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어떤 주제부터 이야기를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림의 역사 역시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터라 소재는 많거든요. 또 시대에 따라서 좋아하는 그림의 종류도 다르지요. 하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소재도 있습니다. 바로 꽃이에요. 물론 꽃도 많지요. 봄의 매화로부터 시작해서 가을의 국화, 겨울 동백꽃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으뜸은 모란입니다. 햇빛 찬란한 5월에 정원에 활짝 피어난 모란을 보고 있으면, 달리 이유를 달지 않아도 모란이 꽃의 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귀(富貴)와 풍요(豊饒)를 상징하는 모란은 그래서 부귀화(富貴花)라고도 부릅니다.
중국에서는 재산이 많고 신분이 높은 것을 부귀라고 하는데, 모란은 그 모양이 풍염(豊艶)하고 품위와 위엄이 있다 하여 부귀화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화중왕(花中王), 천향국색(天香國色), 귀객(貴客), 화신(花神)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지요. 꽃이 크고 화려해서 호사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화왕(花王) 또는 화중왕(花中王)이라고도 부릅니다.
천향국색이라고 말하는 것도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향기와 나라에서 최고 미인과도 같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국인들은 모란을 사랑하여 모란꽃 아래서 죽는 것을 일종의 지극한 호사의 풍류로까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중국 사람들의 모란 애호는 대단했다고 해요. 중국에서는 지금도 모란 재배가 인기여서 양자강 이북 지방에서는 훌륭한 모란원이 많다고 합니다.
원산지가 중국인 모란은 붉은색, 자주색, 흰색, 분홍 등의 빛깔을 띱니다. 봄이 거의 지나고 여름이 올 무렵인 5월에 피는 꽃이지요. 꽃의 지름이 거의 15-20㎝에 이를 정도로 큰 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구름처럼 핀 꽃은 그래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다른 꽃들보다 크기도 크려니와 윤기가 나는 색은 정말이지 매력적이거든요.
우리나라에 모란이 언제 전해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어 추측해볼 따름입니다. 신라의 선덕여왕과 관련한 것이지요. 일연의 <삼국유사>에 담겨 있는 이야기입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빨강색, 자주색, 흰색의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각각 한 되씩 신라에 보내왔는데 나중에 선덕여왕으로 즉위하는 덕만공주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꽃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모란꽃 그림에 벌과 나비를 함께 그리지는 않으며, 그래서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모란에 향기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심어서 꽃을 피워보면, 없기는커녕 아주 매력적인 향이 있습니다, 그리 진하지는 않지만 깊고도 그윽한 향기가 풍기지요. 모란꽃은 분명히 향기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벌과 나비가 날아듭니다.
고려시대 이인로(李仁老)는 '미개모란'(未開牡丹)이란 시에서 "봄추위가 동산에 꽃피는 것을 억제하니 춤추는 나비와 노니는 벌이 그리워한들 무엇하리"라고 하여 모란꽃에도 벌, 나비가 날아들 수 있음을 읊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시에서는 일반적으로 매화 향기를 암향(暗香)이라고 하고, 난초의 향기를 유향(幽香)이라고 하며, 모란의 향기는 이향(異香)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나라에서 온 그림에 곤충을 그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모란꽃에는 곤충을 같이 그리지 않는 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모란꽃은 영원한 부귀를 의미하는데, 나비는 질수(耋壽·80세)를 뜻합니다.
나비를 그린다면 80세까지만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의미로 해석되니, 80세까지만을 뜻하는 나비를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에서는 이러한 그림 속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고, 그 결과 모란꽃에는 향기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지요. 그리고 모란의 씨를 심었더니 정말 향기가 없더라는 말도 호사가들이 꾸며댄 말일 수 있습니다.
또는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기 위한 육종 과정에서 꽃은 크고 색깔은 화려하면서도 향기까지 높은 것은 배합해내지 못해서 향기 없는 꽃이 핀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조상들은 그럼에도 모란꽃을 사랑했습니다. 특히 짙은 붉은색의 모란꽃을 좋아했지요. 빨간색이 액을 막아준다고 믿었고, 또한 모란의 만개한 모습이 구름 같기도 하고 워낙 크기도 해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의 대표적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란이 이처럼 풍요와 부귀를 뜻하게 된 것은 송나라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애련설
내가 말하건대, 국화는 꽃 중에 속세를 피해 사는 자요,
모란은 꽃 중에 부귀한 자요,
연꽃은 꽃 중에 군자다운 자라고 할 수 있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이는 도연명 이후로 들어본 일이 드물고,
연꽃을 사랑하는 이는 나와 함께 할 자가 몇 사람인가?
모란을 사랑하는 이는 마땅히 많을 것이다.
비록 연꽃을 찬미하는 시 속에서이긴 하지만, 모란은 이미 부귀의 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이 언제부터이건 간에 모란은 수본(繡本)에서부터 왕실용 병풍, 궁궐 장식에서부터 평범한 사람들의 기물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였습니다.
귀한 신분의 호사스런 옷은 물론이고 베개, 이불, 병풍, 반짓고리 등등의 여러 생활용품에서 장식으로 쓰였습니다. 비단 옛날만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요. 우리가 베고 자는 베갯잇, 이불, 부엌의 앞치마 등등의 일상용품은 물론이고 가톨릭 미사 때 쓰는 미사포에서도 종종 모란무늬를 찾아 볼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꽃은 남성보다는 여성들과 관계가 깊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대부의 가옥은 여성의 공간과 남성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남성의 공간은 문방사우를 중심으로 검은색과 흰색 또는 황색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여성의 공간은 오방색으로 알록달록하게 꾸몄지요. 이때 여성의 방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문양이 바로 모란입니다.
혼례부터가 그러합니다. 우선 신부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 모란무늬를 수놓았거든요. 특히 혼례에 사용하는 병풍은 반드시 모란으로 꾸몄습니다. 혼례용으로 모란도 병풍을 둘러치는 것은 새롭게 시작하는 부부가 영원히 부귀하고 풍요롭게 지내라는 축원의 의미를 담고 있지요. 왕족이나 사대부가에서는 따라서 모란병풍이 필수품이었습니다. 서민들은 따로 장만할 여유는 없었지만 공동으로라도 마련하여 돌려가며 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모란꽃이 우리나라 장식미술품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때입니다. 그 점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모란문암막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모란당초문이라고 해야 옳은 이 암막새의 문양은 잎맥이 또렷이 부각된 여러 장의 모란과 당초잎, 그리고 풍성하게 피어난 모란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록 좁은 면적에 새겨져 있으나 모란의 풍성함과 화려함이 잘 표현되어 있지요. 고려시대에는 대표적인 문화재가 도자기인 만큼 청자를 비롯한 많은 도자기에서 모란문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더욱 많은 생활용품이 모란으로 장식되었지요. 특히 여성들의 옷을 모란문양으로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옛그림 속에서 모란은 거의 같은 패턴을 이루고 있습니다. 거기에 노랑, 주황, 연지, 주홍 등 여러 가지 색감으로 덧입혀지지요. 특히 병풍이 그러한데, 그것은 아마도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몇 개의 본을 가지고 다량 제작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본이 전해지면서 계속 그것을 따라 사용한 것이지요.
어떤 병풍의 경우는 좌우 대칭의 밑그림에 색깔만 다른 것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란 밑에는 청색 또는 초록색의 기괴한 형태의 바위가 놓입니다. 따뜻한 느낌의 꽃과 차가운 느낌의 바위가 대조를 이루는 것이지요. 특히 모란도 병풍의 경우 괴석 위에 모란꽃이 가득 피어 있는 그림이 대부분입니다.
모든 것이 무채색이던 옛날에 이 모란의 화려함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했을 것입니다. 모란은 어쨌거나 우리 조상들의 일상에서 가장 빛나고 화려한 삶을 상징합니다.
덧붙이는 글 | * 이상희의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조용진의 <동양화 읽는 법>, 허균의 <민화의 세계> 등을 참고·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