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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참한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골들.
ⓒ 양김진웅
▲ 총알이 지나간 흔적. 얼굴 옆에서 칼빈소총 탄두가 발견됐다.
ⓒ 양김진웅

일제시대 강제동원으로 제주민들이 수탈을 당했던 제주시 화북1동 4757의1 별도봉(오름) 근처 '일본 진지동굴' 현장.

이 곳에서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학살된 희생자 유해 8구가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일제점령기에 강제동원의 인권침탈 현장에서 미 점령기 시대에 학살터로 변모한 잔혹한 현장이 60여년 만에 제 모습을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차디찬 주검과 억울한 영혼은 말이 없었다.

일제시대 '인권수탈' 현장, 미군정땐 '학살터'로

21일 제주대학교와 제주4·3연구소로 구성된 4·3유해발굴단은 이날 오후 별도봉 진지동굴 현장에서 유해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이번 공개는 두번째. 지난달 유해 5구를 공개한 데 이어 추가로 3구가 발굴되는 등 발굴단은 현재까지 이 일대에서 모두 8구의 희생자의 유해를 확인했다.

지난해 5월 진지동굴 근처 화북 천변에서 유해 3구가 발굴된 것을 비롯해 속칭 '가릿당 동산' 각종 유해가 발굴수습하는 등 등 화북 곳곳이 4·3당시의 학살 및 암매장터였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유해발굴단은 이 곳에서만 지금까지 유해 8구를 비롯해 M-1 탄두와 칼빈 탄두·탄클립·탄피·동전·단추 등 유류품 130여점을 수습했다.

이번에 발굴된 유해 7구는 큰 손상 없이 온전한 상태로 발굴됐지만, 나머지 1구는 머리·상체 없이 골반 뼈와 다리 일부만 발견됐다. 또 온전히 보존된 유해 1구에서는 아래턱에 칼빈 탄두 총알이 뚫고 지나간 총상이 턱에서 확인됐다.

발굴단은 "유해 상태를 볼 때 학살 당시의 모습이기보다는 주민들이 밭에 널부러져 있는 시신을 가지런히 옮겨온 것 같다"며 유골들이 반듯한 모습으로 발굴된 이유를 밝혔다.

발굴연구책임자인 제주대 의대 강현욱 교수(법의학 전공)는 "1차 매장 후 갱도 입구가 막혀있을 정도로 붕괴돼 있었고 수분이 잘 빠지는 토양 특성이 있었다"며 "이 같은 상황 때문에 유골이 온전하게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괭이와 삽으로 일구면 머리뼈가 몇 포대라고"

▲ 척추뼈 앞으로 당시 입었던 옷에 달린 단추가 그대로 남아있다.
ⓒ 양김진웅

"교육대학 뒤편에 밭이 있었던 외할아버지가 어느 날 밭에 갔다 농로(현재 산책로)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죽은 사람들이 엉켜 있었다고 했다. 임석호씨 밭의 바로 위가 우리 외삼촌 밭이어서 어릴 적 자주 왔다 갔다 해서 그 지형은 익숙하다." (양옥자·여·1933년생·사건당시 화북리 거주)

"아내의 말을 듣고 위쪽에 묘가 있었던 곳 아래쪽 굴이라 생각했다. 또한 작년에 생존자를 만났을 때 하천을 건너지 않고 왔다는데, 교육대학에서 이곳까지 올 수 있는 길이 있었다." (김용두·남·1929년생·당시 화북리 거주)

"4·3 당시에는 시부모님이 그 밭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굴 앞에 학살된 시신들이 있어서 이를 잘 묻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60명까지 들은 바가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아무튼 시아버님이 굴 근처에는 가지 못하게 했고, 밭에서 일하다가 오후 4시만 되면 무서워서 돌아갔다…1970년대 초중순경 제주시청에 무연분묘 신고를 해서 밭 옆쪽에 있던 골총(돌보지 않는 묘)과 지금 동굴 앞쪽에서 유해를 이장했다.

그때 나는 무서워서 오지 못했고 시어머님이 술 한 되 사고 왔었다. 시어머님 말이 괭이와 삽으로 일구면 머리뼈 등이 나왔고 몇 포대를 싸서 공동묘지로 가져갔다고 했다. 반나절 정도 일했다고 했다." (이순덕·여·1936년생·당시 화북리 거주·토지주 며느리) / 별도봉 학살터 4·3희생자 유족 증인

60명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 유골 추가 발굴 가능성 높아

당시 밭 주인과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별도봉 일본군 진지동굴' 갱도에는 20~30명의 9연대 군인을 트럭으로 이동시킨 후 이곳에서 한 명씩 총살시킨 후 굴 안으로 밀어넣은 것으로 전해졌다. 별도봉 일본군 갱도에는 적어도 20~30명에서 최대 60여명의 희생자들이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군인 외에 민간인 희생자도 섞여있을 것으로 보여 앞으로 발굴상황에 따라 더 많은 희생자 유골이 추가로 발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게 발굴단의 설명이다.

실제 1948년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에 제주시 서부지역 출신의 민간인과 당시 무장대와 내통한 혐의로 일어난 이른바 '9연대 숙청사건' 당시 제주출신 군인들이 영문도 모른체 정식 군사재판도 거치지 않고 이곳 별도봉 일본군 진지동굴에서 학살된 후 암매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60여년의 시간이 지난데다 증언자의 진술이 다소 엇갈리는 부분이 있어 오는 3월말 발굴작업이 마무리될 쯤에야 정확한 유해 발굴 현황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해발굴단에 의해 발굴된 유해 8구는 제주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에 임시 안치한 후 앞으로 희생자의 후손과 가족을 찾아주는 유전자(DNA) 분석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 4·3유해가 나온 현장(왼쪽) 옆으로 매일 제주시민들이 드나드는 산책길이 나 있다.
ⓒ 앙김진웅
▲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는 제주4·3유족들.
ⓒ 양김진웅

"4.3 희생자 매장터 사라질 판"
김정기 4·3중앙위원 "더 늦기 전에 발굴현장 보존해야"

▲ 유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4·3유해발굴단의 연구원.
ⓒ 양김진웅
4·3유해발굴 사업이 활기를 띠면서 유해발굴현장을 그대로 보존 또는 재현하자는 현장 보존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날 발굴 현장을 찾은 국무총리 산하 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김정기 위원은 "인근 주민들과의 협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겠지만 현장을 보존하는 것이야 말로 훌륭한 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며 "더 늦기 전에 앞으로 발굴될 희생자 매장터에 대한 선별작업을 통해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학살터와 매장지에서 많은 유해들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며 "해당 토지주와의 협의 문제 등이 필요하지만 이를 위해 현장 '표석' 설치 작업과 함께 현장을 보존하는 방안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제주특별자치도 4·3실무위원회 이규배 위원(전 제주4·3연구소장)은 "난징대학살의 경우 처럼 유해가 묻혀 있는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등의 방식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보존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어 "희생자 신원 확인을 통한 명예회복 외에도 원혼들이 묻혀 있는 현장을 보존하고 재현해내는 것이야 말로 후손들의 역사교육장 활용 차원에서도 매우 필요하고 절실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유철인 제주대학교 교수(인류학 박사)는 "현재 별도봉 진지동굴은 근대문화유산 지정을 추진하고 있는 곳"이라며 "학살 매장터와 더불어 근대유적 지정 등을 통한 공동 보존 방안을 추진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관련 고권택 제주특별자치도 4.3사업소장은 "앞으로 500여곳이 넘는 4·3유적지 가운데 이미 복원 및 보전지정지구로 정해진 곳이 있다"며 "산재한 많은 유적지 가운데 중요도 순으로 선별해서 보존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유해발굴추진위원회가 발족된 만큼 희생자 매장터의 경우 4· 관계 단체와 협의하에 별도로 현장을 보전하고 재현해내는 등 행정차원에서 보존방안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제주4·3 연구소와 제주대학교는 지난 2005년부터 국비 지원 사업으로 제주특별자치도와 업무 위탁 협약을 체결하고 제주4ㆍ3사건 당시 학살·암매장된 희생자의 유해를 발굴하고 신원을 확인함으로써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4ㆍ3희생자 유해발굴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 양김진웅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주의 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4.3, #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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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대자(大者)는 그의 어린마음을 잃지않는 者이다' 프리랜서를 꿈꾸며 12년 동안 걸었던 언론노동자의 길. 앞으로도 변치않을 꿈, 자유로운 영혼...불혹 즈음 제2인생을 위한 방점을 찍고 제주땅에서 느릿~느릿~~. 하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 아이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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