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
일본에 야마자키 다쿠(山崎拓)란 중의원 의원이 있다. 나이 70을 넘긴 12선 의원으로, 자민당 내의 한 파벌을 이끌고 있는 중진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시절에는 자민당 간사장과 부총재를 지내는 등 정권 핵심에 있었으나, 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는 소원한 관계다.
야마자키 의원이 아베 총리의 뜻을 거스르면서 평양을 방문한 것은 지난 1월9일. 그 전달에 열린 6자회담 5차 2단계 회의가 사실상 결렬 상태로 끝나고, 다음 회담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동북아 정세가 안개에 싸인 상황이었다.
더구나 '납치문제'로 북한과 첨예한 대립을 계속하고 있던 일본에는 북한과의 대화조차 꺼리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아베 총리가 "방북 추진을 중단하라"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을 정도다. 대중정치인으로서 이런 여론 동향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지는 상상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야마자키 의원은 방북을 강행했다. "지금 일본정부가 취하고 있는 압력 일변도로는 결코 문제를 풀 수 없다"며 "대화로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5일간의 방북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아베 정권이 북한을 둘러싼 정세를 잘못 읽고 있다"면서 대북정책의 수정 필요성을 제기했다.
당시 그는 "3월이 되면 북ㆍ미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예고했다. 수면 아래의 북한과 미국 움직임을 정확히 읽고 있었던 것. 과연 며칠 후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의 '베를린 회동'이 전격적으로 이뤄지면서 한반도 정세는 급물살을 탔기 시작했다.
야마자키 의원은 본래 대외정책에서 강경보수 성향이었다. 한때 성 추문으로 정계 퇴출위기까지 몰렸다가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한 구식 정치인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의 대북 대화 시도가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면은 있지만, 일본의 국익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1월 방북 자체는 '의원외교'로서 높이 평가 받을만하다.
눈앞의 여론에 매몰된 편중된 정책으로 인해 정부의 외교가 고립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미리 경고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아베 정권은 현재 그의 조언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인상이나, 향후 한반도 정세의 변화 속도가 빨라질수록 방북외교의 진가는 더욱 선명히 나타날 것이다.
#2 한국
이해찬 전 총리 일행이 무성한 추측과 분석 속에서 북한을 다녀왔다. 정치인의 방북이 이제는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닌 세상에서 이번 방북이 그토록 큰 뉴스로 취급됐던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남북정상회담과의 연관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방북 계획이 언론에 흘러나온 순간부터 돌아와서 결과를 설명하기까지 전 과정을 통해 참으로 의아한 대목이 있다. 이 전 총리는 정상회담과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방북의 산파로 알려진 이화영 의원은 연관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엇박자 행보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화영 의원은 출발 전부터 남북정상회담 성사가 방북 목적이라는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더니 방북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나와서는 "정상회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게 가장 큰 성과"라고 말했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그의 '남북정상회담 띄우기' 행보는 계속됐다. "정상회담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남북정상회담과 미국, 중국까지 참여하는 4자 정상회담이 동시에 진행될 수도 있다"라는 등 구체적인 안이 추진되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했다.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는 "이 전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달할 북측 메시지에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내용도 포함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 총리는 그 때마다 "내 일을 하러 가는 것" "정상회담 검토는 내 의견일 뿐" "정상회담 관련 메시지는 없다"라며 이화영 의원이 쏟아놓은 말을 사실상 부인하기에 바빴다.
이화영 의원의 발언들을 보면 결국 자신이 확보하고 있는 대북 채널로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 의원의 대북 채널은 적어도 지난해 가을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이라면 당시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서 핵실험으로 이어진 얼어붙은 남북관계 속에서 이 의원이 독자적인 활로를 모색해왔다는 점은 높이 평가 받을만하다.
그러나 이번 방북을 전후로 이 의원이 보이고 있는 언행을 보면 그가 국제정세와 남북관계의 관련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고사하고,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이 속한 정파의 입장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그가 시사하고 있는 구도로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노무현 정권이 밝혀온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원칙은 새빨간 거짓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지 모르겠다.
#3 청와대
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6자회담에서 북핵 문제가 해결된 이후 이뤄져야 한다는 인식을 비교적 선명하게, 반복해서 밝혀왔다.
남북정상회담은 원론적으로 항상 문을 열어놓고 있으나 지금 시기에 이뤄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6자회담 안에서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우선시해야 할 때이다. 6자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은 순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성사 가능성에 대해 대통령의 생각을 묻는다면 '이 환경에서는 어렵다' 이다. (1월23일 신년 기자회견)
내가 하기 싫어서 정상회담에 부정적이었던 게 아니다. 안될 일을 자꾸 주장할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장애물 없어지면 우리도 바빠지지 않겠나? 그때 만나면 할 일이 있는데, 지금 우리끼리 만나서 약속을 해도 미국과 중국의 합의를 다시 받아내야 한다. 그러면 되는 게 별로 없다. 빗장이 풀릴 지 안 풀릴 지 모르는데, 만나는 것이 여러 가지 상황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2월27일 인터넷신문협회 기자회견)
지금은 핵 문제 해결이 다른 어떤 과제들보다도 중요하며, 6자회담이 문제해결의 가장 유용한 틀이라는 것이 노 대통령의 생각임을 알 수 있다. 남북관계가 앞서가는 것은 전반적인 문제 해결에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도 선명히 나타나 있다.
이런 인식과 방향은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나 이재정 통일부장관 등을 통해서도 현 정권의 일관된 의지로 확인된다. 송 장관은 "남북관계는 6자회담을 보완,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밝혔고, 이 장관은 최근 "지금은 남북 정상이 만나서 풀어야 할 과제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현 동북아 정세의 현실적 역학관계를 정확히 본 균형감 있는 방향설정이다. 그런데 만약 이화영 의원 채널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메시지가 오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모든 설명은 국민을 기만해온 '대사기극'이 된다.
#4 한나라당
이 전 총리 일행의 이번 방북은 나름의 의미도 있고, 성과도 있었지만 야마자키 의원의 방북처럼 수면 하의 정세를 읽어낸 통찰력의 결과는 아니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 방향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도 없다. 최초 시도는 방북으로 국면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의도였는지 몰라도, 결국 정세의 흐름을 뒤쫓아간 것에 불과한 상황이 됐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화영 의원이 자꾸 남북정상회담을 언급하는 것은 결국 한나라당의 정치공세에 이용되면서 본질을 왜곡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고 있다. 이 전 총리의 방북이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것'이라는 입장은 이 의원과 한나라당이 일치한다. 이 의원이 한나라당에 동조하는 것인지, 한나라당이 이 의원을 띄워주는 것인지, 잘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북한이 '한나라당 집권 저지'를 공언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남북간 비밀접촉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나무랄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자꾸 의혹의 빌미를 제공하는 측에 있다.
실제는 어떻든, 남북정상회담이 불필요한 정치공방을 낳아 '정략'이란 인식이 퍼지게 되면 분위기가 성숙해 자연스럽게 성사되더라도 역효과를 낳을 우려가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결과를 원치 않는다면 이화영 의원은 더 이상 '오버'하지 말아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은 그렇게 추진되어서도 안되고, 그렇게 추진한다고 풀릴 문제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