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처럼 여행은 준비가 참 맛이다. 그래서 어떤 문인은 "나는 여행 준비를 하고 혹 가지 않아도 그 설렘만으로 족하다"라고 말했던가.
지난 10일 떠난 1박 2일의 금강산 여행이 내게 있어 그러했다. 무엇보다 '혹 가면 못 오는 건 아냐'라는 우스갯소리를 낼 만큼 알게 모르게 내 속에 자리 잡은 북에 대한 막연함은 나를 더욱 설레게 하였다.
오후 2시, 서울 을지로 입구에서 관광버스를 대절, 명동 향린교회 교우 20명과 '금강산가기 운동본부' 본부장을 맡고 있는 문대골 목사 부부와 함께 1차 목적지며 숙소인 강원도 고성의 금강산 호텔로 출발했다.
버스에 올라탄 이들은 대부분 이번 금강산 관광이 초행이다.
그래서일까? 목적지까지 이르는 4시간 30분은 좁혀지는 거리만큼이나 북을 향해 가까워지는 가슴을 느끼며 남녀노소 없이 눈빛을 더욱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통일이 별거입니까. 자유롭게 많이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 통일하러 갑니다. 이 몸이 통일하러 갑니다"라면서 미소 띤 감격의 얼굴을 한 흰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도, "떠나기 전, 저는 북을 다른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통해 저는 우리나라임을 느끼고 싶습니다"라는 서른 즈음의 젊은이도 민족의 동질성을 몸으로 실감하기 위한 거리 좁히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통일을 열어간다는 마음과 명산 금강산을 보러 간다는 즐거움으로 저녁 7시 드디어 숙소인 금강산 호텔에 도착했다. 아직은 이름뿐인 남쪽의 숙소지만 해변을 두른 철조망과 '북한제(?)'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들에서 여기가 북으로 가는 길목임을 느낄 수 있었다.
저녁식사와 예배, 그리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모두 숙소에 들어갔지만 쉽게 잠들지는 못했다. 오랜만에 듣는 시원한 파도소리와 옥빛 밤바다 빛깔도 한 몫을 했지만 오랜만에 일상을 벋어나 잠자리를 함께 하는 교우들 간의 담소는 새벽이 가까워질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도란도란 이부자리 담소도 그치고…. '눈을 감았을 뿐인데 벌써 3시간이 지났나' 출발을 서두르라는 전화 소리. 어제 설렘이 과했을까. 눈에 붙은 졸음들이 쉽게 떨어지지 않지만 하나 둘 식사를 마치고 새벽 6시 20분경 금강산으로 가기 위한 첫 도착지인 동해선 도로 남북출입 사무소에 향했다.
단 7분, 출입국 사무소까지는 무척 가까웠지만 금세라도 비무장 지대를 통과해 들어갈 줄 알았던 기대와 달리, 출발은 2시간 뒤라야 한단다.
"북측 분들은 거짓말을 싫어합니다. 목에 걸린 주소와 이름, 그리고 직업을 다르지 않게 말해주세요."
"집결지인 온정각 휴게소까지는 촬영 금지입니다."
"휴대폰은 저희가 모두 수거합니다. 물론 배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가 아플 만큼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는 안내 조장의 말을 듣고서야 남과 북의 출입국사무소를 거쳐 고대하던 금강산 온정각 휴게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도중 보이는 철조망과 검문소, 그리고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1937년 만들어져 14년간 운행됐다는 철길이 조국의 분단 상황을 사실감 있게 다가왔다. 또 작지 않은 숫자의 자전거들이 어디론가 이동하고, 엄마로 보이는 여인의 손을 끌려 한참의 거리를 걷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눈에 잡혔다.
칙∼ 실린더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열린 버스 문 사이로 북의 공기가 들어왔다. 여기가 북이구나. 생각뿐일지 모르지만 공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이후 우리는 자칭 '예쁜 이 조장'의 안내에 따라 부랴부랴 원화를 달러로 환전해 다시 모여 시간상 구룡연과 만물상 코스를 선택해 관광을 시작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세요"... 소변 한 번에 1불
왕복 6Km의 만물상 코스가 구룡연 코스(왕복 8.6Km)보다 좀 더 가깝지만 경사가 가파르고(평균 40도 이상) 험해서 나이 든 분들이 가긴 어렵고, 당일 일정인 분들은 도착 이후 온천이나 관동 팔경의 하나인 해금강 코스를 구경하기 위해 구룡연 코스가 나을 것이란 '예쁜 이 조장'(그냥 '이 조장'이라 부르면 대답 안 한다)의 권유에 따라 모두 구룡연으로 올랐다.
물론 떠나기 전 '예쁜 이 조장'은 다시 주의 사항 몇 가지를 잊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정보 하나를 알려줬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고 가십시오."(?)
'북'도 동남아 몇몇 나라와 마찬가지로 큰 호텔이나 시설이 아닌 간이 화장실은 유료다. 때문에 올라가는 도중 급하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
작은 것은 1달러, 큰 것은 2달러. 사정이 이러하니 '예쁜 이 조장'의 절약 노하우가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아무튼 우리는 목란관, 수림대, 앙지대, 삼록수, 금강문, 옥류담, 구룡폭포와 상팔담으로 이르는 4.3Km의 코스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에 놓여선지 푸름과 울창함을 엿볼 순 없었지만, 눈 무게에 꺾여 잔가지가 없이 곧게 뻗은 소나무(이곳에선 '미인송'이라 부른다)는 북쪽 사람들의 기상을 엿보게 했다.
오후 12시 10분까진 도착해야 해금강을 구경할 수 있다는 말에 부랴부랴 오르기 시작한 금강. 그동안의 운동 부족을 탓해야 할까? 곱절을 더 자신 노인의 발걸음에 뒤지지 않기 위해 몸이 아우성을 쳤지만 내색하지 않고 여유 있는 척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중간 중간 쉬어가며 올라야만 했다.
"명산이구나∼" 굽이굽이 흐르는 옥빛 산수와 조금이라도 높을라치면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가 절경이다. 가로지른 다리 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와 멀리 구름과 노니는 봉우리가 역시 금강산이란 느낌이었다.
터무니없이 많은 '찬양'의 글들이 '심하다'라는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듯 바위틈으로 입구를 통과하는 금강문과 하늘에서 쏟아지든 떨어지는 구룡의 물줄기와 이를 감상하기 위해 만든 관폭정의 아기자기함이 매력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며 김일성 주석이 의미를 부여한 장소와 기념물이 국보 이상의 가치를 가지며 의미를 부여한 장소엔 항상 돌비석이 있고, 이를 설명 혹은 관리하는 관리인들이 붙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흰 자갈 위에 세워진 비석엔 일반의 촬영은 가능하지만 올라가거나 했다간 당장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들어는 왔지만 김 주석에 대한 북쪽 사람들의 인식은 참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예쁜 이 조장의 말에 따르면 몇 해 전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 관광객이 구룡 정상에 올라 무슨 객기에선지 "정일아, 내가 왔다!"라고 외쳤고, 주위 관리인들과 우리 측 가이드들의 머리가 쭈뼛 서는 일이 있었단다.
다행히 일행 중에 다른 성의 '정일'이란 사람이 있어 사건은 겨우 무마됐지만, 북측 사람들의 은연중 보이는 김 주석에 대한 생각을 유추해 보건대, 얼마나 당황이 되었을까 상상이 간다.
꽁지에 불붙은 듯 4시간 거리를 2시간 만에 완주한 우리는 식사 후 관동 팔경의 하나인 삼일포 해금강 코스를 가려 했지만, 눈보라와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일행으로 인해 포기하고 일부는 쉬고 여성(공사 관계로 남성은 온천 금지)들은 온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리저리 온정각 휴게소와 기념품 판매소를 배회하던 우리는 한 장의 단체 기념촬영과 함께 오후 4시경 다시 남쪽 출입국 관리소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선녀는 출장 중, 못 믿으면 버스에서 내려
하지 말라면 꼭 한번 해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성일까? 그렇게 주의를 줬음에도 다른 버스 승객 중 한 명이 휴대폰 배터리를 몰래 반입 30분의 실랑이 끝에 겨우 출발하게 됐다. 참고로 '예쁜 이 조장'의 말에 따르면 이 경우 벌금이 북측에서 부르는 값대로 줘야 하고 물론 물건도 압수라고 한다.
한편, 기다리는 30분 동안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토해내며 승객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예쁜 이 조장'의 기염이 눈부셨다. 그녀에 따르면 "오늘 상팔담에서 선녀를 보진 못했을 것"이라는 한다. 이유는 오늘 자신이 당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팔담에 오르지 못했다나…. 못 믿겠다면 지금 버스에서 내려 북에 그냥 남으라는데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한 소리 웃음과 함께 들어온 차례대로 다시 서울로 출발했다. 오는 길, 오랜만의 바쁜 산행이었던 듯 모든 피곤함에 졸며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깨는 중간 중간 나이 든 이들의 눈은 여전히 감기지 않은 채, 때론 '금강산을∼' 흥얼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세월 따라 방문 감동도 다른 것일까?
아무튼, 우리는 오후 5시 조금 넘게 출발해 밤 10시경 서울로 들어왔다. 짧은 여행이었고, 고작 1만2천 봉우리 중 단 한 곳만을 보고 왔지만, 나는 북을 갔다 왔다는 것, 그리고 관념으로만 느꼈던 통일의 길에 한 걸음 더 다가섰음을 느꼈다.
시작이 반이라고 말했듯, 통일은 이미 우리 민족에게, 그리고 나에게 절반만큼 이뤄졌고 절반도 채 남기지 않은 거리만을 남겨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신문 에큐메니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