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천주교회사에서 최초의 순교자로 일컫고 있는 사람은 윤지충(尹持忠, 1759~1791)이다. 윤지충은 진산(현 충남 금산) 출신이지만 공재 윤두서의 아들인 윤덕희의 넷째 덕렬의 손자가 된다.
그가 당시 조선의 완고한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이를 지키기 위해 순교까지 한다는 것이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 후기 새로운 학문과 예술의 발전이라는 급변하는 시대 상황과 해남 윤씨가 인물들의 교유를 살펴보면 윤지충의 천주교 순교가 단순한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학으로 들어온 천주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친 시기로 보고 있다. 처음에는 주로 명나라에 다녀온 사신이 서양의 자연과학서적과 더불어 천주교에 관한 한역(韓譯) 서적을 얻어왔으며,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서양학문의 하나로서 이해되어 서학(西學)이라 부르고 있었다. 광해군 때의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마테오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를 소개하며 천주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18세기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생성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진행될 때였다. 천주교는 18세기 후반 정조 때에 이르러 이익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남인실학자들이 유교의 고경(古經)을 연구하는 가운데 천주(天)를 옛 경전의 하늘과 접합시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때 정약종, 정약용 형제, 권철신, 이벽 등 남인 명사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는데, 해남 윤씨가의 인물들이 남인에 속했던 것을 보면 이들과의 교유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윤지충은 당시 진산(珍山) 장고치(현 금산군 벌곡면 도산리)에서 태어나 막현리로 이주해 살던 해남 윤씨가 집안의 인물로 고산 윤선도는 윤지충의 6대조이다.
정약용의 어머니가 해남 윤씨이듯이 해남 윤씨가와의 관계는 상당히 각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정약종과 정약용 형제는 윤지충의 고종 사촌형이었다. 윤지충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정씨 형제들과의 학문 교류의 결과였다. 윤지충은 1787년~1788년 무렵에 세례를 받은 후 그동안 배워 오던 학문 대신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상 제사 금지령을 하달하자 신주를 폐하였고, 다음해 모친이 선종하자 전통 상례(喪禮)를 하지 않고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 사실이 지방의 관장과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신해박해'의 원인이 된 '진산사건'이 되었다.
윤지충은 내외종간인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감동해 믿기로 작정하였으며, 가까이 사는 외사촌 권상연은 윤지충에게서 '천주실의' 등의 교리서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윤지충이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이를 통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 소외된 남인계열 학자들의 교유와 만남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
천주교는 교세가 점점 확대 되자 유교식 제사를 무시하는 신도의 행위가 당시의 성리학적 사회질서 속에서는 불효와 패륜으로 비쳐졌기 때문에 국가의 금압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1785년(정조9) 천주교는 사교(邪敎)로 규정되고 북경으로부터 서적수입을 금하였으며, 1791년 어머니 제사에 신주를 없앤 윤지충을 사형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남인에 우호적이었던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써서 큰 탄압은 없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즉위하고 노론벽파가 득세하자 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되어 있던 남인시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대규모의 천주교도 탄압이 가해졌다. 1801년(순조 1)의 대 탄압을 '신유사옥'이라 하는데 이때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등 300여명의 신도와 청나라의 신부가 처형되고, 정약용, 정약전 형제가 유배되었다.
정약용 형제는 3형제 중에 정약종이 죽고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를 당해 당시 새로운 학문과 문화에 대한 선진지식을 추구하고자 했던 학자들의 모습을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느껴볼 수 있다.
선진 문화에 대한 추구
이같은 새로운 학문과 문화에 대한 추구는 해남 윤씨가 인물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이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는 선진문물을 대할 수 있는 창구였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필요로 하는 학자들은 중국이라는 통로를 이용해야 했다.
윤지충 또한 당시 서학이라는 학문적 접근의 맨 앞에 서 있던 인물로 그는 1789년 북경에 가서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고 귀국하였다. 당시는 중국에서 받아들인 서양문물이 고스란히 우리나라에 전해져 왔으며 서학을 통해 끼친 실학의 영향을 볼 때 이 같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해남 윤씨가 인물들은 선대에서부터 여러 인물들이 중국과의 교류에 참여하고 있었다. 중국에 다녀온 인물 중에 가장 먼저 윤의중(尹毅中, 1524~1590)은 1559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 연경을 다녀왔다. 현재 녹우당에는 윤의중(고산의 조부)이 1562년(39세) 명나라 연경에 동지사로 갔을 때 받은 선물인 상아홀이 전시되어 있다.
윤홍중(尹弘中, 1518~1572) 또한 1559년 36세에 동지사로 명나라 연경에 다녀왔으며, 윤유기(尹唯幾, 1554~1619)는 1595년(선조 28) 광해군의 주청서상관(奏請書狀官)으로 명나라 연경에 다녀와서 '연행일기(燕行日記)'를 쓰기도 하였다.
윤지충과 정약용! 다산 정약용의 외조부인 공재 윤두서는 다산의 학문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으나, 어찌 보면 같은 시대에 가장 가까운 사이로 동시대를 동고동락 했던 인물이 윤지충과 정약용이 아니었나 싶다.
서학을 학문으로 접근하고자 했던 다산이 끝까지 살아남아 그 방대한 저술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다산에 비해 윤지충이 목숨을 걸고 천주교의 교리를 지켜내려 했던 것을 보면 두 사람은 종교에 대한 신념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새로운 학문(서학)내지는 종교(천주교)를 숭상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고난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