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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권위주의'의 나라. 대한민국에 꼭 맞는 또 하나의 이름이다. 권위를 내세우는 방법으로 한자어를 비롯한 어려운 외래어가 흔히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금지를 알리는 안내문는 한자말이 많이 쓰인다. 이런 말은 사람들이 잘 알아듣기도 힘들다. 아파트, 학교, 관공서로 나눠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문자 권위주의'의 모습을 살펴본다. <필자 주>

'재활용 쓰레기 배출 시간 위반 시, 각 라인의 CCTV를 확인해 각 세대에서 버린 쓰레기를 저희 부녀회에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 아파트 부녀회'

오전 7시, 아파트에 사는 회사원 김태진(29·남)씨가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 게시판에서 마주친 문구다.

"각 라인의 CCTV가 뭡니까? 알 수가 없네요."

'문구의 뜻을 아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이씨의 대답이다.

안온생활? 구세대도 헛갈린다

▲ 한 아파트 배드민턴장 안내문. '일몰시간', '안온생활', '구기운동', '소음유발' 같은 지나친 한자말을 사용했다.
ⓒ 김청환
무분별하게 쓰이는 외래어나 한자어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비단 김씨 같은 20, 30대 젊은이들만은 아닌 듯 했다.

"이런 말을 꼭 써야 하나 싶어요."

서울 동대문구의 한 아파트에 사는 주부 이명자(60)씨가 한 말이다.

이씨가 사는 아파트 단지 배드민턴장에는 '일몰시간 이후에는 주변동 주민의 안온생활에 방해가 되는 구기운동을 삼가하여 주시고 일체의 소음유발 행위를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문구가 적혀 있다.

'안온 생활', '소음유발'은 잘 쓰지 않는 한자말이다.

이씨는 "70년대 '한글 전용'이 워낙 강조돼 학교에서 '한자' 과목을 배울 수 없었다"라며 "한자를 잘 몰라서인지 안내문을 잘 이해 못 할 때가 있다"며 불편함을 표시했다.

징구함? 방문요? 출차?

▲ 한 아파트 재건축조합 안내문. '징구함'이라는 죽은 말을 사용했다.
ⓒ 김청환
서울 성북구·동대문구에 있는 몇몇 아파트를 취재한 결과, 지나친 한자어 표기는 매우 흔한 사례였다.

안내문이 지나치게 어려워 오히려 안내를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면동의서는 징구함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장안평 L아파트), '경비초소 방문요'(안암동 B아파트) 등이 대표적이다.

성북구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 이병억(31·남)씨는 "이게 뭐냐? 알아야 신청하지"라며 '헤스티아 서비스'라고 쓴 현수막을 가리켰다.('헤스티아 서비스'는 한 아파트 회사가 외벽 새시 무료청소에 붙인 이름이다.)

이씨는 "안내문은 그야말로 쉬운 말로 써야 하는 것 아니냐"며 "좀 쉽게 설명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 '헤스티아'라는 외국어가 그대로 쓰인 현수막이 걸려있다.
ⓒ 김청환
성동구의 한 아파트에 사는 이선영(26·여)씨는 "소화전 사용방법에 '전개한다'는 말이 있어 한참 고민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 한 아파트 안내문에 '안면' '삼가' 등의 어색한 한자말이 적혀 있다.
ⓒ 김청환
특히 금지를 나타내는 안내문에 한자말이 많았다. '휴식과 안면에 방해가 되므로 저녁8시 이후에는 운동경기를 삼가…'(장안평 L아파트), '차량 출차 금지'(안암동 B아파트), '애완동물 배설물로 인한 세균오염 방지를 위해 동물 산책을 금지'(종암동 S아파트) 따위가 그 보기다.

성북구의 한 아파트에 사는 윤혜영(34·여)씨는 "외국생활을 오래하다 막 한국에 돌아왔을 때 안내물을 알아보기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며 아파트 근처에 설치된 운동기구가 있는 곳을 알려줬다.

이 운동기구에는 '본 기구를 사용 시 절대로 장난을 하시면 안되며 사용설명과 주의사항을 어기어 사고 발생시는 전적으로 사용자 본인에게 책임이 있으므로 주의하시어 이용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다. 한자어 사용은 물론 문장이 너무 길고, 주어와 서술어 호응이 맞지 않는 문장이었다.

관리사무소 "문제없다"

이런 현상에 대해 아파트 관리사무소 쪽은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가벼운 말보다는 풍채 있는 말이 금지에 더 어울리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면서도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안내문은 동민의 편의를 위해 조합과 감리기관의 심의를 거쳐 만들어진다"며 "개인적으로 주민들이 어렵고 딱딱하게 느낀다면 친근감 있게 고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오덕 선생에게 우리말 글쓰기를 배운 뒤 우리말 바로쓰기를 주장하는 안건모 <작은책> 편집장은 "글이란 남에게 자기 뜻을 알리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글들이 너무 많다"며 "'문자 권위주의라'는 말이 공감이 간다"고 말했다.

안 편집장은 이어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맙시다'하면 왠지 권위가 없는 것 같아서 '쓰레기 무단 투기금지'라고 쓰는 사람들도 있다. 글이 지식인들 전유물이라는 의식을 이젠 버려야 한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게 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문자 권위주의의 나라, 대한민국 - 대학교편'을 기대해 주세요


#문자#한자#권위주의#대한민국#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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