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있으신 분 있나요?"
열흘전 신체검사를 받을때 채혈을 했던 간호사의 질문. 그러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호기심어린 눈으로 서로를 잠깐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있는 곳은 서울 강남구 소재의 한 병원 물리치료실. 이 곳에서는 지금 '생물학적동등성시험(생동성시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제약회사가 새로 신약을 만들고 시판 직전에 기존에 판매되고 있는 약과 생체적인 효과가 얼마나 동등한지를 측정하는 시험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일명 '마루타 알바'로 불린다. 피시험자 입장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약의 부작용을 걱정할 수 밖에 없다. 꺼려하는 사람들을 그래도 오게 하는 것은 높은 시험보상비용이다.
그러니까 '알바천국'에 올라와있는 정보를 보고 병원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 당시, 나는 돈이 무척 궁했던 것이다.
오호라, 약을 2번 먹은 후 2박3일간 병원에서 자고 2주동안 왔다갔다하면서 채혈만 하면 50만원! 눈앞에 신세계가 열리는 듯 했다. 나와 같이 오늘 모여있는, 20명 남짓한 남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을까.
물리치료실은 원래 있어야 할 치료기구들이 치워지고 병원침대와 임시 간이침대만 가득 놓여, 마치 호화로운 군대 내무실을 연상케 했다.
[#1. 2월 24일 오후 6시 5분, 물리치료실] "금연하시고 물 드시지 마세요"
@BRI@"시간, 규칙, 그리고 질서. 이 세 가지는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간호사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말이다. 나를 포함한 24명의 피시험자가 다 모이자 그는 다시 한번 시험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A·B조로 나누어서 시험을 받는다. 오늘 일단 같이 저녁식사를 한 후, 밤 10시부터 자게 된다. 다음날 아침, 투약 15분 전에 첫 채혈이 있다. A조는 현재 시판되고 있는 약을, B조는 제약회사가 새로 만든 신약을 먹게 될 것이다. 투약 후 각각 15분, 30분, 1시간, 2시간, 4시간, 6시간, 8시간, 10시간, 12시간, 24시간, 36시간, 48시간, 72시간째 됐을때 채혈을 실시한다. 24시간째 채혈 후에는 퇴원하고, 각 시간때 다시 병원에 와서 채혈을 실시한다. 일주일후에 같은 과정을 밟는데, 이 때는 A와 B조가 바뀐다….
박 간호사의 설명은 대개 이와 같았는데, 귀담아 듣는 사람은 별로 없어보였다. 그러나 금기사항을 설명할 때는 반응이 확연히 드러났다.
"금연하셔야 합니다. 오늘 밤 10시부터 내일 낮 12시 30분까지는 물을 드실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 6시 30분에 기상합니다." 곳곳에서 한숨이 터져나왔다. 질문을 받겠다고 할 때도, 시험내용보다 '시험생활'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집이 바로 이 앞인데, 뭐 좀 가지고 오면 안 되냐"는 기막힌 질문도 있었다.
[#2. 같은 날 오후 6시 30분, 병원 근처 식당] 1명 '마루타' 포기했다
예약한 식당에서 25명의 남자가 떼거지로 5천원짜리 전주비빔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박 간호사와 일문일답.
- 이 생동성시험을 계속 담당하고 있나. 담당자 입장에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든가.
"맡은 지 꽤 됐다. 시간약속을 안 지키는 것이 가장 힘들다. 해보면 알겠지만, 이런 임상실험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 시험기간 내 금연이 힘들텐데, 몰래 흡연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렇다. 목격했을 때는 시험보상비용에서 일정부분 삭감한다."
- 임상실험인데 사람들의 호응이 있는가.
"꽤 높은 편이다. 몇 번 하는 사람도 봤다. 생각과 달리 이 시험은 위험하지 않다. 투약한 약의 성분이 혈중농도에 유지되는 시간은 채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시험이 위험해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시 돌아온 물리치료실. "얘기를 좀 해봐요." "그러니까 그게…" 간호사의 친절한 '솔'음에 이어 우물쭈물 낮은 '시'음. 우물쭈물씨는 곧 짐을 챙겨 돌아가고, 간호사는 예비순번 목록을 보면서 전화를 한다. 1명이 탈락했다.
[#3. 그날 밤 9시 20분, 물리치료실 라꾸라꾸침대] 그 예에엣날 군대 내무반 같네
단체로 <뉴스데스크>를 시청 중이다.
문득 오른편을 보니 '검은뿔테'씨가 침대에 누워 영어원서와 영자신문을 번갈아보면서 보고 있다. 놀라서 왼쪽으로 돌아보니 '폴로남방'씨가 박민규의 <핑퐁>을 읽고 있다.
감명을 받으며 맞은편을 바라보니 '빡빡머리 힙합청년'씨가 진지한 눈빛으로 두꺼운 '2차세계대전사'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외를 해도 충분히 할 것 같은 사람들이 왜 이런 알바를 하는 것일까,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 "불 이제 끕니다." 밤 10시, 취침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매일 새벽 4시에야 잠자는 내가 제대로 수면을 취할 리가 만무. 목이 말라 무심히 정수기에 갔는데, "오후 12시 30분까지는 물을 드실 수 없습니다"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그냥 마실 수도 있지만 양심상 인내하기로 했다.
어두컴컴한 물리치료실안에서 스물네명 남자들의 뒤척이는 소리를 듣자니 그 예에에엣날 군대 시절이 생각난다.
잠이 하도 안와 결국 화장실에 안착. 거울에 비친 나에게 자문한다. "내일은 뭐 할까?"
[#4. 25일 오전 7시, 물리치료실] 나는 지금부터 'A12'
낯설은 남자 2명, 여자 1명이 등장한다. 제약회사 직원인 듯 하다. 남자 둘은 라꾸라꾸 침대들을 접어서 구석으로 가져다 놓고, 빈 자리에 의자들을 채운다. 호명받은 피시험자들은 각각 조끼를 받아든다.
내가 받는 조끼에 적혀진 번호는 'A12'. 조끼를 받고 혈압을 잰다. 시험표를 받는다. 투약과 채혈시간이 각 시험자마다 1분 간격으로 빠짐없이 적혀져 있다. A1번과 B1번은 7시 30분에 동시에 채혈을 받고, A2번과 B2번은 7시 31분.
오전 8시 11분, 'A12'의 차례가 왔다.
전자시계를 보고있던 간호사의 외침 "4, 3, 2, 1, 드세요." 복권당첨할 때 "쏘세요!"도 아니고, "드세요!"는 뭐란 말인가.
내 오른손에 놓여진 두개의 알약을 먹는 게 그리 담담하지만은 않다. 내가 속한 A조는 대조약을 먹는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약이다. 이 약은 ①불안장애 ②우울증에 수반하는 불안 ③정신신체장애 ④공황장애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두 알을 입에 털어넣고 물을 마신다.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주는 빨간약을 먹는 네오의 심정이다.
[#5. 같은날 내내, 채혈실] 자다 피뽑다 자다 피뽑다 자다 피뽑다
08:26, 08:41, 09:11, 10:11, 12:11, 14:11, 16:11, 18:11.
9번의 채혈을 제 정신으로 하지 못했다. 간호사가 "좀 졸릴 거에요"라고 언질을 주긴 했지만, 이렇게 잠이 쏟아질 줄이야!
첫번째와 두번째 채혈에서는 그나마 정신이 있었다. 다른 '마루타'들과 의자에 앉아 케이블TV에서 하는 <스파이더맨>을 보았던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서서히 졸음이 쏟아졌고 그 불가항력적인 잠에 난 무기력했다. 드문드문 정신이 들면 같이 채혈을 하는 'B12'씨가 채혈시간을 알리거나, 간호사가 "세수하고 오실래요?" 했다. 점심과 저녁도 반수면 상태에서 먹을 정도.
'카테터'라는 채혈하기 쉽게 혈관에 꽂아놓은 플라스틱기구 때문에 아프지도 않았다. 계속 자다가 피뽑다, 자다가 피뽑다, 자다가 피뽑다 했다. 내가 먹은 게 항우울제인데, 우울할 땐 자란 말인지.
- 제가 먹은 거, 항우울제인가요?
"네, 맞아요."
-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나요?
"그렇진 않고요. 기분이 안정되는 약이에요."
마지막 채혈시 간호사와의 일문일답이다.
[#6. 26일 오전 8시 30분, 채혈실] 병원 문을 나서며 소름이 돋는다
"수고하셨어요. 저녁 7시 50분까지 오세요."
아침 채혈이 끝났다. 일주일 후에 또 입원하고 3일 동안 피 뽑으러 병원에 들러야 하지만, 어쨌든 퇴원은 반갑다. 일주일만 지나면 50만원이 들어오겠지.
채혈실을 나가려는데 제약회사 직원의 목소리가 귀에 들린다.
"저 'B10' 말이야. 몇 번 본 것 같은데" "네, 맞아요. 자주 시험받는 분이에요."
'B10'이라면, 금테안경에 곱슬머리. 잘 때 입는 옷으로 '레드데블즈' 유니폼을 가지고왔던 남자다. 또한 'B10'씨는 간호사에게 "아침에 회사에 나가야 한다"며 퇴원시간을 질문하기도 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몸을 자주 '마루타'으로 삼아야 하는 삶의 궤적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병원을 나오는 나는 소름이 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