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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감독 박재현씨.
ⓒ 안윤학
"자막없는 영화를 어떻게 봐?"

헐리우드 영화를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한국 영화를 보는 청각장애인들의 불만이다.

자막없는 한국 영화가 일반인에겐 당연하지만, 청각장애인에겐 그렇지 않다. 들을 수 없는 그들에게 자막없는 영화는 무의미하다. 이들은 이른바 '천만인이 본 한국 영화' 조차 극장에서 맘껏 즐길 수 없다.

그러나 한국 영화 대부분은 자막이 없다. 수화 통역사가 화면 한켠에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자막 뺀 외국 영화'가 일반인들에게 그렇듯, '자막 뺀 한국 영화'는 농인들에게 '그림의 떡'인 셈이다.

이런 청각장애인들의 '한'을 담은 단편영화가 나왔다. 박재현(26) 감독의 8번째 작품 <그림의 떡>이 그것이다.

박 감독은 장애인 인권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겐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지난해 '제4회 장애인인권영화제' 수상작 <어느 애비의 삶>으로 우리에게 '농인(청각장애인)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인 바 있다. 박 감독도 청각장애인이다.

지난 9일 저녁 서울 종로 서울극장 인근에 위치한 '수화사랑카페'에서 열린 <그림의 떡> 시사회에서 박 감독을 만났다.

청각장애인에게 자막 없는 영화는 '그림의 떡'

<그림의 떡>은 흑백에 무성영화다. 박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농인영화는 이제 막 출발선을 벗어났기 때문에 흑백으로 만들어야 제맛이 난단다. 초창기 영화가 흑백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소리 없는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청각장애인이 제작했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주인공이 '농인'이기 때문에 대사(음성)도 필요없다.

영화는 한 청각장애인이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볼 수 없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또 그곳에서 겪는 어색함, 서러움, 슬픔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20대 중반의 영화를 사랑하는, 그리고 여배우를 동경하는 남자다.

주인공은 어느날 길거리에 나붙은 영화 포스터에서 배우 '김혜수'씨를 본다.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말은 못해도 그의 얼굴엔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를 꼭 보고싶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앞뒤 잴 것 없이 극장에 가 영화표를 산다.

그러나 그에겐 모든 곳이 그렇듯, 극장 또한 정막만이 흐르는 곳이다. 주변이 들썩거려 둘러보면 사람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다 웃는데 그만 웃지 못한다. 배우의 음성을 들을 수 없으니 스크린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 도리가 없다. 어색한 미소만 지을 수밖에.

시간이 흐르자 잠이 쏟아진다. 졸다, 보다를 반복하다 결국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영화가 끝난 뒤 관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기나긴 크레디트도 다 올라갔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꿈나라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흔들어 깨운 뒤에야 그는 정신을 차린다. 서러움이 복받쳤다.

한달 뒤, 이번에는 수화 통역사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싱글벙글한 얼굴엔 기대감이 잔뜩 묻어났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감으로 바뀌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옆에서 바삐 움직이는 수화 통역사와 스크린을 번갈아 보는 데 금세 지쳐버렸다. 중요한 장면을 놓치기도 수차례, 결국 또 잠이 든다.

꿈 속에서 그는 자막이 곁들어진 한국 영화를 보며 남들처럼 웃고, 즐긴다. 그러나 단지 꿈 속에서만이다. 이젠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 <그림의 떡>의 한 장면. 청각장애인인 주인공은 극장을 찾았지만 자막이 없어 결국 잠이 들고 만다.
ⓒ 영상캡처
"탁탁탁" 노트북 두대로 감독과 나눈 인터뷰

영화 상영이 끝난 뒤, 박 감독과 노트북 두 대로 이야기를 나눴다. 기자의 노트북으로 질문을 던지고, 박 감독의 노트북으로 답변을 하는 식이었다. 수화를 할 수 없으니 '탁탁탁' 키보드를 두드릴 수 밖에.

박 감독은 자막없는 영화를 보며 답답함을 넘어 절망까지 느껴야 하는 청각장애인의 현실을 보여줬다. 동시에 무성영화의 방식을 택해 비장애인들에게 역으로 "답답함을 느껴보라"고 '요구'했다.

"농인(박 감독은 청각장애인이라는 단어 대신 '농인'이라는 표현을 썼다)은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봐야합니다. 한국 영화에 자막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왕의 남자>나 <괴물>이 천만 관객을 넘어 영화 선진국이 됐다고 자랑하기에 앞서 장애인들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살펴봐줬으면 좋겠습니다."

박 감독은 "남들처럼 '왜 우리를 차별하는가'라며 시위라도 하고 싶다"는 심정을 털어놨다. 그는 "한국 영화를 보고 싶은데 자막이 없으니 주로 외국 영화를 본다, 그래서 존경하는 한국 감독도 별로 없다"며 씁쓸해했다.

서서히 자막있는 한국 영화를 상영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다. 지난해 서울 용산CGV·삼성동 메가박스에서는 <왕의 남자>가 영화진흥위원회·한국농아인협회 주최로 자막 상영됐다. 또 지난 2005년엔 영진위·한국농아인협회가 '한국영화 한글자막 및 화면해설 상영 시범사업'을 실시한 바 있다.

▲ 박재현 감독과의 인터뷰는 두대의 노투북을 나란히 두고서 이뤄졌다.
ⓒ 안윤학
"자막 없어 한국인이면서도 한국 영화 외면하게 돼"

그러나 턱없이 미진한 수준이다. 박 감독은 "자막 상영이 조금씩 늘고 있긴 하지만 상영 작품·시간·장소가 제한돼 있다"며 "농인이라고 시간에 쫓기며 영화관을 찾아야 한다는 건 불평등"이라고 토로했다.

'DVD에는 한국 영화에도 우리말 자막이 나오지 않느냐'는 우문을 던져봤다. 박 감독은 "남들과 같이 극장에 가 영화를 보고 싶어도, 똑같은 돈을 낸다해도 갈 수 없는 '차별'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자막 상영 쿼터제'와 같은 법을 영진위가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작·배급사의 관심도 호소했다.

한편, 이날 수화사랑카페에는 박 감독의 지인 등 10여명이 찾아와 영화를 감상했다. 대부분 비장애인들이었다. 관객들은 박 감독의 다소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정영훈씨는 "영화적 재미보다는 메시지에 주안점을 둔 영화같다"며 "청각장애인들이 자막을 뺀 한국 영화를 볼 때 가진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영화감독 박재현씨는 누구

박재현(26) 감독은 세 살 때 심한 중이염을 앓은 뒤 청력을 잃었다. 캠코더를 처음 잡은 건 중학교 때. 그에게 캠코더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뒤 신학대에 진학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데 수화 통역사 하나 없는 학교"에 염증을 느껴 자퇴했다.

영화제작자의 길로 접어든 건 청각장애인 친구들이 그가 촬영한 영상에 흥미있어 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난 뒤였다.

첫 작품은 2005년 종교 문제를 다룬 영화 <친구>다. 이후 한 장애인 가장의 실제 죽음을 바탕으로 한 <어느 애비의 삶> 등 현재까지 총 8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의 영화에는 모두 소리가 없다. 등장 인물들은 수화로 대화를 나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농인(청각장애인을 위한)영화'라고 부른다.

현재는 지난 2005년 동료 3명과 함께 만든 농인독립영상제작단 '데프미디어'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또다른 관객 김보식씨는 "대사가 없는데도 구성이 잘 짜여져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며 "주인공이 꿈 속에서 자막 있는 영화를 보며 폭소를 터뜨리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 감독은 오는 5월께 수화사랑카페에서 '농아인 영화인의 밤'을 연다. 또 곧 9번째 작품 구상에도 들어갈 예정이다.

박 감독의 영화에는 웅장한 배경음악도, 현실적인 음향효과도, 멋들어진 대사도 없다. 그러나 소리 없는 영화를 통해 그가 말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소리 없는 세계에 사는 사람을 위해, 눈으로 소리를 느낄 수 있다면." (<그림의 떡> 자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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