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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피기 시작한 벚꽃 저 멀리, 바닥이 보일 듯 말 듯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강변에 보이는 초록은 차밭.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차 재배가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 하동이다.
ⓒ 김동욱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 길'이라 불리는 경남 하동∼전남 구례 간 19번 국도는 지금 그 아름다움의 절정을 달리고 있다. 섬진강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달리고 있는 861번 도로도 뒤질세라 봄 향취를 물씬 풍긴다. 여느 해보다 일찍 불어온 봄바람이 강변 벚꽃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는 거다.

이른 아침부터 안개처럼 봄비가 내리고 있고, 봄비에 젖어가는 아스팔트 길과 벚꽃이 처량하게 어울린다. 하동읍에서 구례 초입의 화개장터까지 이어진 20km 남짓의 19번 국도 변은 그야말로 '벚꽃터널'이다.

@BRI@좀 더 올라가 구례군 산동면에 이르러 '지리산온천'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이번엔 온통 노란색 천지다. 우리에게 구례 산수유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마을이 바로 여기 산동면 위안리이다.

이번 여행길은 제목에서 보듯이 최참판댁에서 산수유 마을까지인데, 정확한 지명으로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서 전남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 구간이다.

섬진강 줄기는 하동-화개-토지를 지나 구례에서 남쪽으로 잠깐 방향을 틀었다가 곡성 가는 17번 국도와 나란히 뻗어 있다. 따라서 구례에서 산동면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은 섬진강의 샛강 격인 서시천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저무는 강이 팍팍한 삶을 적셔줄 수 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봄은 매년 이 길, 즉 하동∼구례 간 19번 국도를 따라 올라온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섬진강을 따라 좀 더 하류로 내려가면 만나는 광양의 매화밭에서 한국의 봄이 시작된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2월 말쯤 홍쌍리 여사의 매화농장에서 기지개를 펴는 봄은 하루하루 스멀스멀 기어올라가서 화개마을까지 벚꽃길을 만든다. 봄은 여기서 좀 더 올라가 4월 초 구례 산동의 산수유 마을을 노랗게 물들이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섬진강과 나란히 이어지는 이 길은 한국문학의 거목인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태어난 길이고, 지금 외롭게(?) 섬진강상류 지키고 있는 김용택 시인의 애잔한 마음이 묻어 있는 길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경남 산청에 출장 갔다가 하루를 묵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다. 봄꽃이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따라 나도 길을 잡았다. 하동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구례-남원-임실-전주 노선을 택한 것이다. 마침 비가 내리고 있고, 아직은 이른 봄이라 다행히 길도 한산하다.

이 길은 매년 봄이면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람과 자동차로 몸살을 앓는다. 특히 화개장터에서 지리산 쌍계사 가는 길은 '10리 벚꽃길'로 너무나 유명해서 해마다 이맘때 이 길은 대형 주차장이 된다.

천천히 차를 몰다가 섬진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면 멈춰 서서 강물을 바라본다. 김용택 시인은 그의 연작시 <섬진강5>에서 '사는 일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변으로 가' 보라고 했다.

이 세상 / 우리 사는 일이 / 저물 일 하나 없이 팍팍할 때 / 저무는 강변으로 가 / 이 세상을 실어오고 실어가는 /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 팍팍한 마음 한 끝을 / 저무는 강물에 적셔 / 풀어 보낼 일이다.(이하 생략)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은 여기보다 더 위쪽 임실 덕치의 강이니, 여기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를지 모른다. 허나 삶의 팍팍함을 풀어내는 강이 상하류가 따로 있을까. 지금 비가 내리고 있는 강은 쓸쓸하다. 토독토독 수면에 튀는 빗방울이 아니라면 정지돼 있는 그림이라 착각할 뻔했다. 다시 북쪽으로 길을 재촉한다.

하동∼화개 20km 벚꽃 길은 가슴 먹먹한 길

▲ 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평사리마을. 노란 개나리와 흙색 초가지붕, 그리고 돌담이 묘하게 어울린다.
ⓒ 김동욱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주 무대가 되는 평사리는 하동읍과 화개면의 딱 중간쯤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가 주소지이다. 하동읍에서 평사리까지는 20분 거리. 마을 들어가는 길에 '최참판댁 가는 길' 이정표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소설 <토지>로 인해 이 평사리 마을도 이젠 유명 관광지가 되어 마을이, 집이, 들이, 반들반들 닦여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들어가야 한다. 소설 속 최참판댁까지는 평사리 마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함안댁 등의 초가집과 돌담을 지나 한참 올라가야 닿는다.

마침 이른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관광객들을 위해 새로 얹은 초가지붕의 흙색과 잘 어울린다.

▲ 평사리 최참판댁.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들판이 악양들판이다.
ⓒ 김동욱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그래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색색 우산을 받쳐 들고 소설 속 윤씨 부인과 서희가 살았을 최참판댁 여기저기를 구경한다. 최참판댁 뒤로 올라가면 평사리문학관이 있고, 여기서 매년 가을이면 '토지문학제'가 열린다. 어쩌면 최참판 댁이 있는 악양들판의 평사리는, 그래서 가을에 다시 한번 찾고 싶어지는 동네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개나리가 더 노랗다.

▲ 평사리 초가집들은 여기가 소설 속 누구의 집인지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 김동욱
평사리에서 되돌아 나와 다시 구례 가는 19번 국도에 올랐다. 여기서 화개장터가 있는 화개까지는 다시 20분 거리. 길이 막힌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정말 화개장이 열렸나 보다. 그러나 지금 화개장터는, 당연하겠지만, 옛 5일장의 모습이 많이 퇴색돼 있다.

가수 조용남씨의 노래 덕인지 이제 화개장터는 상시 장이라고 봐야 한다. 여기도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무대인데, 그러고 보면 섬진강과 나란히 이어진 이 길은 정말 한국문학의 탯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화개장도 유명하지만 이보다 여기서 쌍계사 가는 10리 벚꽃길이 이 길을 주차장으로 만드는 주범(?)이다. 이 때문에 최근 들어 섬진강변, 이 길을 확장해야 한다는 소리도 있어 더욱 우울해 지는 길이기도 하다.

1년에 사나흘 편하자고 강을 허물고 산을 깎아 길을 넓히겠다는, 그러면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다는 거다. 이런 논의는 이 지역에서 진작부터 있었던 듯, 지금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사업계획이 잡히려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래? 그렇다면 쌍계사 스님들이여 대승적인 차원에서 길가 벚나무를 다 뽑아내소서.'

섬진강은 누구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다운, 인간과 가까운 강이다. 구불구불 굽이굽이 가장 자연스럽게 흘러오고 있는 강이다. 여기에 석축을 쌓고 길을 넓히면 1년에 봄날 사나흘만 구경 오는 관광객들은 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다. 그러고 나면 자연도 사람도 황폐해지고 말 거다.

그렇게 되면 섬진강은 다시는 김용택 시인의 '눈곱을 닦을 수 있는 새벽 강'이 될 수 없고, '그리운 눈동자로 살아 이 땅에 빚진 착한 목숨 하나로 서 있'기도 머쓱한 강이 될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내가 봄에 지나온 이 길,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봄 길은 나에게 약간은 우울한 기분을 한 겹 얹었다. 언제까지 지금의 모습을 간직할지 가슴이 먹먹해진 여정이 되어 버렸다.

▲ 구례 산수유마을. 위안리 마을은 지금 노란색 유화물감 폭탄을 맞았다.
ⓒ 김동욱
노란색 유화 물감 확 뿌려진, 눈 어지러운 마을

그렇게 봄 길을 재촉해서 화개를 떠나 구례에 들어선다. 토지면을 지나면 구례읍인데 여기서 산수유 마을이 있는 산동면까지는 하동에서 화개만큼 더 가야 한다. 산수유 마을 역시 매년 봄이면 일간지 봄 여행 기사에서 빠지지 않는 코스라 곳곳이 이정표가 친절하다.

구례 산수유 마을은 정확히 전남 구례군 산동면에 위안리를 말한다. 여기서도 반곡마을과 상위, 하위마을은 그 자체로 온통 산수유 밭이라 이 즈음이면 마을 전체에 노란 유화 물감이 뿌려진 듯 눈이 어지럽다. 마치 장난기 심한 아이 하나가 큰 붓에 유화 물감을 듬뿍 찍어 큰 도화지에 '확 뿌리기 장난'을 한 것 같다.

산동면 앞을 흐르는 서시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도랑물 흐르는 곳마다 산수유 꽃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마을 뒷동산에 올라 다시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면 산수유 꽃은, 이번엔 노란 폭탄을 터트린 듯 무더기무더기 자욱하다.

산수유 마을은 지금 개화할 때도 멋있지만 가을 열매가 익을 때 찾아도 좋은 곳이다. 그때는 노란색 대신 빨간색이 주인이다. 이때는 온 마을을 빨간 산수유 열매가 물들인다. 그나저나 너무 일찍 찾아와 버려 어쩔 줄 모르는 이 봄 때문에 지금 여기 산수유축제도 예년보다 크게 앞당겨 오는 3월 15일부터 열린다고 한다.

봄 여행을 꿈꾼다면 이 봄이 익어 겉옷이 거추장스럽다 느껴질 때는 늦다. 지금 여기 봄이 스러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 가는 길 : 하동까지는 남해고속도로 하동나들목을 나가 19번 국도를 따라 올라간다. 하동에서 계속 19번 국도를 따라 다암면-평사리-화계면-구례군을 거쳐 남원 쪽으로 진행하면 산동면 산수유 마을이 나온다. 88올림픽고속도로 남원나들목을 나가 구례 쪽으로 남향하면서 반대로 진행해도 된다.

* 이 기사는 올 3월초 최참판댁에서 산수유 마을까지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기사 내 사진은 지난해 봄 찍은 사진들입니다. 

* 이 기사는 월간 <붕어낚시21>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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