 하면서도 잠시 잠깐 먹먹해지는 것이 바빠서인가, 나이 때문인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러길 잠시, 다시 날라오는 질문. 그럼, 우리 엄마와 아버지 생신은 언제인데?

"……."

그것은 아주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나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억 소리도 못할 정도로 정확하게 내 마음의 심장을 뚫어버린 것이다. 술을 조금 먹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대체 그 기억의 진원지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입 안으로만 우물우물 우리 어머니하고 동갑이시고 생신이 몇 개월 빠르다는 것까지는 찾아갔는데 몇 일인지, 아니 몇 월인지 조차 깜깜한 것이었으니. 간신히 대답한 것이 아버님의 추도 예배일 정도 뿐.

"당신 나이 들어 내게 제대로 대접 받으려면 잘해요. 당신 부모님만 챙기지 말고."

하며 아내는 휑 하니 일어선다. 듣는 순간 그런 얘기가 아득한 먹먹함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도 '뭐 바쁘면 잊을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는데, "아내가 그렇게 얘기를 해도 아직도 몰라요" 하며 후두둑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제서야 뭔가 욱하며 올라오는 것이 있어 우리 집안 경조사가 그려진 달력을 들척이니. 오늘이 바로 장모님 생신이었다. 같이 사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큰 짐이 된다며 애써 마다하면서도, 지나가다가 과일을 보거나, 하다 못해 싱싱한 배추 한 통을 보더라도 저건 우리 손자가 좋아하는 것인데, 저건 우리 사위가 정말 좋아하는 것인데 하며, 당신 입에는 한 모금도 넣지 않으시고 봉지째 그냥 다 갔다 주시는….

그렇게 우리를, 손자들을 위해 마치 처절한 가시고기처럼 그 분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면서도 내색 한 번 없으신 그 분의 생신을 잊다니…. 홍합 먹느라 준다는 국을 마다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엔 반쯤 남은 차디찬 미역국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한심스럽게 올려다 본다.

▲ 선명하게 자리한 장모님 생신일
ⓒ 염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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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브리태니커회사 콘텐츠개발본부 멀티미디어 팀장으로 근무했으며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스마트스튜디오 사진, 동영상 촬영/편집 PD로 근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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