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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매기 오름정상에 핀 봄의 화신.
알바매기 오름정상에 핀 봄의 화신. ⓒ 김강임

남녘의 봄은 어디만큼 왔을까? 사람마다 봄을 맞는 느낌은 다르지만 제주의 봄은 '화산의 터'에서부터 시작된다.

경칩이 지난 3월 11일, 해송 가득한 '화산의 터'로 봄을 찾아 나섰다. 감귤원과 목장이 이어진 들판에는 신록이 묻어났다. 겨우내 눈 속에 묻혔던 잡초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냉이와 쑥도 제법 물이 올랐다. 남녘의 대지는 봄을 잉태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알바매기 오름 속으로.
알바매기 오름 속으로. ⓒ 김강임

제주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알바매기 오름, 표고 394m의 이 곳은 여우꼬리보다 짧은 겨울 햇빛을 먹고 자란 식물들이 기지개를 켜느라 분주했다.

오름 중턱에서 언땅을 딛고 일어서는 새싹들.
오름 중턱에서 언땅을 딛고 일어서는 새싹들. ⓒ 김강임
딱딱한 가지에 새순이 나오고 있다.
딱딱한 가지에 새순이 나오고 있다. ⓒ 김강임
딱딱하던 가지에 새 순 돋는 소리, 언 땅을 딛고 솟아나는 새싹 소리, 삼나무 가지에 물오르는 소리, 생명을 잉태하는 소리가 '화산 터'에 진동했다.

알바매기 오름 언덕배기로 발길을 옮겨보았다. 비스듬히 누워있는 묘지 주변에는 삐죽이 얼굴을 내미는 새싹들이 왁자지껄 하다. 지난 겨울이 무척 길었나 보다. 억새와 삼나무 숲을 지나자 겨우 한사람 정도 오를 수 있는 소로가 나왔다.

숲속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듯이 한적한 알바매기 오름 숲은 발길 닿는 곳이 길이다. 그리고 그 길 옆에는 작은 정원이 펼쳐진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는 삼나무 숲은 키 작은 생명체를 보호한다. 서로가 상생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사람 사는 세상과도 같아보인다.

오름 중턱에 오를 때였다. 붉은 스코리아를 밟아보니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난다. 마치 낙엽 밟는 소리처럼 들린다. 급경사로 이어진 비탈길을 올랐다. 앞서 가는 나그네가 길을 인도한다. 오름 길이라야 아주 좁지만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으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산속에서 행인을 만나는 기분은 마치 지인을 만난 것처럼 기쁘다. 누군가는 길을 밝혀주기 위해 나뭇가지에 흔적을 남긴 자국이 있었다.

자신의 얼굴에 색칠을 한 나무들이 나그네를 인도하는 알바매기 오름길. '알밤과 같다'하여 붙여진 알바매기 오름 중턱에는 겨울을 난 밤송이 껍질들이 뒹굴고 있었다.

제주 오름중턱 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호신.
제주 오름중턱 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호신. ⓒ 김강임

오름중턱에 누워있는 묘지 앞에는 각양각색의 표정들이 숨어 있었다. 묘지 앞에 자리 잡은 돌의 표상. 제주인들에게 돌은 수호신으로 통했다. 그 표정 하나하나에 묻어있는 이미지는 섬사람들의 역사를 말해 주는 것 같다.

늙은 해송에 더부살이 하는 콩짜게란.
늙은 해송에 더부살이 하는 콩짜게란. ⓒ 김강임
정상에 핀 봄꽃, 세상에 봄을 터트리다.
정상에 핀 봄꽃, 세상에 봄을 터트리다. ⓒ 김강임
늙은 해송 살갗에는 또 하나의 생명체가 둥지를 튼다. 고목나무에 뿌리를 내리는 콩짜게란은 푸른 이끼를 온 몸에 칭칭 감고 더부살이를 한다. 이렇듯 오름 속에는 모든 생태계가 공생공존한다. 약자와 강자가 서로 어우러져 사는 모습, 자신의 몸에 타인의 삶의 터를 마련해주는 늙은 해송. 봄은 그 늙은 고목나무에게도 햇빛을 흠뻑 주고 있었다.

20분정도 비탈길을 올랐다. 다시 급경사가 나타났다. 오름에서의 급경사는 느슨한 마음을 긴장하게 만든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밧줄을 잡고. 미끄러지듯 붉은 송이를 밟으니 온몸이 후끈거린다. 벌써 내안에도 봄이 꿈틀거린다.

마침 알바매기 오름 형상이 나타난다. 아뿔싸! 그런데 알바매기 오름은 2개의 오름이 이어져 있었다. 바로 정상에 도달한 것 같았지만 다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정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연속이었다. 죽은 나무에 영양분을 빨고 있는 버섯은 봄의 기운에 빠져있었다.

알바매기 오름 정상 말굽형분화구에는 봄이 한창이다. 순백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며 오름 정상을 지키는 봄꽃. 제주의 봄은 해발 394m의 고지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주머니 같은 봄꽃 꼬투리에서 개화를 시도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나는 숨을 죽였다. 소리 없이 피어나는 봄꽃.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함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함이다. 내가 그 꽃 이름을 불러주었더라면 그 순백의 꽃은 개화의 진통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을 텐데…. 말굽형분화구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김춘수의 '꽃'이 생각났다. 사람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면 느낌이 달라지는 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억새 군무 속에 둥지를 튼 곤추충 겨울나기.
억새 군무 속에 둥지를 튼 곤추충 겨울나기. ⓒ 김강임

말굽형분화구에는 억새의 군무가 시작됐다. 억새무리 속에도 생태계는 존재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집을 지었던 곤충들의 보금자리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정상에서 본 제주의 풍광.
정상에서 본 제주의 풍광. ⓒ 김강임

알바매기 오름의 진수는 해발 394m 정상에서 보는 제주의 풍광. 동쪽으로는 멀리 우도가 한눈에 보이고 코앞에 펼쳐지는 보리밭의 푸름, 우뚝 솟아 있는 다랑쉬 오름, 아스라이 떠 있는 수평선, 그곳에 서면 지구 끝이 보이는 착각을 느낀다. 그리고 알바매기 오름 정상 순백의 꽃망울은 세상에 봄을 터트린다.

알바매기 오름 표지석.
알바매기 오름 표지석. ⓒ 김강임
알바매기 오름은 제주시 조천읍 남쪽에 있는 표고 394m의 오름이다.

'비매기 오름'이라 불러 왔다. 오름 남쪽에는 웃바매기 오름, 동쪽에는 북 오름이 있다. 오름 북서쪽 비탈에 굼부리가 있는데 화산활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침식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름 대부분은 해송과 삼나무가 심어져 있고 북동쪽에는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동산'이 있다. - 알바매기오름 표지석에서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 제주시-동쪽(12번 도로)-함덕-선흘-16번 도로(7.3km)-목선동 사거리-알바매기 오름 표지석이 있으며 40분정도 소요된다. 알바매기 오름을 탐방하는 데는 1시간정도가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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