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눈이 소담스레 쌓인 어느 크리스마스 저녁, 산타할아버지가 선물해준 마법의 펜던트를 돌리자 눈앞에 나타난 커다란 머그컵. ‘베베’는 머그컵을 타고 하룻밤 사이 북극과 사막을 오가며 사고뭉치 북극곰 ‘빼꼼’, 로맨티스트 남극신사 ‘꽁꽁’, 최고 미녀 펭귄 ‘도도’, 사막의 만능 도마뱀 ‘후다닥’ 등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모험은 지금부터. 허둥지둥 캐릭터들 고유의 움직임을 따라가다보면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진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대사가 없다. 오로지 온몸을 내던지는 순도 100% 리얼액션(?)과 아크로바틱쇼를 능가할 만한 상황이 펼쳐질 뿐. 참으로 이상한 건 이 현란한 몸의 움직임이 곧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정통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표방하는 <빼꼼의 머그잔 여행>의 22일 개봉을 앞두고 임아론 감독을 만났다.
“국내에서는 사실 생소하죠. 캐릭터 애니메이션은 쉽게 말해 캐릭터들의 움직임만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르입니다. 독자들에게 뭔가 고급스럽다, 국내 것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 장르를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나섰어요. 무엇보다 모두가 즐겁게 보고 즐겼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76분짜리 ‘말없는’ 장편 애니메이션의 내용이 과연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래도 새로운 것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궁극적으로는 어린이들의 정서에 맞는, 우리 손으로 만든 고급 애니메이션으로 우리 어린이들의 정서 함양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5년의 시간 동안 20억 원이라는 예산을 들인 끝에 완성된 <빼꼼의 머그잔 여행>. 돌이켜보면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는데 단순히 저예산이어서 뿐만은 아니었다. ‘사소한’ 차이를 뛰어넘는 완성도를 갖추기 위해 더 많이 노력했다.
‘말이 없어도 지루하지 않아야 한다’. 캐릭터들의 동작과 태도로만 이야기를 끌어가야 하므로 동작 자체를 풀어내는 일조차 사실 만만치 않았다. 프레임별로 동작을 몇 번씩 고민하고 철저히 계산해야 했다. 한 컷, 한 신 처리에도 애가 탔는데 실제로 베베가 꿈꾸는 장면 중 베베와 펭귄 두 마리가 뛰어오다 넘어지는 움직임 하나만 잡는 데 두 달이 걸렸다고.
극장용이 완성되기 전부터 입소문은 자자했다. 처음 <빼꼼>이라는 제목으로 TV시리즈로 제작돼 이미 국내외 시청자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은 것. EBS에 인기리에 방영된 것은 물론, 프랑스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TV시리즈 부문에 초청됐고, 이어 영국 BBC, 미국 카툰네트워크, 프랑스 M6 등 세계 20개국 유명 방송국에 수출됐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애니메이션 대상 우수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첫 장편 개봉을 앞둔 지금, 임아론 감독은 20년 전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하곤 '잠이 오지 않던' 그때로 돌아간 듯 보인다. 2002년 알지애니메이션을 설립한 이래 알지만의, 임아론만의 색깔 있는 애니메이션을 위해 힘들어도 '독립적인' 제작 방식을 고수해온 그다.
“고생했지만 스스로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어요. ‘빼꼼’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투자자의 푸시도 없으니 급하지 않죠.(웃음) 우리 애니메이션산업의 미래요? 당연히 있죠. 오늘 우리 애니메이션을 보는 어린이들이 먼훗날 다시 우리 애니메이션을 찾게 될 거니까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